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조금 떨어진 곳에 내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김에 헛기침을 하려다가 나는 숨을 죽였다. 그가 싱싱한 나무를 부여안고 몸을 떨고 있는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참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르시아스 심이던가, 한국 사람이 정열의 나라에서 쓰는 이름으로 필명을 삼은 그 작가가 "떨림"이라는 단편 모음집을 썼지.그러나 그 떨림은 여자에 해당된 묘사가 아니었던가. 여성 오르가즘의 순수 한국어---.하지만 내 친구는 남자인데.어쨌거나 그가 나무와 부둥켜안고서 떨고 있는 모습은 성별 불문간에 "떨림" 그 자체였다.그리고 안겨있는 병든 나무의 잔가지들도 사시나무 떨듯 앙상한 팔들을 내흔들고 있었다.나는 더이상 그런 모습을 보기가 민망해져서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가 몸을 돌렸는데 처음 농장에 들어올 때 보았던 것처럼 눈에서 광채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네 뭘하고 있나?" 내가 겁이나서 큰소리로 물었다. "아니 이 가시나가 어디로 갔지?" 그가 아직도 꿈에서 깨지않은듯한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나의 모습을 보고 게면쩍게 웃었다. "가시나라면 처녀란 말인데 처녀는 무슨 처녀야?" 내가 그를 흔들어깨우듯이 또 크게 소릴 질렀다. 멀리 금산 지구국에서 내뿜는 불빛이 그와 나의 그림자를 길게 병풍같은 산록으로 이끌고갔다. "내가 이거 가끔 몽유병 같은걸 느껴. 자다 보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거든. 나가보면 매번 얼굴이나 몸매가 바뀌는 젊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 내가 껴안고 한참 재미를 보다가 정신이 번쩍들어서 살펴보면 여기 나무 중의 하나를 껴안고 있단 말이야---." "이 사람아! 나도 조금전 방안에서 이상한 물체가 흔들거리다가 사라지는걸 보았어. 여기 터가 억세게 센가---? 아니 이 곳이 전에 뭘하던 곳인지는 알아봤어?" "무연 분묘가 좀 있었지. 일부는 읍에서 화장처리를 했고 또 봉분이 아주 미미한 것은 그냥 뒀는데 그 뫼뿌리 자락에 우리가 잤던 컨테이너를 얹었지. 원래 예로부터 양택이나 음택이나 명당 자리는모두 양지바르고 입지가 좋잖아---." "아하! 짐작이 가는군."나는 그가 껴안고 있었던 나무에다가 시원하게 오줌을 누면서 그의 말에 대꾸를 했다. "자네 김시습의 금오신화(金烏神話) 이야기 들어봤지?" "아, 거 왜 처녀 귀신들이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말이지?" 아이구 이 농사꾼도 고등교양교육은 제대로 받았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자네 농원도 우리 고향의 명산, 金烏山을 따서 金烏農園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게 금오신화와 또 관련을 맺게 되었네. 이 컨테이너 박스가 처녀귀신 뫼뿌리에 걸렸나봐. 가랭이 한가운데크리토리스 근방일는지도 모르지, 하하하. 하지만 크게 걱정은 말게. 자네가 살려놓은 저 수많은 나무들이 자넬 지킬거야. 하지만 자네나 나나 서뿔리 아까 자네가 말했던 대단한 분들의 해혼식 흉내는 내지 말아야 되겠어. 제발 도사 흉내는 내지말어. 자칫 헐벗은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처녀 귀신이 들어오면 어떡허노. 그런건 다 진정 道人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道끼어려 하는 짓이고---""아이구, 장사꾼이 도사같은 소릴 하네. 날 위해서 혹은 자넬 위해서부르짖는 소리인줄을 알겠다만 해혼식이 하고 싶다고 혹은 하기 싫다고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네---."그가 몇마디 더 주어섬기려는 것을 제지하고 나는 타고 왔던 BMW가 조용히 코를 골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그래 해혼식이야 道끼, 神끼어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고 우리야 사람끼나 짙게 풍기며 살아가야하는거야.그런데 그게 우리 남자들만의 마음대로 되는건 아니라고---?귀신이나 천지 신명이 도와야하나---.어릴때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큰집에 가던 생각이 났다.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새벽에 읍내에 있는 집과 학교를 향하여 재빨리 오는데 새벽 안개 속에서 大자로 길게 누운 내다버린 디딜방아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연고인지 어제 저녁 들어갈 때에는 눈에 드이지 않았었는데 새벽 안개 속에서는 가랑이를 활짝 벌리고 넘어져 있는데 그걸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같이가던 사촌 형이 내 어깨를 툭쳤다."무섭지?""응, 몸이 떨려."저게 박첨지 집에서 오래쓰다 버린다고 얼마전에 나온건데 그집 노처녀가 자기집 방아간에 목을 메고 죽었거든.""어제 큰집에 들어갈 때는 왜 말 안했어?""이상하게 저녁에는 눈에 잘 띄지않고 무섭지도 않아. 그런데 꼭 안개낀 아침에만 저렇게 잘 보이고 사람을 무섭게 하거든. 그리고 혼자 나가는 길손들이 저걸 부등켜 안고 씨름을 하다가 혼절하는 경우도 생겼고---.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도 생겼단다.""에이, 뻥이다""그래? 그런데 너 왜 떨고있어?"서낭당이 그 가까이 있었고 우리는 돌을 하나씩 집어서 팽나무 밑으로 집어던지고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을 쳤었다.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발에 걸리는 돌 하나를 킥 스텝으로 툭쳤다.마치 서낭당에 공물로 보내듯이. 그래, 여기를 나서면 얼른 서부에 있는 가족들에게 국제전화부터 해야겠다. 지금 당장 전화를 걸자니 보통 3일씩 버티던 휴대폰 밧데리가 기이하게도 하룻밤 사이에 모두 방전이 되었네. 그래 처녀 귀신한테 나도 에너지를 조금 공양한 모양이네.처녀 귀신들이야 날 도와주겠지.나도 이제는 멋대로의 아내를 경멸만 할 것이 아니라 오랫만에 빨리 LA 인터네셔널 에어포트로 가서 기하학적으로 세워져있는 저 추억의 공항탑을 보며 가족들이 픽업하러 나오는 걸 기댜려야겠다.하지만 그게 뜻데로 잘 될까.아까 저 녀석이 초를 쳤지---."무슨 생각하고 있어?"나는 깜짝 놀랐다.내 친구였다."귀신 보고 놀란 가슴 친구보고 놀랬네.""미국 있는 마누라와 해혼식할 생각이구나.""아이구, 귀신은 농사 짓는 네가 귀신이네.""미국 가서 사람끼 맡아보기는 힘들거다. 그래서 해혼식이 위안은 될거야.""네가 귀신이냐, 유령이냐, 내 속을 훤히 드나드는구나.""처녀 귀신들 덕분이지.""내가 자넬 혼자두고 가도 될까?""어허, 내가 자넬 혼자 보내도 될까?"그의 눈빛이 다시 형형히 빛났다.나무 귀신들은 새벽의 선문답에 귀기우리고 있었고, 금산 지구국의 조명등은 또한 이 귀신들을 하염없이 비추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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