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일찍 밥을 먹고 가까운 타운 하우스에 있는 아들 집으로
손주를 보러 나서는데
복도의 비상 등과 비상 벨이 갑자기 요란하게 반짝이고 울리는게
아닌가.
며칠 전에는 예고된 소방 훈련을 하였는데 그게 오히려 비상 불빛과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사람을 면역시켜서
나는 그냥 빛과 소리를 무시하고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맙소사, 이럴 때 엘리베이터라니---,
로비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나서면서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 일 날 일을 무심코 한 셈이었다.
이럴 때는 훈련 받은데로, 비상 유도등이 반짝이는 곳으로 달려가서
비상 계단을 이용해야만 되었을 상황이었다.
"긴급 반출 배낭"(명칭을 잊었지만)을 마련해 놓으라는 화재 대비
사항은 애초에 준수하지 않았으니 갖고 나올 물건은 포기하고---.
하지만 이런 저런 소방 훈련의 주의 사항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엘리베이터 속에 갇혔다 나온 몸이었던 셈인데,
천행인지 만행인지 하여간 불꽃이나 연기는 아직 주위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는 엘리베이터도 멈추어야 하는데 그걸 탓해서야 무얼하겠는가.
화재라고 하는 비상사태에서는 각자가 알아서 주의 사항을 따라야
할 일이 아니던가.
등어리에 진땀을 느끼며 하여간 나는 얼른 일층 로비에 내려왔는데,
발빠른 사람들 여럿이 벌써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들은 모두 태평이어서 가만히 다시 둘러보니 그들은 무슨
사태의 전말을 이미 확인한듯 하였다.
나도 금방 분위기에 전염이 되어서 방심하고 아들네 집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는데,
열발짝도 걷지 못하여 소방차 오는 사이렌 소리가 계속 울리고
늦게 대피하는 사람들의 외침과 동작들이 뒷머리 쪽에서 느껴졌다.
이런 방심이 어디있나,
나는 퍼뜩 섬뜩한 느낌에, 발길을 도루 아파트 쪽으로 되돌렸다.
그러는 사이 허드슨 강변에 있는 소방차란 소방차는 모두 우리 아파트
쪽으로 곤두박질 치듯이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얼핏 "타워링"이니 "다이 하드"니 또 무슨 그런 불벼락 영화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때 쯤에서야 15층이나 되는 아파트의 주민들이 모두 허겁지겁
내려오고 난리들을 피우는 모습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가족들이 함께 내려오는 경우는 없었고 대부분이 혼자였다.
뉴욕 인근의 주거지에서 가족과 더불어 사는 가구가 얼마나 될까.
한심하고 보기에 민망한 노릇이었다.
생활 수준이 높은 데일 수록 혼자 사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듯 하다.
한 아파트에 두사람 이상이 살면 그들은 가족이 아니고 룸 메이트일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살붙이, 피붙이들이 아니다.
이제 다시 로비층의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보니 사태는 진정되고 있었다.
1착으로 달려든 뉴저지 소방대원(NJFD)의 신속한 조사 결과로는 다행히
false alarming인 것으로 재빨리 판단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False alarming!"이라는 기쁜(?) 소리를 듣자 내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Good exercise!"라고 외쳐서 안도하는 분위기에 웃음을 선사하였다.
동네 소방서라 그런가, 어떤 소방수는 아파트 관리인으로 있는 예쁜
히스패닉계 여성의 뺨을 부볐다.
다들 다시 웃으며 좋아하였다.
소방수들을 가까이에서 보니 모두 선한 얼굴이지만 흉터와 그을린
피부들이 많고 체격은 하나같이 우람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창한 소방 호스를 어깨에 한짐 가득 지고도 끄떡없었고
도끼를 든 사람, 커다란 해머를 들고 있는 사람 등등,
믿음직한 인상의 장수같은 장정들이었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전장의 용장에 못지않은 이 시대의 영웅호걸들
이었다.
나인 일레븐(9-11) 사태 후에 그들의 이미지는 더욱 고양되었다.
생각해 보자!
정말 불이 났더리면 이 소방수들이 모두 희생적, 영웅적으로 불을 끄고
또한 15층부터 수색을 하여 인명을 구해내는 용사들이 아니겠는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용장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나는 감격하여서 2차 대전 중의 전설적 사진 기자, "카파"나 된듯이
휴대하고 있던 디카의 셔터를 연신 눌렀다.
춥던 심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구호도 중요하지만 재난에 미리 대비하는
지혜와 실천적 자세가 부족하다는 부끄러움이 땔감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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