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트루드 스타인 여사의 동상이 브라이언트 파크의 한구석에 쪼그리고 있다.)
"로스트 저너레이션(Lost Generation)은 "잃어버린 세대"라고 흔히
번역되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서구 사회의 정신적 황폐현상을 뜻하는
말로 우리에게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당시 파리에서 기거하던 미국의 여류 시인이자 소설가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여사였다.
(스타인 여사의 동상을 우연히 찾은 추운 겨울날, 5번가 길거리에서는 따뜻한
멕시코로 오라는 선전 라이브 쇼가 눈길을 끌었다.)
스타인 여사는 시와 소설을 쓴 문필가였지만 그보다는 당시 미국에서 온 젊은
작가군들,
예컨데 핏제랄드, 에즈라 파운드, E E 커밍즈,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에게
문학 세계의 대모(代母) 역할을 한 여걸이었다.
문학 수업과 도움을 받은 이 젊은 작가들은 성공을 거둔 후 헤밍웨이 까지도
나중에는 등을 돌려 그녀의 영향력을 부인, 내지 과소 평가했지만---.
그게 세상 인심이다.
인심은 그렇고, 하여간 이야기는 다시 돌아가서,
어느날 이 스타인 여사가 고장난 자기 자동차를 수리하려고 젊은 프랑스
수리공들에게 부탁을 하였으나 전후의 노라리 세대들이 그런 능력이 있겠는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그녀는 "너희들은 모두 길 잃은 세대로구나(You are all a lost generation!)"
라고 크게 탄식을 하였다.
마침 옆에서 그 말은 들은 헤밍웨이의 작가 정신이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파리에는 미국으로부터 자의에 의하여 국적을 이탈한 청년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른바, 자의에 의한 국적 이탈자, expatriates들이었다.
그들은 1차대전의 참전 용사들로서 고국에서의 생활에 별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아직 영웅시하는 유럽 사회를 배회 하는 딜레탄트, 예술 애호가들
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연금과 참전 수당으로 생활을 하며 유럽적 가치를 음미하거나
퇴폐적 즐거움도 맞보았는데 낮은 물가와 높은 달러 가치는 또하나 여분의
매력이었다.
아무튼 헤밍웨이는 제1차 대전 후의 가치 전도적인 당대 사회를 그린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 거트루드 스타인 여사의 이 탄식을 제사(題辭)로
맨 앞장에 실으면서 두 사람과 이 말은 유명해졌으며 특히 이 짧은 어구는
한 시대를 표현하는 명언이 되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세대"라는 번역에는 조금 저항도 따른다.
"lost"라는 말은 "물건을 잃었다"는 뜻이지만 사람이 주어일 경우에는
"길을 잃었다"라는 뜻이 된다.
SF 영화, Lost in the Space는 "우주에서 길을 잃어"라는 뜻이었다.
전후 세대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은 "잃어버린 세대"라는 막연한 표현
보다는 "길을 잃은 상태"로 묘사하는게 더 적확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칼날같은 말들로 예리하게 한 세대를 도려내던 문호들도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런데 거투르드 스타인 여사를 며칠전 우연히 만났다.
뉴욕 공립 도서관(NY Public Library) 뒷 편의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우연히
만났다.
(없는게 없는 브라이언트 파크의 간이 상점들, 이 곳의 공동 화장실은 거창하기로 유명하다고.)
여사는 잔뜩 들어서 있는 간이 상점들의 뒷 쪽에서 길을 잃고 쓸쓸히 나앉아
있었다.
쌓인 눈들을 치워서 모아 놓는 자리에 노파처럼 웅숭그려 앉아 있으니,
화강암 대석 위에 브론즈로 빚어놓았으면 무엇하랴.
내가 여사의 작은 동상을 문득 발견한 것은 그저 우연일 따름이었다.
글쎄 우연이 아니라면 "문학 혼" 같은 것이 교감 되었나---.
겨울날 오후의 짦은 햇살 속에서 나는 서둘러 스타인 여사의 사진을 찍고
이 공원의 이름, "Bryant Park"도 그 유례가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전에 이 동네를 잘 아는 며느리에게 물어보았지만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한 일도 있었다.
이날은 스타인 여사도 반갑게 만난 김에 목에 힘을 주어 잔뜩 들어선
간이 상점들의 낮은 추녀들 사이를 비집고 내 시선에 내공을 모아보았더니
아, 화강암으로 빚어진 기품 좋은 노인이 뉴욕 시립 도서관 건물을 병풍처럼
뒤로 둘러치고 머리 위 쪽으로는천개석을 한 석대 위에서,
그 모양도 점잔을 손, 선비처럼 좌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바로 William Cullent Bryant(1794-1878)였다.
문학사적으로는 미국 최초의 낭만주의 시인의 반열에 올라있고 당대의
저널리스트, 신문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뉴욕 이브닝 포스트의 기자로 출발하여 마침내 공동 소유주까지도 지낸
그는 당시에 이미 뉴욕에 많은 공원이 있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센트럴 파크가 조성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이 Bryant Park와 어떤 인연인지,
단순히 후세인들의 추모인지는 아직 찾을 길이없다.
뒤쪽에 자주가는 New York Public Library에 들어가면 무슨 단서가
있겠지만 그렇게 자료 찾기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
도서관도 요즈음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좀 들떠있고 내 마음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현관 내부에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Bryant의 웅장하고 기품있는 대리석 석상 앞에 서니 그의 작품 일부가
대석에 새겨져 있다.
대뜸 그의 대표작 Thanatopsis려니 하고 읽어보니 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저자 거리의 외침이 큰 것 같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흐르는 대하의 잔잔한
물결같은 깊은 느낌에 어찌 비하랴---."
대략 그런 뜻이었는데 원문을 따오지는 못하였다.
그의 대표작, Thanatopsis는 사관(死觀)이라고 흔히 번역되는데,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명상을 운문으로 처리한 것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의 삶에대한 관조였다.
thanato-나 topsis는 죽음을 뜻한다.
해부검사, 부검이 "오톱시" autopsy이다.
딸이 두꺼운 책을 끼고 요란을 떨던 생각이 난다.
Bryant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당대의 에드거 앨런 포우나 후대의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쓰처럼 부정적이고 과민한 것은 아니었다.
죽는 날까지 그에 대비되는 삶의 의미를 우렁차게 찬미하고 힘찬 전진을
하자는 긍정적인 외침이었다.
워즈워드와 같은 범신론적 생의 예찬도 그의 사상의 일부였다.
그는 이신론(理神論)적이었고 유니테어리언이었다.
이신론이란 신의 존재는 인정하되 이치에 따라서 움직힌다는, 신의 절대성,
자유의지같은 것과는 조금 다른 매우 인본적, 인간 중심적 오만한 뉴잉글랜드
지식인들의 사상에 경도하였다.
당연히 그는 공화당 집안에서 민주당으로 소속을 바꾸고 진보주의자,
리버럴리스트의 대열에 서지만 지금 우리가 진저리치게 혼돈하고 있는
좌파, 혹은 그 반대쪽의 뉴라이트, 등의 경직된 사상 논쟁에서는 비켜나
있었다.
이야기를 편한 사담(私談)으로 바꾸고 싶다.
내가 42번가와 Bryant Park라는 글자를 따오기 위하여 지하철 역을 카에라에
자꾸 담으니까 흑인 경찰이 유심히 보호관찰자 같은 시선을 던졌다.
내가 선수를 쳤다.
"저기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빌딩이 크라이슬러 빌딩이 맞소?"
"히야, 잘 아시네. 여행객이오?"
"그렇소. 그런데 저기 가까운 데에 있는, 한국 여인들의 옛 치마 곡선처럼
생긴 빌딩은 이름이 무엇이요?"
내가 모양이 우리 여의도의 63빌딩같이 생긴 빌딩을 가리키며 손으로 우리
치마자락 모양을 만들어서 물어보았다.
"아, 그레이스 빌딩이오."
"정말 이름처럼 우아하게 생겼소."
내가 감탄을 하자 그도 파안대소하였다.
귀찮게 가방을 보자는 소리는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도서관에 들어갈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입구에서 가방을
열어보였다.
지금은 춥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여기세서 참으로 치마보기도 힘들게 생겼다.
모두 청바지이거나 아예 다 벗어버리기에---.
이날도 오다가 브로드웨이 도로상에서 벌거벗은 쇼를 보았다.
추운데 따뜻한 멕시코로 여행을 오라는 광고 쇼우였다.
겨울이라도 유명한 "빅토리아의 비밀(Victoria's Secret)"이라는 속옷 가게의
쇼우 윈도우는 모두 내의 바람이다.
(거리에서 만난 아이스 맨)
(Victoria's Secret 앞에서)
(Lord & Taylor 백화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끝으로 길잃은 할머니 거트루드 스타인과의 조우가 있던 날은 저물어갔다.)
그레이스 빌딩은 내가 알고 있었다.
그 길을 자주 지나가기도 했지만 며느리가 다니는 이름께나 있는 회사가
그 건물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바쁜지 일년에 한두번이나 여기 공원에 나와본다고 한다.
뉴욕과 관련하여 미국의 문인들을 찾으면 한이 없을 것이다.
맨해튼이나 뉴욕시, 업 스테이트와 뉴욕 주 전체를 따지면 참으로
수 많은 문인들의 족적을 찾을 수 있겟지만 그게 도리어 찾기를 어렵게도
만든다.
가령 존 스타인벡만 하더라도 그를 캘리포니아의 살리나스 계곡의 작가로
볼 것인가,
뉴욕에 와서 저녈리스트로 활약한 시기를 넣어서 뉴요커로 볼 것인가---.
그래서 호구 조사하듯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텔레파시가 통하고 이날처럼
이심전심이 되는 경우에만 그들을 만나보는 일종의 횡재수 의존 방식으로
문학기행을 하기로 나는 작정하였다.
그게 내 취향에 맞는 방법론 같다.
다음 번에는 이야기가 시작된 김에 내가 저술한 책과 번역한 책 중에서
Bryant와 Stein여사에 관련된 부분을 여기 올려볼까 한다.
아직도 의문이 계속된다.
"길잃은 세대"를 직관적으로 갈파한 거트루드 스타인 여사는 왜 이 뉴욕의
추운 겨울날,
치운 눈을 쌓아두는 공원 구석에서 길을 잃고 떨고 있었던가.
(길을 잃은 할머니처럼 보인 거트루드 스타인 여사의 브론즈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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