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위 얼굴의 코가 2년전에 떨어져 나가기 전 모습입니다 화이트 마운튼의
밑에 케년 마운튼-곤돌라를 타는 곳의 기념품 점에서 그림 엽서를 찰칵!)
돌아오는 날이 밝았다.
어제 께벡에서 바득바득 께벡임을 일깨워준 수필가께서는 참 부지런하여서
모텔 뒤편의 맑은 뉴햄프셔주의 호수와 흘러넘치는 물구비를 보고 오신다.
모습이 청년과 같다.
예전에 프랑스 문화원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께스끄 세(Que'st ce que cet)?"
"세떵 까이에(C'est un cahier)."하고 프랑스어 처음 시작하던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다.
누가 '새똥'이라고해서 웃은 기억도 났다.
Quebec이니까 께벡이 현지음이기는 하겠다---.
(뉴 햄프셔 주의 시골 모텔에서---.)
아메리칸 스타일 조식이 참 허무하다.
리무진은 짙은 안개를 뚫고 뉴햄프셔의 산하를 누볐다.
화이트 마운튼에 있는 "큰바위 얼굴"을 마지막 날의 첫 기착지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곤돌라를 타러간 캐논 마운튼에는 안개가 짙게 끼고 실비까지 내려서 타기를
포기하고 그냥 걸어서 큰바위 얼굴 전망대 까지 갔다.
(캐년 마운튼 곤돌라가 올라가는 기념품 가게 아래에서 안개낀 산을 포착했지요.)
좌우로 개울이 흐르며 청아한 소리를 내고, 신선한 공기는 폐부를 찔렀다.
걸어가며 왼쪽이 독수리 절벽, 오른쪽 앞 방향으로 큰바위 얼굴이 있는데 구름과 안개가
'차도르' 처럼 빛나는 그 얼굴을 가렸다.
(이제는 The Old Man of the Legend라고 합니다. 코가 날라가고나서 전설의 인물로---)
아니, 사실은 그게 더 나았다.
빙하기의 흔적으로 생긴 큰바위 얼굴은 지질학 적으로 약 1만 5천년을 뉴튼의 법칙을
거부하며 버티다가 2003년 5월 3일에 마침내 얼굴의 코 부분이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코가 떨어진 그 모습을 보지 않는게 다행 아닌가---.
(코가 슬라이딩 오프 하는 장면을 담아 놓은 표지판)
우리가 어릴때 코를 흘린 것은 뉴튼의 법칙을 순응한 것인데, 하여간 코 자체가
이번에는그 법칙에 순응한 모양이다.
영어로는 sliding off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The Old Man of the Mountain이라는 표현도 The Old Man of the Legend로
바뀌어서전설의 일부라고 표지가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 10년젼에 카나다의 토론토를 거쳐서 들어오며 그 얼굴을 직접 보았는데 그게
내 생애에서는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그 때의 짧은 상면은 사실 허무했었다.
당시에는 여행 일정이 얼마나 바빴던지 지방 국도를 달리며 오른쪽으로 한 3-5분간
쳐다보며 그냥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그 정도 거리를 달리고 나서 보니 큰바위 얼굴은 사라지고 암벽만 거무튀튀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각도가 달라진 것이다.
북한산도 어떤 각도에 따라서는 미남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듯이 보인다.
모든게, 모든 형상이라는게 다 일 순간이다.
여기 블로그에 온갓 정성을 쏟아보아야 자칫, 아니 필연코 한 순간의 빛이요, 형상일
따름일 것이다.
이번 기회에는 코 떨어진 큰바위 얼굴도 못 보았지만 그게 되레 참혹한 얼굴을 피하여서
다행 같기만 하였다.
전망대 앞의 작은 호수가 또 그렇게 아름답고 청량할 수가 없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달리는데 나에게 미국 문학 강연을 계속하라는 주문이 또 들어왓다.
사실 그 전날에도 인솔자의 강권으로 마이크를 잠시 잡고 워싱턴 어빙의 소설 작품인
'스케치 북' 이야기를 했었다.
마침 레이크 조지 근처에서는 '립 밴 윙클 다리'를 건너오기도 했었다.
립 반 윙클이라면 산속에서 신선들과 잠간 동안 볼링을 하다가 내려왔더니 이미 고향
마을에서는 십여년이 지났더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그 작가는 워싱턴 어빙이었다.
이래저래 강연의 말머리를 이끌기에는 아주 적절하여서 내친김에 눌변으로 미국
식민지 초기의 문학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오늘은 계속하여 워싱턴 어빙의 큰바위 얼굴과 마크 트웨인 이야기를 하라는
요청이었다.
코네티커트 주도인 하트포드의 마크 트웨인 기념관으로 리무진은 달리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 사실주의 문학 시대로 막 넘어가는 시점에 있었던 작가라서
여러가지로 할 이야기는 많았다.
다만 애초에 평론가, 김 교수의 문학 이야기만 듣기로 마음 편하게 작정하고 전혀
준비없이 나선 내 입장이어서 평소 실력으로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달리는 공간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청중들이 내 눌변을 듣는 외에 다른 재간이
없어서 경청하는척 하였지만 착각한 연사인 나는 신바람이 났다.
이 기행문이 끝나면 그 이야기도 가능한데로 올리고 싶다.
아, 나다니엘 호돈 이야기도 그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첫번째 이유는 물론 '큰 바위 얼굴'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세일럼을 지나게 되면서 내가 또 자연스럽게 보충할 내용이 생겼다.
화이트 마운튼의 곤돌라를 타지 못하자 주최 측에서 그 보상으로 보스톤까지
차를 내달리며 차창 관광을 좀 더 하기로 하여서, 가는 길 인근에 있는 세일럼과
호돈의 '주홍 글씨' 배경이 맞물린 탓이었다.
이 때에 한 이야기도 모두 뒤로 미룬다.
마크 트웨인의 옛 집은 규모가 컸다.
헤밍웨이가 "모든 미국 문학은 마크 트웨인에게서 나왔다"라고한 말이 이런 데에서도
엿보이는지 모르겠다.
전에 와 본 문우들의 이야기로는 최근 2-3년 사이에 많이 확충되었다고 한다.
45분 정도의 투어에서도 안내원은 최근의 복원 노력을 강조하였고 실제로도 그런
공사가 계속 진행 되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생가와는 달리 내부에서의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공사 탓인지는
모르겠다.
기념관으로 쓰는 이 곳의 3층은 당구장까지 놓여있었는데 마크 트웨인은 거의 마지막
작품까지 이 공간에서 써내려 갔다고 하여서 후기 작품은 그의 어두운 기간에
속하여서 다른 작은 집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하는 내 짐작을 틀리게 하였다.
이 부분은 궁금하여서 나중에 따로 물어보아도 안내원은 역시 그렇다고 확인하여
주었다.
"중년 이후에는 파산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랫지요. 그렇지만 이 집은 부인 이름으로 되어있었거든요."
안내하는 나이많은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답하였다.
(마크 트웨인이 고안하고 출판사에 도입한 신형 인쇄기 등은 획기적이었으나 그가 경제적
으로 곤란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부자집 부인을 얻었지만 자신의 작품으로도 거금을 모았다.
그러나 인쇄기의 개발과 출판에 손을 대다가 파산을 한다.
자녀들도 일찍 세상을 떴다.
영국 쪽에서는 미국 문학을 폄하하고 마크 트웨인의 작품도 얕보았다.
생애 전반부에 힘찼던 그의 낙관적 작품 경향은 냉소적인 사회 비판으로 바뀌는데
이런 사연들이 그 원인이었다.
(마크 트웨인 기념관에 마침 CBS의 '60분(Sixty Minutes)' 명 진행자인 Morley Safer가
세미나 참석차 왔다가 우리 일행과 조우하여 담소와 사진 촬영에 응했다.)
'아더왕 궁전에 들어간 코네티커트 양키 병사들'이라는 작품이나 '도금 시대'
같은 사회 평론이 그 대표적이다.
'양키들'에서는 영국 기사도 정신의 원류라고 하는 아더왕 시대의 궁전에 기이하게
들어가게된 양키 병사들이 그 궁전 내부의 기사들의 암투와 위선, 아더왕의 왕비인
게나비어와 기사장의 염문, 이 사실을 알면서도 원탁의 기사들을 아우르느라
내색하지 못하는 아더왕의 고민이 그려져 있다.
'도금 시대'는 남북 전쟁 후의 경조부박한 배금 사상을 그리고 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Harriet Beecher Stowe 여사의 만년의 저택이 바로 옆에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집 옆으로는 '해리엇 비처 스토우'부인이 만년에 지냈다는 저택이
보존되어 있었다.
'엉클 톰즈 캐빈'을 쓴 이 작가에게 링컨은 '이 작은 여자가 그렇게 큰 일을 했느냐'
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동부 Beecher가문의 지식인 아버지와 오빠들의 사이에서 성장한 그녀는 인간의
기본권 확립에 큰 목소리를 내었는데, 오빠의 친구인 Stowe가로 시집을 가서도
친정의 성을 굳세게 자기 이름에 넣었다고 한다.
그녀의 여성주의도 놀랍지만 남편의 이해도 큰 힘이었다고 한다.
(아리랑 식당 바로 옆 촬스 강변에 Berklee음악대학이 있다. 서부의 Berkley와는 아무 관계
없으나 음대로는 그 만한 이름이 있다. 여기 까지가 보스톤이고 강을 건너면 케임브리지,
MIT 돔과 Harvard 스퀘어가 차례로 나타난다.)
(음대생들의 발랄한 모습들---.)
보스톤에서는 '아리랑'이라는 한식 부페집에서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이 곳은 나에게 개인적 추억이 있는 곳이다.
큰 아이가 촬스강 바로 옆의 저 슬로언 스쿨에서 MBA를 할 때 찾아가서 몇 번 밥을
먹은 곳이다.
이 녀석은 내친 김에 바로 그 옆의 케네디 스쿨에서 듀얼 프로그램을 한 결과로
졸업식 때에는 하루 차이로 두 곳을 다 참석하는 학부형의 감동을 맛보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간 관계상 촬스 강을 건너 케임브리지 쪽에 있는 저 유명한
돔과 스퀘어 쪽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주말을 이용하여 아들 가족들과 1박 2일의 여행 계획은 잡아 놓았다.
롱펠로우의 생가도 그쪽 하바드 캠퍼스 인근에 있고 더 나아가서 케이프 코드도
독한 생맥주 집이 있어서 들러 본적이 있었다.
(마크 트웨인 기념관 입구 쪽에는 그가 말한 많은 잠언이 적혀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Travel is fatal to prejudice였다. 여행은 편견을 없앤다---.)
마지막 날에야 날씨가 쾌청이었다.
뉴저지의 포트리에 저녁 8시경 우리를 내려놓은 리무진은 플러싱을 향하여 어둠을
뚫고 냅다 달려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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