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사이섬의 부서진 돌 비(碑石)

원평재 2005. 5. 15. 18:21
 

사이섬의 “부서진 돌 비(碑石)

 


 


도문에서부터 “사이 섬”을 향하여 달리는 길은 양 쪽 옆에 우리 핏줄의 집들이

옹기종기  계속 되어서 마음이 푸근하였다.

운전대를 잡은 역사학자의 설명이 아니어도 집의 모양에 “망건”과 같은 것이

양쪽 대들보 쪽에 설치 되어있어서 이제는 풍월을 읊게 된 내 눈에 조선족들의

집들로 선명히 들어왔다.

 

들은 말로는 거의 90퍼센트가 우리 핏줄이라고 한다.

가끔 농촌 주택을 한 곳으로 모아서 개량 형으로 다시 짓고 있는 풍경도

가담가담 보였으나 축복의 마음이었다.

내 한 몸 감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옛 모습이 만고강산이어야 한다는 바람은

무슨 이기심인가---.

 

왼쪽으로는 민망한 민둥산을 끼고 국경을 달리기 두어 시간 경---,

사실은 도로 사정이 아주 최근에 시멘트포장이 되어서 예상 시간보다 두어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우리는 왼쪽으로 급히 꺾어서 섬도 아니고 밋밋하게 연륙이 된 모래톱 속으로

들어섰다.

 



이 곳도 출입이 아주 마음데로는 아닌가 본데, 다만 막는 사람도 없고하여

우리는 마음을 “견결”하게 다잡고 지금은 빈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섰다.

 


 

간도(間島), 혹은 “사이 섬”이라고 하는 이 지명은 모두에게 다 잘 알려져 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북경으로 자기종족들을 몰고 들어가면서 그들이 살던

동북쪽으로는 봉금령을 내려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 두었는데,

5년간이나 조선 땅에 흉년이 계속되던 때에 우리 북쪽 동포들이 이러나저러나

목숨을 걸고 소위 월강을 하여 농사를 짓고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마침내 우리 동포들은 강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이 섬으로 간다고 하고는 더 안쪽으로 진출을 하였으니 그게 바로 더 북쪽

북간도, “용정”의 시초였다.

 


 


 

간도 명칭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더 있어서 추가해 보지만 현실에서의 아픔과

아쉬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 유래의 하나로는 종성이나 무산의 우리 동포들이 몰래 두만강

북안(北岸)에다 사사로이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으니

이런 땅을 간토(墾土)-개간한 땅) 혹은 간도(墾島)라고 불렀는데 이 후에

간도(墾島)가 사이섬(간도(間島)으로 변형되어 불리게 되였다는 것이다.

이 “사이 섬”은 처음 두만강 상의 섬이었으나 하늘도 무심한지 홍수 때

중국 땅으로 붙어버려서 우리 손을 떠나갔다고 한다.

 

“사이 섬”에 들어가 보니 이상한 느낌이랄까,

아니 사실은 진정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낙동강변의 내 고향 땅에 타임머신을 타고 달려온 기분이었다.

 


 

지금 이 "사이 섬"에는  아무도 들어와 살지 않고 농사짓는 흔적도 없이

국경의 무인지대가 다시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낙동강변의 홍수 지대가 그 옛날 버려져 있던 모습 그대로

내 뇌리에서 출발하여 내 오관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봉오동에서, 그리고 도문에서 비틀린 내 심사는 이 강 옆 버려진 자연 속에서

조금씩 생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단편, “두개의 큰 심장을 가진 강”에서 황폐한 심성이

되어 고향, 북 미시간의 호수와 강이 어우러진 자연 속으로 흘러들어온

젊은이, 닉의 심사를 그리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은 닉이 처음 본 그 강가는 불에 탄 흔적이나

떠내려 온 나무 조각들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야영을 하며 낚시를 하며 그는 차츰 그 큰 자연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나도 마침내 조금은 치유의 맛을 보고 있는데 역사학자의 부르는 소리가

있어서 가보니 웬 부서진 돌무더기가 있는 게 아닌가.

 


 

오래전부터(나중에 사실은 2002년에 새겨 넣은 걸로 판명 되지만), 큰 돌에

우리말로 “사이 섬”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표석이 있었는데 이것이 얼마 전에

산산이 마사지고 “박산”이 난 현장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었다.

놀란 가슴으로 돌무더기를 살피니 “사이 섬”이라는 한글 문구에서 “이”자만

아직도 살아남아있고 나머지 글자는 완전히 뭉개어져 “박산이 나고” 없었다.

 

넓은 벌에도 옹졸함은 상기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또 “행정”이라고 하는, 인간이 만든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나는 이 곳에서 이름난 두 사람의 작가와 담론해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안타깝지만 행정적인 처리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게 기회가 있으면 나는 그걸 되세우는 것이 모두에게 보탬이 되리라고

말하려고 한다.

단순히 관광 차원으로 생각하자.

러면 초대형 다원주의 국가에는 여유가 보이고 현실적인 소득도 있고,

한 많은 한 민족에게는 한 풀이가 되리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강 건너로는 "참--" 싶게 구호가 산 중턱에서 길고도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는 “윤동주”가 있는 용정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점심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