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기행

뉴욕 교통 대란의 날/한인 화가 70인 전

원평재 2005. 12. 2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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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와 보행자들로 얽히고 섥힌 맨해튼의 교통 대란---.)

 

 

설마하던 뉴욕 교통 대란이 현실로 왔다.

이날 저녁에는 얼마전 교통사고로 타계한 "정관훈 화백추모 겸,

유족 돕기 특별전"의 오프닝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데---.

 

전람회 장소는 퀸즈에 있는 S일보 부설, "스페이스 월드"인데,

미국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69명의 작가들에 더하여 고인이 된 

정 화백까지 모두 70인의 작품이 출품되는 대규모 행사였다.

 

전시 주제는 "인연"이라고 하였다.

이승에 있다가 훌훌히 가는 우리의 인생이 모두 인연의 틀 속에

있지 않겠는가.

한 해를 보내며, 특히 얼마전에 타계한 정 화백을 추모하고 돕는

특별전의 주제로는 참으로 절절한 주제라는 생각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다만 김옥기 관장과 이번 행사를 주무하는 김영길 화백으로부터

전야제 초대를 받은 나는 갑작스런 교통대란 때문에 공감 보다

더한 걱정이 앞 선 것도 사실이었다.

더우기 미리 라이드(ride)를 주기로 약속한 강종숙 도예 작가의

일정이 그날따라 바빴고 우리 내외 말고도 동승을 부탁한

사람이 둘이나  더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더더구나, 맙소사.

그중의 한분은 맨해튼의 한 가운데, 34번가에서 픽업을 받을 예정이라니

일은 예사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위에 올린 그림들은 모두 정관훈 화백의 유작으로 사실화에서 부터

비구상에 이르기까지 실험을 계속하였으며,

또 재질의 사용에 있어서도 변경을 끝없이 개척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강 선생의 공방인 "토방"에서 저녁 다섯시 경. 예정에 있던 

한분을 먼저 만나서 태우고, 미어터지는 조지 워싱턴 다리를 고생 끝에 간신히

들어섰다.

이 다리도 교통 파업 기간 동안은 승용차 하나에 네명 이상이 타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하여간 토방 앞에서 만난 분은 뉴저지의 포트 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여성 관장인데,

이틀 후인 22일 저녁에는 위에서 말한 정관훈 화백의 유작전을

따로 기획하여 오프닝 전야제를 하니까 우리 부부도 꼭 오라고

초대하였다.

 

"갤러리 운영이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힘들지요. 누가 그림을 사나요. 그리고 그림 값이 너무 비싸요."

"얼마나 합니까?"

"호당 15만원 내외이니 힘들어하지요."

"서양 작가들도 크기로 합니까? 듣건데는 옥션으로 작품의 질만

따진다고 하던데요---."

"그건 이름난 화가의 경우이고 보통은 인치 바이 인치로 하니까요---."

"아, 역시 사이즈로 하는군요. 크기---, 규격 베이스 말입니다."

뒷 말은 괜히 달았다.

 

차는 겨우 다리를 지나 허드슨 강변을 조금 잘 달렸으나 이윽고

미드 맨해튼으로 비집고 들면서는 다시 난리가 났다.

시가지에는 군중을 이룬 사람들이 옷깃을 세우고 온통 떼지어

걸어다녔고 뉴스에 나온데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도 참

많았다.

스포츠 바이크가 아니라 시커먼 자전거, 때로 우리가 "자전차"라고 잘 못 불렀던

그런 것들도 마구 달려서 불안하였다.

그러나 정작 차들은 꼼작도 않아서 가히 주차장을 이루고 있었다.

대중 교통이 마비되니까 모두 승용차를 끌고 들어온 모양이다.

 

 

 

 

34번가에서 만나기로 한 분은 "이목을" 화백이었는데 그 쪽에 있는 어떤 한국 

화랑에서도 이날 저녁에 그룹전이 오프닝 하여서

일단 참석했다가 우리와 동행 요청을 한 모양이었다.

한국과 미국을 일년 중, 반반씩 다니며 작품 활동을 하다보니 대중 교통만

이용하던 분이었다.

강종숙 작가가 너무 마음이 좋다.

 

가까스로 약속 장소 쪽에 차가 헤집고 들어가니 그 길목은 이미

차단이 되어서 우리는 할 수없이 그 자리에 차를 세우고 그 분이

걸어오도록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였다.

조금 후 열심히 걸어온 그 분을 보니 머리는 삭발하였는데 말에

재치가 있고 재미가 뚝뚝 듣는 그런 예술가의 전형이었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이제 우리 차는 57번가로 나가서 퀸즈 보로 다리를 올라타야하는데

한블록 가는 시간이 반 시간이나 걸릴 판이었다.

여섯시 약속 시간이 벌써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야제 순서에는 살풀이 공연과 연주행사도 있는 모양이던데 이제

그런건 커녕 밥도 굶을 판이었다.

 

차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나하면 강선생은 급한 일까지

생긴 모양이었다.

급기야 차를 도로에 완전히 세우더니 건너편 델리 가게 쪽으로

뛰어가서 급한 일을 해결하였다.

"참 빠르십니다."

이 화백의 격찬이었다.

"시간을 아끼느라 그나마 반은 남기고---."

마음이 좋은 강 선생은 시침을 떼고 대답하였다.

전에 한번은 너무 참다가 신우염에 걸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동안 맨해튼 교통이 좋아진게 일방통행으로 바꾼 덕분이라고 했는데 이날 밤은

가로와 세로로 온갓 종류의 차들이 일방통행으로 엉켜

베틀을 짜는 형국이 되면서 완전히 주차장이 되고 말았다.

전람회장에서는 김영길 화백이 계속 전화를 해 왔으나 우리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맨해튼에서 동승한 이 화백은 자기 탓이라고 미안해 하지도

않아서 우리는 오히려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

왜냐하면 우리도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이목을 화백과 김영길 화백)

 

 

"정 화백이 그렇게 되도록 사고를 친 한국 청년의 부모가 그나마 돈은

좀 있는지, 보석금 33만불을 내고 청년은 일단 석방이 되었대요."

뉴저지 포트리 쪽에서 갤러리를 하는 그 부인이 듣기에 따라서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알고보니 자기 아들도 큰 사고를 낸 경험이 있었다.

인사 사고는 내지 않아서 그나마 벌은 적었지만 돈과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단다.

"보석금으로 나왔다지만 그래봐야 그 돈이 유족들에게 가지도

않을걸요. 본인의 수입이 아니라 부모의 돈이라서---."

이 화백도 들은 말이 있는 모양이엇다.

 

"정 화백의 그림 값은 얼마로 책정 되었어요?"

이 화백이 화제를 조금 돌려서 물었다.

"호당 20만원이지요. 생존 시에 받던 수준인데 미망인께서 그 때

보다 깍아 줄 수는 없다고 말씀하세요. 이해가 되더라구요. 고인에

대한 남은 사람의 마지막 예의랄까---. 그리고 그림이 참 좋아요."

갤러리 관장의 대답이었다.

 

"이런 분의 경우 그림 값이 중간에 꺾이지 않을까요?"

누가 물었다.

"희소 가치로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지명도가 조금만 더 이쪽 화단에

알려졌더라면하는 아쉬움의 순간입니다. 지금 미국 화단에도 초대 작가로

막 올라가고 있거든요---."

사실 뉴욕 화단에 제대로 소개된 한국 화가는 솔직히 말해서 드물다는게

이쪽 화단에 있는 분들의 중론임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여간 차안에서는 그림 값 말고도 수준 높은 그림 이야기들이

오고갔지만 속물인 나에게는 이런 기억만 남는다.

 

 

 

 

이윽고 퀸즈 보로 다리를 넘으니까 차는 잘 달렸다.

험한 동네의 복잡한 골목을 차는 잘 가고 있었다.

"어째 이 험한 동네를 VIP 기사께서 잘 알고 계시나요?"

내가 감탄하였다.

"전에 여기 S일보 화랑에서 매년 제 전시회를 했지요. 또 연말의

그룹전도 하고---.

오늘 전시회도 원래는 연말마다 하는 송년회의 성격이 강했어요. 1978년부터 

시작되었지요.

그래서 제가 여기와 인연이 많지요. 하여간 지금은 이 동네가 많이 좋아진걸

제가 알지요. 그런데 한인 신문사들은 모두 이 험한 동네 근방에 있어요."

 

 

               (김영길 화백의 실험적 작품 두 점)

 

 

 

우리가 가까스로 코 끝을 들이민 갤러리는 벌써 파장이었다.

시간이 아홉시가 넘었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그러나 신문사의 발행인인  전인승 사장님, 그 분의 부인인 김옥기 관장,

오늘 행사를 주무해온 김영길 화백, 그리고 몇몇 화가분들께서는 아직도 남아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김옥기 관장과 집사람은 포옹으로 재회를 반겼다.

 

전시 공간인 스페이스 월드 화랑은 생각보다 아주 넓었으며

작품들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전시 공간을 따로 마련헤 둔 "정관훈 전시실"은

참으로 좋은 작품들이 가득차 있어서 안타까움만 더 할 따름

이었다.

고인의 나이 이제 겨우 마흔,

이렇게 수준 높게 여러 지평을 열어놓고 홀홀히 떠난 화가의 족적은 감히

우리 나라의 손실이라고 표현하여도 과함이 없을 것

같았다.

"과공(過恭)이 비례(非禮)"라는 말이 있지만 절대로 예의를 넘은

찬탄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백남준의 단순 명료한 그림, 김영길의 경계를 무너뜨린 작품 두점,

한국에서 보내온 김호득 교수의 작품, 그림이 들어있는 강종숙의 도예 작품,

극 세밀화로 꽁치를 쟁반에 올려놓은 이목을 화백의 작품,

그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들이 현란하였으나

우리는 그냥 휘둘러보는 시간만으로도 송구할 따름이었다.

 

처음 인사를 나눈 전인승 사장님은 젊잖은 양반의 인상

그대로였다.

"신문에서 김옥기 관장님의 글을 자주 접하는데 참 설득력이

강합니다."

내가 느낌을 말하였다.

"공연한 말씀을---. 저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요---."

겸손하고 후덕한 남편의 말씀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남아있는 떡과 케익을 먹고 뉴저지에 사는 네사람은 화가들과의

뒷풀이를 사양하고 돌아오는 차에 올랐다.

아니, 이 화백은 뒷풀이 쪽으로 갔다.

 

 

 

"정관훈 화백의 유작전에는 여기 작품들도 나옵니까?"

내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포트 리의 갤러리 관장에게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제가 여기보다 먼저 그림들을 골랐는데 길(PATH)이라는 표제로

이분이 연작을 했는데 우리 화랑 전시 주제는 그 쪽입니다. 그 연작 그림이

참 좋아요.

우리 화랑 이름은 Gallery Xpose입니다.

꼭 오세요,"

 

돌아오는 길도 보통은 아니었다.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하다.

뉴욕 메트로 폴리탄 교통공사(MTA)의 파업이 빨리 끝나서 700만 뉴요커들의

어려움이 빨리 해소되기만을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