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기행

지난달, 11월에 잃고 얻은 것

원평재 2005. 12. 4. 02:21
 

“그동안 별고 없으셨지요?”

이 곳 뉴저지에서 공방을 열고 있는 도예가 강 선생으로부터 지난달 하순경 전화가

왔다.

 

“별고가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한숨을 섞어서 힘없이 대답하였다.

강 선생은 지난 달 20일에 귀국한 영남대의 K 화백 덕분으로 내가 미국에서 알게 된

수준 높은 도예가 인데,

그 소개의 자리에서는 브룩클린에서 활동하는 또다른  K 화백과도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의 취미가 딜레탄트 기질이고, 내가 또 브룩클린 쪽으로 확장되고 있는 갤러리들의

최근 추세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아는 영남대 K 화백의 각별한 배려로 모두 알게 된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나와 중등학교 동기가 되는 이강소 화백과도 모두 잘알고 지내는 처지였다.

이강소 화백은 두달 전에 맨해튼의 소호에서 전시회를 갖였다는 데 나는 안타깝게도

모르고 지나갔다.

 

 

 

“아니, 무슨 별고가 그렇게 많으셨어요?”

강 선생이 궁금하다는 듯 전화통의 음정을 조금 높였다.

귀국하는 K화백이 베푸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 준비를 도와서 강 선생도 여러군데

연락을 하는 중에 나한테 만은 전화가 불통이더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K 화백도 그동안 후의를 베풀어준 뉴욕 화단의 한인 화가 20여분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자리에 나까지 부르느라 강 선생과 합작으로 열 번도 더 전화를

했는데,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아서 여행을 떠났으리라는 낙관적 추측과 동시에

걱정도 많이 섞어했다는 것이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여 때를 놓친 수술로 고생한 이야기를 늦게나마 두분에게 모두

했더니,

그 분들도 늦은 위문과 함께, 내가 그 화가들의 파티에 참석을 못해서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좋은 기회를 잃은 사실에 나는 발을 구르고 싶었다.

 

만찬이 있던날,

일행은 이스트 빌리지의 영남대 K 화백 우거에서 저녁을 1차로 먹고,

2차로는 아까 말한 브룩클린의 또다른 K 화백 집으로 가서 와인 파티에 노래방

기계까지 동원하여 밤들이 노닐었다는 것이었다.

그말을 들으니 이제는 몸에서 열까지 날듯 싶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어찌하랴---.

K 교수도 전화로 연신 안타까움을 표하더니 그 다음날 속절없이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 후,

이곳에서 발간되는 세계일보의 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김옥기 편집인이

신문에 글을 올렸는데 내용이 기가 막혔다.

김 관장은 나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으로 지난번 전수천 화백이 암트랙 열차를

이용하여 "무빙 드로잉"이라는 실험적 작품활동을 했던 모든 과정을 같은 신문에

연재한 바도 있었다.

 

김 관장이 새로 올린 글을 보니 최근 어떤  한인 화가의 유작전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작고한 그 화백은 오래동안 고생만 하다가 이제 겨우 이름을

낼만한 때에 불의의 사고로 최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전말은 이러하였다.

K 화백의 환송 파티가 있던 날, 2차는 브룩클린의 그  K 화백 집에서 자정을

넘기고들 헤어졌지만, 그 중의 일부는 뉴저지, 포트 리 근방의 어떤 한인 화랑으로

새벽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다.

뉴저지의 한인 화랑가라면 내가 있는 곳에서도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일 듯 싶다. 

 

그런데, 하필이면 몹쓸 한인 청년 하나가 술에 취하여 새벽 음주 운전을

하다가 애꿎게도 이 한인 화가를 친 다음에 뺑소니를 쳤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찰나에 또 다른 차가 덥쳐서 그 한인 화가, J화백은

결국 숨지고 만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정말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다가 이제 겨우 이름을 낼만한 순간에 부인과

어린 두 자녀를 남기고 그 분은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 처참한 순간에는 동행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함께 있었더라도 치명적인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 누군가가 함께만 있었더라도---.


지난달, 내가 수술대에 누워있었던 그 한달 동안에는 참 여러 가지 행사가

많아서, 나로서는 이래저래 잃어버린 것들이 많았다.

수술비 날린 것은 생명을 건졌으니 따로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바는

아니겠고 더욱이 그 얼마전에 감행했던 중국의 오지 여행을 다니던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소름 끼치는 상상까지 떠오르니 수술비 관계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릴 일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그런 것 말고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손실이 많았다.

 

미국에 도착하여 우선 개인적인 일 처리와 이런저런 사적인 여행을 미리 한 다음에

때맞추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타이밍이 대체로 11월 초였는데,

모든 스케줄이 엉키고 말았다.

이제 새로 공적인 일을 시작하려니 아직도 좀 어려운 자리에는 내 몸이 나아갈 의욕을

발휘해 주지 않고, 이제 돌아갈 짐을 쌀 날짜도 급박하게 닥칠 것이다.

 

공적인 일은 그렇다치고 다소 마음 편한 인간관계의 구축에도 때를 놓친 측면이 많다.

예컨데 집 사람의 여고 동기회가 이쪽에서 강하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

오죽하면 IMF 직전에는 동기회를 여기 뉴욕에서 하느라고 비행기 한대가

차터될 정도였다.

그러고 나더니 IMF가 터졌다.

누가 누구 탓할 일도 아닌 시절이었던 가 한다.

 

그건 그렇고,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에 그 여고의 2년에 한번 있다는 총 동문회가 

열렸는데,

집 사람이 소속된 52회에서 우리 내외를 위하여 마련한 티켓은 결국 휴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몰핀에 기분 좋게 취하여 몇날 며칠 밥 먹을 걱정도 않고 있는데 로밍 전화는

자꾸 울려대며, 만찬 자리에 집 사람 혼자라도 참석하라는 독촉이 빗발쳤다.

 

“너라면 수술 받은 사람 병원에 눕혀놓고 밥 먹으러 가겠니?”

집 사람이 마침내 웃으며 외쳤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답변이 금방 돌아왔다.

“그렇다마다! 나는 오래 병석에 누워있는 영감 두고 이제 막 돌아다닌다.”

뭐 그런 응수가 저쪽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세상이 좁다.

집사람과 여고 동기가 되는 한분은 처음 우리가 한인 교회에 나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향리의 끈떨어진 갓 격인 “K 중 고등학교” 동문들이 예배 후에 따로 모였는데,

내 1년 후배 되는 동문의 부인을 보고 낯이 익다고 우리 집에서 먼저 알아내었다.

 

이 여고 동기들이 한달에 한번씩 부부 동반으로 좀 거하게 모이는 모양인데

연말연시인 12월과 1월에는 서로 바빠서 행사가 없다고 한다.

글쎄 운이 좋으면 내년 2월초에나 만나고 떠날지 모르겠다.

보통은 월말 행사라는데---.

하여간 이 부분에서도 손해가 많이 생겼다.

 

11월의 말일 저녁에는 맨해튼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점등하는 행사가 있다고

하였다.

그 불밝히는 의식도 이 시대의 설화가 되어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이제 별 관심이 없어졌다.

의욕 상실이다.

 

그리고 이 해를 넘기면서 벌이는 저 유명한 타임스 스퀘어에서의 카운트다운

행사에도 나가보지 않을 작정이다.

흘러간 시간의 대영묘에 한해를 다시 묻어버리고 "희망의 새해"라는 휘장을

펄럭이며 인간의 한 갓 소망을 담는 카운트 다운 행사라는게 도무지

헛되고도 헛된 일 아니겠는가.

 

참 이상한 일도 있다.

내 배가 아프기 시작했던 고통의 진원지, 타임스 스퀘어와 42번가는 생각만

해도 아직 살이 떨린다.

당분간 이 떨림은 진정될 듯싶지 않아서 나는 맨해튼을 나가지 못할 것 같다.


아, 손해가 또 있다.

어쩌다가 11월 말까지 유효한 극장표를 많이 얻었는데 이 것도 다 써먹지

못하고 이제 버리게 되었다.

아프기 전에 몇 번 써먹었던 것과 내 친구들에게도 조금씩 선물한 일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극장표를 버려야할  생각이 나서 며칠전에는 나 혼자 운동 삼아 이 곳

뉴저지의 Multiplex Cinema까지 걸어가서 “In the Mix"라는 시시껄렁한

영화를 보았고,

또 11월의 마지막 날에도 집사람과  "Harry Porter and the Goblet of Fire"를

보고 왔다.

 

운동을 하라는 친구들의 조언도 있고 하여 며칠간 배낭에 무거운 물건까지 

사서 넣고 땀을 흘리며 막 걸어 다녔더니 급기야는 코피가 툭 터졌다.

감기 기운까지 겹치니 무리의 대가였다.


병원에서는 퇴원 때에 나에게만 독감 예방 주사, “플루 샷”을 놓아 주었었다.

집 사람에게도 좀 놓아주라고 했더니 환자 말고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자격이 다 있네.”

내가 그 비슷한 말로 불만을 터뜨렸더니 히스패닉 간호사가 아주 스마트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깔깔깔 웃었다.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진정 호의와 우정에 가득하여 스마트한 농담을 했을 때에는 오히려

이들이 인디언의 손도끼, 토마호크가 자신의 정수리를 친다고 오해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무튼 일찍 자리에 누워서 난방을 최고로 하고 푹 잤더니 감기는 사라졌다.

플루 샷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플루 샷이 금년에는 조류 독감 때문에 미국에서도 공급이 원활치 않은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입원과 수술의 덕을 본 셈이다.

 

덕을 보았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보니 11월에는 모든 것을 잃기만 한게 아니라 얻은

점도 있다는 상념이 조금씩 묻어난다.

아니 사실은 얻은 점이 훨씬 더 많았다고도 할 것이다.

 

입원과 수술 과정 내내 집사람은 내 병상을 지켰고 바쁜 아들 녀석도 긴 수술 시간

내내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켰다.

 

아기를 병원에 데려와서 좋을 일 없다는 내 엄명을 무시하고 의사의 소견까지

듣고서 손주를 내 병상에 데려온 며느리의 마음도 고마웠다.

고국에서 보내오는 딸네와 막내의 전화 속 응원도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 뉴잉글랜드 지방, 절해의 고도라고 여겼던 곳에서 친구와 동기들이

부인들까지 힘을 합쳐서 진정으로 걱정을 해 준 그 정이 무엇보다도 고맙다.

정말로 새로 터득한 우애의 경지였다고 크게 외치고 싶다.


끝으로 가장 소중하게 얻은 게 있다면 내 마음의 성숙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그 내용은 지금 여기에서 세치 혀끝으로 발설할 내용이 아니라 두고두고

장을 담그듯이, 곰 삭이고 또 삭이어 낼 재료가 아닌가 한다.

 

아, 오늘 여기에서 나오는 한인 신문을 보니 나와 인연이 있는 중등학교

총 동문회의 연말 모임이 다음주말에 있다고 큰 광고가 나왔다.
이곳의 연말 세시기인듯, 온갓 모임이 광고로 나온다.

어쨌거나 내주 말이라면 그때까지는 참석할 힘이 생길 것 같다.

 

모든이에게 감사 드리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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