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골 버스에서 내려버린 것이 고생의 발단이었다.)
조금 있으려니 시골 버스가 터덜거리며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나타나서 이제부터의
또 다른 불편한 여행길을 예고하였다.
각오의 순간이었달까---,
박 기자는 인근에서 배회하는 삼륜차를 섭외하였다.
우리가 끌고 가는 게 편할 듯싶은 이 처량하게도 힘없어 보이는 맥 빠진 동력차에서
나온 순박한 표정의 사기(기사를 이렇게 부른다고 소개한 바 있거니와)는 다만 40원을
요구하여서, 우리는 짐 세 덩어리를 이 이상한 구조물의 이 구석 저 구석에 구겨 싣고
좌정하였다.
노새 보다 더 불쌍하게 보이는 이 동력차는 힘없는 발걸음을 내 디뎠는데, 이 와중에
그 동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듯 경박호로 가는 길목을 모두 돌이나 나무로 막아놓고
출입을 통제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길바닥에 나와 있는 것이,
연길에서 온 우리를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는 종내 아니었고 길과 관련한 무슨 데모
비슷한 의사전달 의식 같았다.
(동네 길을 이렇게 모두 막아놓고 사람들은 오른쪽 어느 골목에 모여있었다.)
하여간 이날의 일진이나 “워더 쩨마(我的 主題)”는 꼼작 없이 “길”이었다.
힘은 없으나 체구가 작은 잇점으로 그 마법이 걸린 작은 마을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동력 삼륜차는 한 2 킬로미터나 전진했을까, 마법의 자장(磁場)을 끝내 벗어내지
못하고 붙들려 주저앉고 말았다.
(도로 공사장에서 차가 멎었다. 사기가 차를 움직여 보고 있다.)
(차를 옆으로 끌고 가더니 슬그머니 사라졌다. 저 멀리 아래로 보이는 마법성을 향하여.)
다행인 것은 그 삼륜차의 사기(기사)가 그 곳까지의 운임은 요구하지 않고 그냥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거기까지 간 것이 홀린 상태 같기만 하였다.
들판은 넓었고 길은 곧았고 떠나온 마법성은 멀리 한여름 낮의 안개 속에서 일렁거렸다.
(외로운 짐 둘---, 주인들은 더 외로웠다.)
적막한 길의 양쪽은 확장을 위하여 파헤쳐져 있을 따름이었고 비온 뒤끝이라 그런가,
인적은 묘연하였다.
한 참을 주위나 살피며 하릴없이 그러고 있는데, 반대방향으로 경운기가 덜컹거리며
나타났으나 쟁기와 보삽을 잔뜩 싣고 있어서 엉치를 들이밀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또 반식경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소형 승용차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멀리 앞쪽에는 공사 차량이 있고 박 기자가 또 한어를 구사하여 차를 세웠다.
정황에 꼭 맞는 사진이 있으나 이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차 속에는 한 가족인 듯 사기(기사) 빼고도 어린 아이 하나에 여고생 하나, 중년의 여인
둘, 합이 다섯이었다.
우리는 체면 불구, 차를 세우고 도움을 청하였다.
정원 초과를 우려했으나 그건 기우였고 문제는 “돈 문제”였다.
어찌어찌하여 20원을 주기로 하고 그 비좁은 차를 우리는 기적처럼 얻어 탈 수 있었다.
박 기자가 만든 기적이었음은 물론이었다.
알고 보니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여인은 중년 여인이 안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로
스물여덟이었고 두 중년 여인은 사돈간이었다.
운전석의 운전수는 사기였고 차는 대절이었다.
그럼 그렇지,
도움을 주는 일가족이 돈을 요구했을까---.
우리가 타서 정원이 일곱이 된 옹색한 승용차는 이내 한숨을 쉬는 건지 헐떡거리는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길도 문제였다.
아스팔트를 걷어낸 황토 길에 폭우가 왔으니 요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몇 발짝 차가 전진하며 요철을 만나면 짐은 실어둔 채 내려서
걷다가 마침내 짐도 다시 꺼내서 짋어지고 걸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 되어서 마침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오고 마침 작업차량에
타 있던 인부가 대책 없으니 돌아가라고 한다.
차는 뒷걸음으로 언덕길을 한참이나 되 내려와서 옆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 곳은 농가가 몇 채 있는 곳인데 큰길에서 걷어낸 아스팔트 슬러지를 퍼갖고 와서
시골 길 현대화의 차원에서 잔뜩 늘어놓은 상태였다.
시골 길이야 찌꺼기 아스팔트로 신기원을 마련하는 순간이었지만 아직 평평히
다져질려면 한참 세월이 필요할 단계였다. 결국 낡은 승용차가 지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 성립되어있었다.
우리가 내리자 이제 눈치를 보던 나들이 가족도 모두 내리고 짐도 하나 빼어서 끌며
고통스러워하는 승용차를 뒤에서 따르게 되었다.
포플러가 양쪽으로 늘어선 시골길이 내가 어릴 때 맨발로 걷던 낙동강 변을 연상
시켰다.
흑룡강성이 덥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날씨마저 여름의 본색이었다면 정말 난감
했으리라.
아스팔트 슬러지 지역을 가까스로 빠져나와서 다시 승용차에 여섯 명이 타고 보니
약마과적(弱馬過積)이라, 차가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물이 괸 자리에서 움쩍도
않는다.
여인들은 내려서 다시 걷고 나와 박 기자는 차를 밀었더니 흙탕물을 일으키며 빈사의
실린더가 박동을 한다.
다시 매정한 승객들이 꿈틀거리는 낡은 차에 자리를 잡고 나니 이제는 모터도 화가
나는 듯 완전히 호흡을 멈추어 버렸다.
속수무책이 이런 경우인가---?
이제는 심산의 중턱에서 얼이 빠지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시골 버스가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보내며 허위단심 달려오고 있었다.
차가 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에 고장난 택시 운전사기는 빨리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여자 승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가 자기들 돈까지 감당하라고 한다.
도무지 무슨 논리인지 기가 막혔으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우리 때문에
차가 고장 났으니 책임지라는 뜻이었나?
온 난리를 다 피웠으나 박 기자는 묵살하고 10원으로 당당하게 낙착을 보았다.
이제 구간을 다니는 버스를 타고나니 모험의 마지막 여정인가 하였는데, 한 쪽을
파헤친 외길에서 우리 버스와 반대편에서 온 버스가 얼굴을 맞대고 서로 양보를
하라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참의 실랭이 끝에 우리가 탄 버스가 뒤 물림을 하며 양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게 또 한 십 여분을 잡아먹었다.
에필로그가 있다. 전력빈관은 물론이고 경박호 유원지로 들어가려면 문표(입장료)
50원씩을 내야하는데 버스에 동승한 중국인이 자기를 태워주면 예약 손님에 대한
호텔 버스 서비스를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공생의 인연이 성립되면서 100원을 아낀듯 했으나 다음날 나올 때에는 모두 지불
해다.
말썽을 피하기 위히서였다.
전력빈관은 제대로 지은 휴양지였다. 그곳에 호텔 차가 도착하니 림승환 작가가
로비에서 뛰어나왔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50이 넘은 분의 나이에도 청청하게 보였고 무엇보다 인품이
돋보였다.
점심은 따져보니 우리 셋 모두가 굶은 상태였다.
이 분도 고초 끝에 조금 전에 도착한 형편이었다.
이 분은 경박호 인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보냈고 부친을 따라서
상경 용천부로 이사를 간 후에도 나이 열아홉에 이 곳으로 와서 또 일년간 산에서
일을 했다고 말하니, 상세한건 몰라도 아마도 문화혁명 때에 하방이나 집체호 노역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워낙 험한 근세사를 살아온 분이라서 문인으로서의 호방함 가운데에서도 순식간에
절제가 보여서 이방인에게는 페이소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오밤중이 되어서야 매일 술을 한 병씩 혼자 비운다는 술회가 모든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좋고 감각이 너무 예민하여도 세상 살아가는 데에는 탈인지 모른다.
최근 작품으로 "동명성왕" 상하권을 목단강 시의 자신의 집에 가면 주겠다고 약속을
하여서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저녁은 이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준비를 시켜놓았다.
인상적인 것은 경박호에서 잡았다는 잉어나 가물치 비슷한 모양의 “펑어”(?)(빵빵한
고기)였는데 크기가 한정 없어서 끔찍했지만 밥을 먹고 남아서 룸으로 가져온
“물고기 대가리“는 무한정 살코기를 우리 젓가락에 내어주어 자정까지 마신
바이주(백주)의 안주가 되고도 남았다.
나는 전날 돈화에서의 과음이 부담이 되어서 맥주 몇 잔만 찔끔거리고 대작을
박 기자에게 맡기니 두 분 모두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자정이 되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또 폭우가 휘몰아쳐서 우리는 잠자리를 폈다.
여기도 영안(寧安)시에 속하는데 가까운 곳에서는 소위 “영안 폭우 사태”로
학생 105명이 한 달 전쯤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사고가 난 곳은 림승환 선생도 잘 아는 고향 땅이었다.
조선족 학생도 그 중에 두 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비통한 가슴에 족속이 무슨 차이랴만---.
오늘 하루는 희비극적인 요소가 실타래처럼 풀리고 엮이면서 발해사의 한 단면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내색하지 않고 빗소리 속에 잠을 청하였다.
경박호에 발해 최후의 왕, 애왕과 황후가 도망을 가다가 보물과 거울을 품고 빠져
죽었다는 전설은 류연산 작가의 “혈연의 강들”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림 선생은 발해의 못생긴 어느 황후가 만지기만 하면 미녀가 되는 거울이 이 곳 경박호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빼앗으려하자 주인이 이 호수에 거울을 빠뜨려 버렸다는
또 다른 버전을 소개해 준다.
스토리보다도 모두 "발해"를 배경으로 했다는 역사성이 소중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내일은 발해진으로 가서 흥륭사를 보고 발해성곽과 동경성, 그리고 목단강으로 출발할
차례이구나---.
(며칠 전에 쓴 이야기라서 시차가 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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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연길 시내에서 개최된 국제 학회 디너에 많은 발표자들과 제가 있는 곳의 CEO와
또 다른 곳의 친구 와 그 연구원들---,
복잡한 인연들의 여러분들과 연회를 끝내고 내일의 좌장 진행, 백두산 출발 준비
등의 난리 통에 이 글올 올립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된 묵은 여행기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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