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도문에서 남양을 보며---

원평재 2005. 5. 12. 22:59

오랜만에 도문으로 갔다.

십여 년 전 백두산 천지로 갈 때에 연길에서 하루 밤을 자고 새벽에 들렸던 도문은

아직도 몽매의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현대도시로 탈바꿈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곳은 훈춘 해관(세관)의 지부였으나 지금은 거꾸로 하전자

분소였던 이 곳이 정식 세관이 되고 훈춘은 분소가 되었다 한다.

 

나다니엘 호돈이 쓴 "주홍글씨"의 배경인 세일럼(Salem) 항구가 시세에 따라

인근 보스톤에, 그리고 넓게는 뉴욕에 밀려 인구 겨우 25000 소도시로 전락한

모습을 보았던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건너편 북한의 남양시가 선입견인가 초라하게 보인다)

 

함께 간 역사학자의 경험과 지혜로 우리는 두만강 물이 흐르는 곳까지 나아가서 손을 물에

넣어 보았다.

며칠 전에 배를 탔던 푸른 압록강과는 달리 누런 뻘 물이 내 마음과 같았다. 

 


 


 

강의가운데에 있는 섬에는 북한군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중조 협약에 의해서 강 가운데의 섬은 모두 북한 쪽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쪼갤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그나마 다행인가.

 

 

 

 

 

 


 


 

두만강 푸른물에--, 김정구의 구성진 노래는 원래 1930년대 중반에 극단 예원이

중국 동북지방을 돌다가 마침 도문에 왔을 때 조선족이 경영하는 작은 여관에

들렀다가 왜경에게 희생된 어떤 여인의 울음 소리를 밤중에 듣고 작곡가 이시우가

즉흥가사에 곡을 붙였던 것으로,

나중에 김정구가 그를 박시춘에게 소개하고 트롬본 주자인 김용호가 또 1절을

다듬고 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게 되었다고 한다.

발로 뛰는 연변 작가 유연산의 고증이었다.

작가와 나의 교유록은 나중으로 미룬다.

 


 

우리는 도문 시의 발전에 달리 기여하지는 않고 사진 몇 장을 수확한 다음

일로 “사이 섬”(間島)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