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캐나다 문학 기행

계백, 께벡, 퀘벡의 비에 젖은 단풍

원평재 2005. 10. 22. 21:06
 

 

(퀘벡의 아랫 동네로 "후니쿨라"를 타고 내려와서 언덕 아래 위를 다 넣어

촬영한 전경입니다,)

 

이른 아침에 들어온 올드 퀘벡은 프랑스 풍이 너무나도 절정을 이루어서

비에 젖은 여행객들의 마음은 공연히 센치멘탈 저니의 감성으로 벅차게 되었고

짐짓 져며드는듯하였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처럼 드골이 대통령일 때 그는 여기에 와서

'프랑스 만세! 퀘벡 만세!'를 외쳐서 민족 혼을 깨우치고 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서구 열강의 체스 게임에 불과하다.

일상에 지쳐 떠나온 여행객들의 내심은  갑작스레 밀어닥친 이국 정취의 상띠망으로 

환희와 즐거움이라는 또다른 평형 감각을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 곳을 다시 찾은게 얼마만이던가.

예전에 처음 왔을 때에는 증명사진 찍기에 바빴지---.

하지만 이제 다시 와서 여유를 찾아 이 패자의 역사가 서린 속살을 들쳐보니

모르고 지냈던 사실과 의미들이 새록새록 묻어나기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우선 퀘백을 지키기 위하여 초기 프랑스 식민지 사람들이 피땀흘려

구축한 '프롱뜨낙 성채'가 세인트 로렌스 강 옆을 끼면서 도시 전체를 둘러싼

그 시발점에 섰다.

그곳에서 도시 전체와 세인트 로렌스 강 건너편 평원에 전개된 찬란한 단풍지대가

우중에서도 빛나는 것을 조망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우산을 받으며 '지사의 산책길'을 따라내려와 상 프랭 광장에 섰다.

광장 주변에는 고색창연한 건물들도 많았지만  빅토와르 성당과 루이 14세 광장을

대표적으로 둘러보고, 훌쩍 후니쿨라(프랑스어로는 funiculair)를 타고서

높고 낮게 나누어진 이 도시의 언덕을 중심한 아름다운 예터전을 두루 탐방하였다.

 

 

 

   (후니쿨라는 등산 케이블을 뜻합니다. 뒤에 보이는 FUNICULAIRE도 마찬가지.)

 

 

퀘벡은 '강이 갑자기 좁아지는 곳'이라는 인디언 말이라고 한다.

강의 하구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센트 로렌스강이 이 곳에서만 매우 좁은 병목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병목만 보아도 넓이가 어마어마 했지만---.

 

주로 수렵에 관심을 갖였던 프랑스 사람들은 자연히 인디언들과 사이가 좋아서

오죽하면 그들과 연합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대패했고 이 때 영국도

전비를 충당하려고 식민지 뉴잉글랜드 지방에 중과세(coercive tax라고 하여서

sugar act, stamp act 등을 남발)를 하게 되고 이게 도리어 독립전쟁을 유발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든다.

 

 

 

 

따지고 보면 인디언의 땅이었으니 프랑스령이 패퇴했다고 크게 서러울 일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공연한 감상이 나그네의 심금을 적신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곳에서 작은 마을이 확장되어 지금의 퀘벡주가 되었다고 한다.

동네 간판은 내가 짝사랑해 마지않았던 프랑스어로 되어있어서 정겨웠으며

패자의 도시답게 북미주에서는 가장 좁은 골목 길에 소위 반지하가 있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나란히 낮은 처마를 맞대며 앉아있었다.

 

 

 

(맨 위에 프랑스 어가 있지만 상혼도 국제적이어서 시장에 나선 옛 애인을 만난듯---.)

 

그런데 이 콧날이 대단한 사람들은 이 역사적 건조물들을 아주 잘 유지하여서

예스런 모양을 역사성으로 가다듬고 그 속에 예술혼을 가꾸어서 이제는

세계인을 상대로 그들의 자존을 뽐내고 있었다. 

역사와 전통으로 이 패배의 땅을 갈고 닦은 이들은 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설치미술 지대로 꾸며서 예향의 본향을 만들고야 말았다.

 

일행 중에 프랑스 말을 조금 아는 수필가가 퀘벡은 원래 프랑스 식으로

'께벡'이라고 불러야한다고 모두에게 바득바득 고쳐주었다.

또한 한 많은 사람들이므로 프랑스어로 말을 해주면 매우 감격하고 고마워

한다는 사실도 덧붙여주었다.

다 아는 일이지만 그 분의 노력이 이상한 감동을 부여하였다.

때와 장소와 방법이 같은 사실에 의미의 경중을 부여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는 황산벌에서 한을 품고 죽은 '계백' 장군 생각이 났다. 

'께벡'이라는 그 분의 말에서 연유한 것은 물론이다.

전쟁에 지면 모든 것은 부인된다.

모든 가치는 파멸된다. 

적어도 한동안 일지러도---.

오랜 전통을 아스라히 간직한체 역사의 패자가 된 '께벡'이야말로 '계백'의

'황산벌'이 아닌가.

그런 황산벌 정서가 바로 예술혼으로 승화하고 미적 카타르시스를 거쳐서

이렇게 아름답고 예술적인 도시로 승화 유지되는게 아니겠는가.

 

 

 

 

 

 

 

사실 퀘벡, 아니 께벡 사람들은 신장이 앵글로 카나디언 보다도 작고

몸 전체가 가냘프다.

아직도 호텔이나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몸 작은 카나디언들을 보면

공연히 가슴이 아려온다.

이 사람들아, 담배는 왜 그렇게 피워---.

 

벌써 한 이십여년 전에는 독립에 관한 주민 투표도 있었으나 아슬아슬하게

부결되고 말았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시간 제한이 있는 방문자의 입장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서둘러 많은 풍물과 지역을 둘러 보고 또 영상으로 남겨야만 하였다.

 

 

 

 

 

거리 한복판에는 플라스크 재질의 광장 그림이 큰 벽면을 온통 장식하여서

관광객들이 몰려 서있었다.

그 앞에는 또 오래된 호텔의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200년도 넘는 역사를 동판에

인각하여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남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준수하기 그지없음을 상상할 수 있겠는데

그 유적지 옆에 비를 맞으며 이 또한 더할나위 없이 준수하게 생긴 중년의

백인 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멋이 있어서 우리 부부가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하였다.

남편은 신경의학 학회 관계로 퀘벡에 와있고 부인은 컨설턴트인

카나디언들이었다.

 

 

 

 

 

 

         (배경에 있는 풍경은 플래스크 재질의 모자이크로 된 대형 그림앱내댜ㅣ)

 

 

우리가 한국에서 온걸 알고 자기 아들이 지금 서울에서 CF를 찍고 있다고

했다.

삼성과 관계가 있다고 하며 현재 그 영상이 나오고 있다는데 우리는 중국에서

반년을 보내고 서울에서 겨우 일주일을 머물다 왔기에 그 광고 영상을 알거나

짐작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금방 친해져서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메일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방수가 된 깊은 모자와 트렌치 코트를 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트렌치 코트란 세계대전 때 참호에서 비와 유산탄을 막아내던 방수포에

다름 아니었고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아래 동네에서 윗 동네로 올라갈 때에는 후니쿠리 후니쿠라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서 고개를 올라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 속에 갑자기 유네스코 걸개 그림이 걸려있었다.

자그마한 쌈지 광장이 있고 그 옆에 아담하고 예스런 카페가 있었다.

이 복합 설치물 같은 공간이 바로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인류의 유산이었다.

안동의 물도리동과 조선 시대의 종묘 등이 유네스코 지정 인류의 문화 유산이

될때에 너무 겸손했던 마음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고개를 걸어 올라가는 양쪽에는 또 그림같은 카페와 화랑이 있었다.

어느 가게에는 섹스 숍에 가까운 상품이 걸려있었다.

그들도 솔직하였고 그걸 이 서사구조에 끼워넣는 나도 솔직하지 않은가---.

 

 

 

 

 

윗동네에 있는 화가들의 거리를 놓치면 천추의 한이 되리라.

비가 오는 날인데도 골목에는 여러 화풍의 그림이 잔뜩 붙어 있었고

그림 쟁이들이 붓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빠리의 몽빠르나스 화가의 언덕에는 물론 미치지 못하는 수중이었다.

그리고 비가 와서 진짜 화가들은 나오지도 않았고 골목을 지키는 사람들은

대개 그림을 파는 거간꾼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살아있어서 일본인 관광객들은 열심히 그림을 사는 모습도

보였다.

나도 무턱 셧터만 눌러대었다.

그림도 사지 않으면서 가짜 붓쟁이면 어떤가.

만사 일체 유심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근의 카페나 식당 입구에는 손님을 부르는 키 작은 프렌치 카나디언 아가씨들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옷매무새를 고치고 즐거워하는 순진성이

그대로 묻어나서 또다시 콧날이 찡하였다.

 

이제 께백을 떠나야할 시간이 되었다.

 

계백 장군과 황산벌의 감상을 비오는 께백 거리에 던져두고 우리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재입국하여 버몬트 주를 거쳐 뉴 햄프셔의 모텔로 들어갔다.

 

갑자기 모텔?

그랬다.

뉴 햄프셔나 버몬트의 인구가 그저 백만도 되지않는 한적한 시골 동네라서 그런

수준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날 밤,

내일이면 헤어질 일정을 아쉬워하는 이별 전야제도 한껏 고조되었다.

 

내일 일정은 큰 바위 얼굴과 마크 트웨인 기념관 방문 등등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