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의 아쉬운 세상 나들이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원평재 2004. 5. 3. 03:18
스페인 여행의 하이 라이트 중의 하나가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인데 너무 가슴이 벅차서 그런지 글을 쓸 수가
없다.
아,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닌 독특한 이야기가 없을까---,
고뇌하기에는 대상이 너무나 엄청나다.

저 정교한 플라스코 기법의 아름다운 아랍 문양을 언급할까,
나무 대문에 깍아놓은 저 정교한 아라비아 문자의 예술적 변용을
말해볼까---.
궁전 안에 만들어 놓은 내정(파티오)의 아름다움과 분수를
묘사할까,
그 분수의 물은 일년내내 눈을 이고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에서
끌어 왔다고한다.
수백년전 시공 당시부터---.

궁전에는 正妃의 방과 또다른 왕비 네명의 방이 연달아 있었다.
코란에서는 네명의 부인을 둘 수 있고 반드시 그들은 다른 곳에
거처해야 하는데 왕궁의 경우는 조금씩 다른가 보다.

어느 때이던가, 후궁과 귀족의 자제가 눈이 맞았다가
탄로가 나서
그 부족의 일곱 청년이 모두 목이 잘렸다고 한다.
일설에는 힘센 호족 일파의 힘을 거세하기 위하여 음모를
그렇게 꾸몄다고도한다.
어느 쪽이든 슬픈 일화이다.

나폴레온이 피레네를 넘어와서 잠시 이곳을 점령했을 때,
화약과 무기를 이 궁전에 저장했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왕궁의
반이 날라갔다고 한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로 전제군주의 박해를 받는 지역에
처들어가,
피지배계급이 스스로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무혈입성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복자로 탈바꿈 하면서 마침내 민족주의적
민중의 항거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인류의 유산들만 거덜이 났다.
아프가니스탄 원리주의자 탈레반이 불상을 파괴한 愚擧와도
같이---.

알람브라 궁의 아름다운 창문으로 뒷쪽의 알바이산이란 야산을
내다보면 이슬람 왕국이 망하고도 100년을 더 버틴 아랍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장하게 버틴 100년이라기 보다는 피어린 박해의 100년이었을
것이다.



그 뒷쪽으로는 토굴이 여러개 멀리들어온다.
이날 밤 우리는 이 토굴에 들러서 플라맹꼬 춤을
구경하였다.
집시들은 아랍인들이 물러난 곳에 15세기경에 흘러들어와서
플라멩꼬 춤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었다.

검은 빛이 파랗게 도는 육감적인 여인들이 춤을 추기 직전에
손뼉과 카스타넷으로 박자를 맞추며 전주를 하였는데,
바로 그 때 아름다운 그녀들의 얼굴은 백정처럼 서슬이
퍼렇게 바뀌었다.
아니,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동물의 표정과 같이
일그러졌달까---.

Alhambra 궁전은 아랍어로 붉은 색을 뜻하여서 적벽돌로
외장을한 궁전의 색갈과 관련이 있다고도하고
피어린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둘과 모두 불가분인지도 모르겠다.

저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시에라 네바다로 부터
끌어온 물이 이 궁전의 정원을 흘러가는 소리에서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영감을 얻고 작곡하여,
안드레스 세고비아가 연주함으로써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그라나다 인근에서 태어난 세고비아는 세비야에서
클래식 기타의 기교를 연마하고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외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피아노에서 기타의 음계를 완성하고 성당에서도
처음으로 기타를 연주하였다.
"기타는 그 자체 하나의 오케스트라이다"라고 베토벤도
언급한 바 있엇는데,
피까소도 "기타라는 언어로 나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라고
화답하며 "기타 플레이어"라는 추상화를 그렸다.

"호세 라미레스"의 기타 공방 제품만을 애용한 그는 마드리드의
왕립음악원에 기타 전공을 설립하는등 클래식 기타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는데 호아킨 로드리고 작곡의 "안달루시아 환상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하고 1986년에 심장병으로
클래식 기타의 작곡가이자 연주가로서의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