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경박호에서

원평재 2005. 7. 9. 06:40

 

경박호의 전력빈관에서 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쏟아진 비가 계속 되고 있었다.

림승환 선생은 하늘을 살피면서 곧 날이 들것이라고 예보하였는데 당장은 아니어도

대충은 맞아 들어가서 장대비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경박호 발전소 수문)

 

고뇌 속에 생애를 보내고 있는 림 선생의 공인으로서의 자세는 절제 속에서 완벽했으나

여유를 잃지않고 유머 감각도 탁월하였다.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이 겸손한 지식인의 본심 속에서 함께 오열도하고 체관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밤은 참으로 위대하였고 아침 식사도 또한 성대하였다.

전날 저녁상에는 없었던 김치도 나오고 특히 만주식 두부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손 두부”의 형태로 큼직큼직하게 나와서 이만 저만 맛있지 않았다.

만두도 여러 종류 나왔고 산나물도 독특했다.

 


 

아침을 먹고 빠른 모터보트로 우리는 경박호를 가르며 달렸는데 근대 중국의 위대한

건설자들이 묶고 갔던 유서깊은 방갈로와 종교 색채가 농후한 건물들이 호반의 곳곳에

서 있었다.

 


           (핫 이슈가 있었던 어떤 종교의 발상지라고 하던가---)

 

경박호가 아무리 중국 동북의 빼어난 경승지라할지라도 아직은 이 큰 나라에서 전국적

수준으로 평가되는 상태는 아닌듯한데도 전체적인 규모와 관리 상태에서 현대 중국의

질주하는 발전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중국의 호반은 비 오는 날의 모습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안개가 끼었을 때, 그리고

최하가  햇볕 나는 날이라고 한다.

비와 안개가 번갈아 드나드는 호반을 우리는 고속 보트로 달리며 어제의 먼지를

털어내었다.

 


 

대부분의 중국 여행객들은 단체로 와서 숙박 시설이 몰려있는 곳에서 자고 단체로

유람선을 타고 즐겼다.

단체 시설이 있는 곳에는 조선족들이 숙박시설을 일찍이 개발하여서 비즈니스가

쏠쏠하고 또 민속촌도 따로 큰 규모로 만들어서 재미를 본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었다.

하루 숙박비는 60원인데 공동 목욕, 공동 화장실 등이 좀 마음에 걸려서 우리를 차마

그리로 안내하지는 않았다는 림 선생의 설명에 내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동의

하였다.

 


 

투어 트레일러 제도가 잘 되어있어서 우리는 우중 이동의 맛과 멋을 만끽하며 경박폭포

쪽으로 옮겨갔는데,

아~~ 그러나 경박 폭포는 우리를 최상으로 맞아주지는 않았다.

하루 저녁의 폭우로는 도통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물은 항상 전력 발전소로 보내어지고 폭포에는 남는 물만 여분으로 보낸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빗속에서 물이 없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은 많이 찍었다.

 


포토 플레이스가 있어서 들어가보니 아름다운 붉은 꽃이 인상적이었다.

모란꽃인가 아닌가로 고심하다가 다시 보니 조화(造花)였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소나무와 같았다. 중국의 인조 가공의 문화는 또 알아주어야하는

것이다.

하긴 인류사라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박호에 빠뜨려진 거울이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폭포 위에서는 전문 번지 점프 도사가 있어서 포토 플레이스에서 점프 모습을 사진

찍거나, 미리 찍어놓은 사진을 살 수도 있다고 하여서 우리는 얼른 그 곳을 떠났거니와,

거울이 폭포 밑의 작은 호수에 있었다면 이미 그의 차지가 되었으리라.

 


                         (조선식 표준 구둘장 민박 집)

 


우리는 동문이라던가, 서문이라던가, 조선 족 민속촌의 광고가 요란한 곳을 지나서

동경성 가는 곳의 시골 버스를 탔다.

 


     (새로 짓는 경박호 입구---, 완성된 모습을 넣으러 오겠지.)

 

이 곳은 곳곳에 조선족 마을이 있고 논농사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어서 예전 내

고향 마을을 빼닮았다.

림 선생의 고향도 바로 그런 곳에 있어서 지금 지명은 발해진이었고 노모님이 아직

기거하고 계시다고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