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가정이 뉴저지의 패러머스라는 동네에 사는 동기의 집에서 모였다..
집 주인과 나, 필라델피아에 사는 동기와 향우, 그리고 내과 의사를 하는
롱아일랜드의 동기, 만년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한
친구,
이렇게 여섯 집이 모이는 저녁 잔치의 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장소를 설명하자면 미국생활 20여년에 "주얼리 샵"으로 성공한 동기가
사는 뉴저지 패러머스의 저택이었다.
전에도 모임이 있을 때면 에이커 가든이 딸린 이 동기의 넓은 집은 자주
잔치 마당이 되었다고 한다.
집이 넓어서만이 아니라 이런 자리 마련하는건 아무래도 마음이 넓어야
베풀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나타난게 원인이 되었건 아니건, 한 해를 보내는 의미로운 시점에서
우리의 모임은 이렇게 시의적절하게 장만되었다.
유태인들은 디아스포라 이래로 세상 만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대략
장사를 할 때에는 야채와 과일을 다루거나 보석상 같은 것을 꾸려왔다고 한다.
세상의 핍박을 많이 받은 그들은 급히 쫓겨가야할 때가 오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 하직할 때에는 미련없이 버리거나,
옯기기 쉬운 물품을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예컨데 카핏을 취급하는 경우에도 대형 깔게가 아니라 무릅 덮게 처럼
간단한 쪽을 택하였다고 한다.
세상이 발전하여서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형적 상품, 금융
부분을 쥘락펼락하는 입장에 그들이 일찍 도달한 것도 이런 원리와
무관치 않은가 싶다.
한인들이 이들의 뒤를 철저히, 열심히 좇아가는 현상은 어디에 기인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와서 보니 내 친구들도 대체로 이런 추세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탁업처럼 재고가 남거나 썩는 물건이 아닌 업종을 취급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되고 전문직으로는 의사나 간호사나 연주가, 그리고
금융업에 2세들을 진출시키는 교포들의 의지와 열망은 유태인들이
걸어온 발전사와 유사하다.
그뿐아니라 성공한 한인들의 주거지도 한 때 유태인들이 모여살던
대도시 근교의 아름다운 지역으로 야금야금 들어가고 있다.
오늘 만남이 이루어진 곳도 그런 부유한 동네였으니 주얼리 샵을하는
내 동기도 분명 성공 궤적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드라이빙 샷 연습도 가능한 에이커 가든, 눈이 와서 내기를 못하게
되어서 나같은 아마추어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오디오 시설과 자료가 전문가의 경지---. 주인장은 만도린과 기타와 피아노,
특히 드럼의 고수---.)
뉴저지의 쾌적한 교외지대에 있는 내 친구의 집은 그간 미국에 온
여러 동기들이 다녀가면서 이런저런 경로로 찬사를 보냈듯이 "에이커
가든"에 골프 드라이브 샷과 피칭 시합장까지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 보다는 나그네를 받아들이는 이 댁 부부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넉넉한
성품이 진정한 찬사의 대상이었다.
이 동기를 내가 얼마만에 만나는가?
적어도 사반세기는 훌쩍지나간 세월같았다.
골프는 물론이려니와 오디오 시스템 꾸미기와 음악 감상, 바둑과
사진기술, 등의 재주에 더하여 서가의 책들도 이 친구의 넓은 독서량을
가름해주고 있었다.
그의 독후감은 명료하였으나 사실과 감정과 주장을 나누어 놓는
지혜로 인하여 쓸데없는 긴장이나 논쟁을 피해가게 하였다.
응접실에 미리 와 있는 신학을 한 내 친구는 또 얼마만의 해후던가.
이 친구 역시 31년만에 만나보는 친구인데 우리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와 함께 소설을 쓴답시고 글쟁이 친구로 어지간히
흉금을 텄던 친구인데 아직도 매사 그냥 보내지 못하고 관조와 사색으로
걸러내는 습관은 여전한듯, 대화 속의 긴장된 부분들이 내 옛 친구임을
실감케 하였다.
조금 있으려니 롱 아일랜드에서 심장 내과 전문의인 동기가 또 들이
닥쳤다.
역시 두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온 것이었다.
서구적 마스크를 했던 미소년의 동안(童顔)이 약간의 주름살과 귀밑의
은발을 뒤로하고 아직도 그대로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그도 내 모습이 하나도 변치않았다고 하여서 나는 이 저명한 의사의
예리한 관찰력과 진찰을 그대로 믿기로 하였다.
저녁 식사는 필라델피아에서 온 향우의 부인께서 장만한 핫 팟,
그러니까 맛있는 쇠고기 샤부샤부 요리였는데,
이에 더하여 우리가 모인 이 댁의 안주인이 만드신 웰빙 반찬과 일곱가지
약재가 들어간 흑미밥은 수술 회복기의 나에게는 보약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지난 시절을 조금씩 반추하였다.
프린스턴에서 신학박사를 해낸 친구는 서울 공대 전기과를 나온 후,
미국으로 와서 브룩클린에 있는 폴리테크닉 대학을 다시 수학한 다음
IBM에 15년간이나 있었으나 마침내 특이한 영적 세계로 들어간 특이한
캐리어를 갖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는 독일을 다녀왔는데 아들과의 해후를 겸한 소중한 만남의
여행이었다.
아들은 장래의 목표에 대하여 약간의 관점의 차이가 생긴 후에
대학에서 ROTC를 택했고 현재 미군 장교로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백인인 자부와의 사이에는 네살, 세살의 손자와 금년에 본 쌍둥이
손녀까지 있어서 그는 갑자기 대가족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갑작스런 큰 축복의 은사를 금년 여름에 한아름 받은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롱아일랜드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의사 친구는 큐트한 부인께서 클리닉
사무실 관리를 모두 잘 맡아하고 있었다.
자녀로는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커티스 음대 등에서 수학하였고
며느리와 사위도 모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연주가들이었다.
내년 여름, 6월30일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아들 "김규영"과 자부
"신 빛나리"가 KBS와 협연으로 브람스의 더블 콘첼토를 연주하기로
일정이 잡혔다고 한다.
우리는 그가 살고있는 롱아일랜드를 배경으로한 스코트 핏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게츠비"를 이야기하였고 또 그 작가가 살며 집필을 하였던
유명한 거처의 모양에 대하여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소설 속에 나오는 "그린 라이트"의 위치에 대하여서도 해박한
지리상의 지적을 해 주어서 대화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세상이 좁아서 그런가, 그의 조카 며느리는 내가 있는 기관의 젊은
동료 학자였다.
내가 보직을 맡았을 때에 들어온 재원으로서 그 부군되는 사람이 의사
라는 사실을 내가 기억해 내었고 내 동기와 부인은 확인해 주었다.
그 의사는 코넬 의대에서 수련을 한 사람이었다.
주인장 댁에는 딸만 둘이있는데 모두 명문 대학을 나와서, 맏딸은
결혼을 하여 이 달에 출산을 하며,
아직 미혼의 둘째는 저 유명한 "맥킨지 컨설팅" 회사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내 향우는 역시 은퇴 이민을 한 경우인데 형제, 자매와
자녀까지 일찍 미국 이민을 온 가족적 상황과 조건이 있었다.
이민 3년차를 바라보면서 일찍이 새로 찾은 일자리를 즐겁게 해내는
분이었다.
이민 생활에 불만이 있을리 없었다.
또 한 친구는 내가 지난번에 가서 2박3일을 쉬게해 준, 전훤 생활을
가꾸는 동기라서 다시 여기에 소개하기가 어색하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주인장이 심혈을 기우려 설치해둔 오디오와
비디오 시스템 앞에 앉았다.
지금 이름은 잊었지만 사운드 시스템만해도 영국에서 나온 수제품으로
이제는 절품된 명품의 족보에 올라있는 것이었다.
내 견문도 이 부분에 조금 있는데 얕은 내 수준이 따라가기에는 어려운
경지였다.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오디오, 비디오, VCD등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조작하는 그의 달인의 솜씨였다.
그는 믹싱 시설까지 전문으로 만들어 그 운용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국내외의 이름난 프로그램들을 재생, 복제해서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게 린다 에더의 "O Holy Night"을
감동적으로 감상하였다.
이어서 앤드류 류의 "Amazing Grace"도 시의적절한 선곡이었고,
그 다음에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 1번 2악장과 3악장을
들었는데,
폰 카라얀이 생전에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신과 협연을 한 DVD였다.
1980년 연주였으니 젊은 키신의 동작이 휘황찬란하였다.
특히 3악장에서 키신이 테마부분을 강열한 힘으로 독주할때 나이 지긋한
퍼스트 바이얼리니스트가 조심스레 연주를 관찰하다가 이 청년이 불붙은
힘으로 그 부분을 완주해내자 이제 안심하고 활을 휘두르는 장면은
참으로 가슴이 찡하도록 드라마틱하였다.
우리는 지젤의 "세난도", 바브라 스트레이전드의 "마이 웨이",
장님 테너 보첼리와 사라브라이트만의 듀엣을 보고듣었는데, 집 주인은
마침내 마지막 선곡으로 페티김과 그녀의 딸 카멜라의 듀엣을
골라내었다.
제목은---,
제목은 어쩔수 없는 종착역, "향수"였다.
오늘날 이 신대륙울 이방으로 여기며 예전처럼 노스탤지어에 걸릴
동포들은 별로 없으리라.
세상이 좁아졌고 인터넷은 둥근 지구를 평평하게 단일 지평으로
만들었으며, 또 수많은 한인 이민들이 집거하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 마지막으로 선곡한 "향수"는 단순히 고향 그리워하기가
아니라 고향 떠난 사람들의 미학적 카타르시스에 다름 아닐 것이었다.
어쨌거나 간접 카타르시스의 시간이 끝나자 우리는 직접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마이크를 움켜잡았다.
까다롭던 선곡자이자 예리한 디스크 자키였던 주인장은 일순간,
노래방 아저씨로 변모, 변화하였다.
복잡한 시설을 또 이리저리 조정하여서 장내는 순간 노래방이 되고야
말았다.
휘황찬란한 조명과 일루미네이터 시설이 순식간에 도입된 노래방에는
주인장이 마련한 1등 상품, 보석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애석상으로 여러가지 음악들을 믹싱한 테이프도 믾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가요에 출중한 민족으로
변하였던가.
보석 반지는 내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나도 마이크를 부여잡고 아직
회복이 덜된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 열창 했으나,
수준 높은 구성원들 때문에 예선에서 이미 탈락을 하고 말았다.
그랑프리는 필라에서 맛있는 샤브샤브를 준비해온 향우의 부인께 돌아갔다.
가창력이 이미 예사롭지 않았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인이 직접 믹싱한 카 스테레오 테이프와
또 컴퓨터를 이용하여 역시 직접 만들었다는 내년도 캘린더를 받았다.
휘날레의 시간도 주인장은 역시 원모심려로 장만해 두었다.
우리는 2005년도 KBS 선정의 국민 가수 10인의 영상 가요를 주인장이
편집한 자료로 보았는데,
자료를 통하여 최희준과 배호에 대하여 심도있게 연구, 검초를를 하고
토론하였다.
특히 배호를 추모하면서 우리의 세미나는 깊고 진지하게 진전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시간
여행의 정서에 몰두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독서대에 꽃힌 주인장의 방대한 최근 독서
리스트를 주제로 채택하였는데 그의 명쾌한 독후감은 오묘하였다.
아울러 진보적 사상에 대한 일가견도 가족사와 연관되는 경지가 있는듯
변죽을 울리면서도 일정한 경계를 긋고 지나가서 여운을 남기는
대화론에 충실하였다.
새벽 세시를 넘기자 일행은 아쉬운 감상 속에서 긴 재회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회복기의 환자라고 하여서 안방을 내준 주인장의 마음은 지금도
뒤돌아 보인다.
새벽에 눈을 뜬 나는 눈 덮힌 에이커 가든에서 이 집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고 들어왔다.
아침 식탁은 특별히 이 댁의 안주인께서 웰빙 식단으로 만든 특이
하면서도 맛있는 메뉴로 가득하였다.
더우기 밤새 쑤어서 나온 팥죽과 흑미 7곡밥은 다시 감탄의 표적이었다.
마침내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거창한 감상은 아니어도 헤어지는
시간은 아쉬웠다.
나는 모일 때처럼 필라델피아에서 온 두 가정의 픽업을 받아서 아파트
까지 잘 돌아왔다.
결국 우리 세 집은 헤어지는 진한 감상을 한번 더 향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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