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상 사외이사(社外理事)로 있는 영화사 "청담 영상(주)"에서 연락이 온 것은 현충일을 얼마 앞둔 시점이었다. 현충일과 주말을 묶어서 베트남 북부, 하노이와 하롱베이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작자이자 대표이사인 박사장으로부터의 갑작스런 전갈이었다."박사장, 너무 갑작스럽지 않소?""아니야, 벌써 십여년 전 "인도차이나"라는 영화 나왔을 때부터 월남이나 하롱베이를 배경으로 영화한편 하자고 이 교수가 먼저 말했었잖아.""아 그거야 "라이 따이한", 즉 월남에 남은 우리 핏줄에 관한 내용들이 매스컴 탈 때 이래저래 묶어서 한 건 하자는 거였지---. 시사적인 것과 예술성 묶어서 내 놓으면 청룡 영화상 하나쯤 걸머 쥘 수도 있잖겠느냐---하는 당시의 전략이었어요.""이 교수! 라이 따이한 전략은 맛이 갔잖아. 우리가 지난번 잠실 롯데 민속관에서 그 쪽 대사관 사람들하고 저녁하며 운을 떼었더니 절대로 그런 영화 만들어서 양국 관계 입장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했잖소. 자기들은 거 뭐라더라, 그래 도이모이---, 쇄신인가 개방, 개혁인가 하는 정책으로 "과거를 묻지마세요"라는 것 아니었어?!. 경제만 챙긴다, 투자만 해다오---.""그건 그랬지. 지금 우리나라의 NGO에서 고엽제니, 라이 따이한이니,떠드니까 양국의 선린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그런 문제성 있는 영화는 못찍는다고 결론 났잖아.""그래서 절충안으로 남부 베트남의 호치민시, 그러니까 문제 많고라이 따이한 많은 사이공은 버리고, 북부 하노이 하롱베이를 택하여 조용히 한건 하자는거 아니요. 예컨데 이 교수. 하노이에 어떤 라이 따이한 처녀가 있더라, 그녀가 풍광 아름다운 하롱베이나 하노이에서 인터걸을 하더라. 그런데 한국에서 이 교수같은 중년이 베트남에서의 고전 한문 문화 관계를 연구하려 왔다가 로맨스 그레이에 빠진다---. 이렇게 방향을 선회하자는 것이지.""에끼, 사람 잡겠네, 아니 교수 잡겠네!"하여간 이렇게 하여서 갑자기 나와 박사장, 기획실 책임자인 정실장 이렇게 세사람의 하노이-하롱베이 여행은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이루어졌던 것이다.갑자기 이루어진 여행이었으므로 우리는 여행사의 패키지 투어에 슬쩍 끼이기로 했다. 아직 기획이 덜된 상태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을 그냥 헤메기 보다는단체 여행에 일단 합류하여 현장 답사를 하자는 생각이었다.마침 정년 퇴임을 한 젊잖은 다섯쌍의 교사부부들이 떠나는 여행사의그룹 투어에 우리 셋은 마지막 일행이 될 수 있었다.일정은 닷새였으나 밤에 떠나서 새벽에 돌아오는 여정은 말하자면 5박 3일의 관광 코스였는데, 가볍게 필드 서베이 하는 셈인 우리로서는 별로 안타까울 일이 없었고, 정년 퇴임한 분들도 방학마다 여행한 그방면의 베테랑 들이어서, 이제는 달리 갈만한 곳도 없어서 왔다는 부러운 여정이었다.도착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한 하노이 관광은 저 유명한 아침 자전거 출근 무리들과 함께 시작한 셈이었는데,한 10여년전의 베이징의 아침 풍경을 보는듯 하였다.아니 자전거 부대가 그렇다는 것이고 바람벽에 거울 걸어놓고 이발해주는 모습이나 가난한 노점상들의 모습은 우리가 한국동란에서 막 회복되던 60년대의 모습이랄까---, 그러나 관광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1년 4모작의 쌀 농사를 비롯하여 충분한 식량과 지하자원, 붕타우 해변의 석유등으로 미루어 이들이 우리보다 못한 점은 "현재 가난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가슴 서늘한 소리였다.더우기 이들은 심성이 좋아서 아직은 모든 사람들이 파업이나 데모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고 매우 상냥하고 우호적이란다. 프랑스나 미군을 상대로 싸우던 저 월맹의 용맹은 베트남을 적으로 삼은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고도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었단 말인가.아니면 제갈량도 칠종칠금했다는 이 유서깊은 대월지(大越支) 남만(南蠻) 족의 고도의 국가발전 전략인가---.사이공에서의 사업이 고국의 IMF 사태 때문에 곤경에 처해서 하노이로 올라와 관광 가이드를 한다는 마음씨 좋은 모습의 우리 동포는, 그러나 하노이가 한자로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여서 전문적 분야에 대한 신뢰는 주지 못하였다. 호텔의 자료를 슬쩍 보니 하노이는 河內라는 한자어의 현지음이었다.하노이 시내 관광은 하롱베이를 먼저 다녀 오고 그 다음 이틀간이었다.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는 고속도로로 180킬로미터였는데 시간은 세시간이 넘었다. 이유는 고속도로 자체가 우리의 국도보다도 포장이나 폭이 못한 수준이었고, 운영체계도 통과하는 동네의 차량에 편리를 제공하는 방식이어서 "고속"이라는 개념이 지켜지지않기 때문이었다.하긴 고속이 꼭 좋은 것은 아니잖은가. 이 평화롭게 논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의 고속 행렬은 무슨 소용이 닿으랴. 고속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모두 낡았는데 좀 괜찮은 차에는 어김없이 우리말이 붙어있었다. "은혜 유치원" "삼성 기업" "경희 의료원" "건국 우유", 심지어 "웨타 김삿갓"도 붙어있었다. 모두 한국차를 자랑하는 소유자들의 심사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한글 페인팅이 벗겨지면 다시 꼭같이 그려넣는다고 했다.약간 우쭐한 기분과 사장 앞에서의 업무 추진 의욕도 겹쳐서 기획실장이 아침부터 가이드에게 좀 엉뚳한 질문을 했다."가이드님, 여기 호텔에서 인터걸을 살려면 하룻밤에 얼마요?"가이드가 뒷쪽에 앉은 노부부들을 힐끗쳐다 보더니 "여기는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 아가씨들은 없습니다."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아이구 김실장이 일을 그르치네---, 영화판의 이름난 제작자 박 아무개라고 하면 얼굴은 몰라도 알만한 사람들은 이름으로 다 알고있을 것이고, 나는 또 뭔가. 영상학 전공이라고는 해도 혹시라도 대학 교수라는 입장이 밝혀지면 이 무슨 망신살인가. 영상학 전공자가 영화 제작의 사전답사를 왔다고 아무리 변명한들 말이 통할까.김 실장이 돈으로 인터걸을 살려고 했던것은 한두명을 객실로 불러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전반적인 필드 서베이를 해보자는 것이 아니었든가---.하여간 일행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으니 일이 우습게 꼬였다. 관광 가이드도 서울 본사를 의식해야하니 섯부른 뚜장이 노릇을 할 일이없으렸다. 팔자 고치는 일을 도모하는 것도 아닌데---.하롱베이는 "下龍 bay"의 현지음이었는데 동지나해 상에 기암괴석으로 된 약 3000개의 섬이 해금강을 이룬 모습으로 유네스코에는 인류 문화 유산으로 정식 등록 되어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다지만,7대 불가사의야 여행지마다 붙는 이름이어서 처음에는 과장법으로만 들어주었는데 차츰 현장으로 진입하면서 부터는 5대 불가사의에라도 넣어주고 싶은 장관이 속속 전개되고 있었다."인도차이나"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저 황홀한 감동은 실제 현장에서도 더하면 더했지 10년전의 그 황홀한 감격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다.바쁜 일정으로 낮동안에는 배를 한척 전세내어 섬과 섬사이를 누비고 또 어떤 석회암 동굴이 있는 섬은 내려서 샅샅이 구경도 하고 돌아 오는 선실에서는 선상 거래로 잔뜩산 다금바리와 상어를 현장에서 회로 쳐서 베트남 소주와 함께 취토록 마셨다.이날 저녁 무렵, 바다를 내려다보는 관광 호텔로 돌아 들어오다 보니 베트남 여자 특유의 잘룩한 허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까만 머리칼의 여자들이 메인 로비를 서성이는 모습들이 보였다.그리고 프론트 인근에는 영화, "인도차이나"에 나왔던 "까뜰린느 드뇌브" 같은 서양 풍모에 분명 관광객은 아닌듯한 인상을 주는 여자도 서성거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