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발해진에서---

원평재 2005. 7. 10. 02:03


 

 

동경성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리는 바로 그 종착역 바로 직전 마을인 발해진에서

내렸다.

원래 발해진과 동경성은 지금도 그렇지만 하나로 연결 되어있는 큰 도시였는데

두개의 시가지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그 연고는 모르겠으나 오늘날은 철도의 역 이름도 "동경성"이고 모든 활동의 중심은

바로 이 동경성으로 옮겨져 있고 "발해진" 쪽은 다소 초라하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발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우리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현지였으나 우선

우리의 발길은 흥륭사로 향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택시는커녕 도무지 삼륜차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림 선생이 겨우 한대를 찾아왔는데 그나마 규모가 작아서 나와 박기자만 타고 그 분은

잰 걸음으로 뒤 쫓아왔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흥륭사입니다.)

 

 


 

 

그 곳 사람들과 림 선생은 모두 막역하여서 흥륭사 박물관 관장이 직접 설명해

주었는데 역사적 내용이야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보통 박물관의 맨 앞에 세워져서 그 박물관 존재의 매니페스토 역할을 하는 설명문에는

집안의 고구려 박물관에서처럼 발해에 관하여서도 “우리 말갈족이 세운 이 지역 지방

정권”이라고 했더군요.

 


 

 

발해 유물이 비교적 적었다가 최근에 풍성해진 것은 1995년 발해진의 송어 양식장

근방에서 엄청난 발해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아직도 전모는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절 안에 세워진 석등은 현무암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암 특유의 돌이 주는

어떤 넉넉함과 대범한 거대함, 구비친 조각의 예술성, 등등이 얽혀서 만감을 던져

주었다.

 


 

 

절 뒤편의 천년도 넘은 엄나무 같은 거대한 침엽수에는 소원을 비는 글 쪽지들이 달려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풍습과의 연계에 억측하여 또 다른 주장을 하겠구나,

싶기도 하였다.

아니 억측만이 아니엇다.

그들은 발해 건설의 주역들이 "걸걸중상"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두 넉자로 된 이름이라는

데에 착안하여서도 묘한 주장을 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조왕인 대조영은 엄연히 우리나라에 그 연면한 DNA의 민족적 끈을 이어와서

오늘날 “태”씨 성 가진 분들이 바로 그 분의 후예가 아니던가!

 


                       (관리인인 듯 한 만족 할머니가 친절하였다.)

 

 

비단, 가수 태 아무개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최고 각료진에서 일한 분들의 이름도 기억이

난다.

박물관 가까이에 있는 발해 궁터는 그 규모가 세계적임에 도무지 손색이 없었다.

그동안 나도 역사 기행, 역사 관광께나 다녔다고 생각하는데 그 어디메 석조 건축

물에도 못지않은 규모에 나는 큰 기침과 함께 어깨를 활짝 펴 보았다.

 


           (지방 보물 사적지답게 크게 내 건 지도가 매우 부정확하였다.) 

 

 

내부에는 네 겹인가 다섯 겹인가 하는 성곽이 네모 반듯하게 구축되어 왕성의 역할을

성곽 사이에서 각각 달리하고 있었는데, 흥륭기에는 적어도 몇 십만의 인구가 상주하는

터전임을 쉽게 알 수있었다.

 


 

 

성터의 안쪽에서는 지금도 유물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림 선생이라도 그 이상의 접근은 불가하였고 우리는 그 나마 성터의 사이를 거닐며

숱한 발해의 기왓장과 토기 파편들을 발로 걷어차다가 나왔다.

 


 

 


 

 

성 바깥에도 여러 사적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우리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우물

터였다.

그 곳은 림 선생이 어렵게 소학교를 다닐 때 점심을 싸갖고 갈 형편이 못되어서 점심

때가 되면 그 우물 쪽으로 가서 어른들이 옛날 전설이나 구전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었다는---,

어제 밤에 술잔을 들며 들었던 그 샘터가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유기체 각각의 입장으로 치면 이 샘터의 의미는 나에게 어쩌면 발해의 성곽

전체의 의미에 못지않을 수도 있었다.

거대 개체의 유기적 시스템을 유지하자면 미토콘드리아라던가, 마이토 톤드리아라고

하는 독립적 소 유기체가 있어서 큰 개체의 유기적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보완의

역할을 한다던가---,

성문 앞 우물가의 이 깊고 긴 설화 속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을 서로 느끼며 그 무형적 감상을 칩 속에 내장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쳐 있었다.

우리는 마치 감독처럼 옆에 서있는 중국인 서기를 채근하여 타고온 고물차로 동경성

쪽으로 달려가서 크게 보이는 랭면 집으로 들어갔다.

이 쪽은 림 선생도 최근에는 발길이 뜸한 지역이었다.

날씨 탓인가, 발해 탓인가, 우리는 랭면이 먹고싶어서 함께 랭면집을 찾았다.

 


 

 

버스 정류장 인근에 매우 큰 랭면집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과연 손님도 많고 내부도

깨끗한 집이었다.

우리가 무턱대고 주인 아주머니를 찾으니 곱상하면서도 기품이 보이는 중년 여인이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미인도의 모델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조선족이냐고 물으니 곱게 웃으며,

 “그렇긴 하지만 한족 학교를 다녀서 조선말을 잘 못해 부끄럽고 죄송합네다---.”

라고 참으로 고운 답변을 하였다.

사실은 조선말이 서툴지도 않았다.

우리는 고구려 벽화의 여인을 만장일치로 사면조치하고 황금의 액자를 짜서 각자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박 기자가 맛이 좋다고 하면서 복무원에게 돈을 더 줄터이니 한 그릇 더 달라고

조선말로 추가 주문을 하였다.

조선 말이 잘 통하지 않았는지 복무원은 두 그릇이나 더 갖고 와서 나도 덕분에

풍성하게 먹으며 몇 그릇 값을 내야할까 “엄중한” 고민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포식을 하고 나오며 값을 물으니 주인께서 돈을 받지 말라고 하였단다.

아름다운 주인이 어디 계시냐고 찾으니 임업국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벌써 나가셨다고

한다.

계산대 뒤쪽 벽에는 고구려 벽화의 여인이 기품있게 웃으며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한번 더 옥호를 찍어보니 왼쪽 그림이 주인 아주머니를 닮았다.)

 

버스 정류장은 햇볕 가릴 데 없이 조금 붐볐다.

이 곳 날씨가 그늘에서 견디기에는 아주 좋았으나 직사 햇볕은 공해가 없어서인지

따가웠다. 

갑자기 때도 없이 정류장 옆에 멋진 현대 자동차 제조의 버스가 멎고 조선말이 몇마디

오고가더니 일가족 세명이 그걸 탔다.

우리도 자석에 이끌리듯 영문 모르고 그 차에 오르니 차는 냅다 달렸고 우리는

일인당 10원꼴로 목단강 버스를 타게 되었다.

 

목단강에서 동경성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가는 버스를 용케 탄 셈이었다.

두 시간 예상의 여정이 한시간 반으로 단축되면서 편한 여행이 다시 계속되기

시작하였다.

 


                                     (상경 용천부, 기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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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강에서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룹니다.

백두산 천지 폭포에 손 담근 사진, 천지를 내려다 본 사진, 남이 가기 힘든

조중 국경의 군사도로 달린 사진, 만주족의 발원지 천녀의 목욕 호수, 두만강의 실제적

발원지인 샘물 터, 김일성 낚시터, 철광으로 유명한 무산 시가지 사진---,

한정 없고 한량없는 자료를 담은 디카의 칩이 날라간 경악과 실의를 글을 쓰면서

다소나마 체관할 수 있게 되어서 위안이 됩니다.

 

겨우 나오는 KBS Korea 방송에서 베토벤의 “황제”가 아름답고도 우울하게 가슴을

적십니다.

청년 시절, 지방 도시의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에서 이 “황제”를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화려함 속에 페이소스가 깃든 이 피아노 협주곡, 특히 스타카토의 제2주제는 언제나

마음 상할 때마다 내 곁에 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