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boa라고 포기하여 "리스보온"으로 들리게하는 포르투갈의 항구도시이자 수도(首都)에서
처음 관광을 한 곳은 "에드아르도 7세 공원"과 그 공원에 세워진 "세계 박람회 기념탑"이었다.
기념탑 옆에는 당시 혹독하게 몰아닥쳤던 지진으로 시가지의 반이 사라진 것을
잊지 않기위하여 부스러진 성벽을 그대로 두어서 그때의 아픔을 상징케하고 있었다.
기념 촬영인지, 증명사진인지를 막 서둘러 찍고 떠나려는데 길 건너편에 화강암을
대석(臺石)으로한 동판이 서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1999년에 작고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기념 공원"이라는 표지였다.
원어로는 "Jardin de Amalia Rodriges"였다.
그 아래 잔글씨의 내용은 인근에 들어선 유럽 최고의 다국적 백화점 기업,
"El Corte de Ingles"가 이 곳에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기념하여 작은 공원과
조각물을 전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포르투갈의 전통 가창곡인 Fado(발음은 파두)를 구슬프고도
가슴을 절단하는 창법으로 불러서 원양에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하는 지아비와 남정네를
그리며 통곡하는, 얼굴이 거무튀튀한 포르투갈 여인네들의 통절함을 가장 잘 나타낸
금세기 최고의 파두 가수였다.
우리의 남도 민요나 이미자의 애절한 트롯트 곡, 일본의 엔가 등이 여기에 맞물린다고
할 수 있겠다.
포루투갈 인들은 한 때 해양대국으로 세계를 누볐으나 그 이전에는 8세기 경부터 아랍의
영향아래 600년 이상을 지냈고, 스페인의 지배도 60여년간 받았다.
대서양의 파도와 폭풍은 해안 절벽을 때릴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나간 남정네들을 사뭇
돌려주지 않았다.
반세기의 군부독재도 이들이 말없이 받아들인 것은 이러한 가혹한 환경에 따른
운명론적 체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군부 독재가 "Three F"로 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통설도 있다.
즉 Fado, Football, Fatima(성모 발현지)를 이용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주장의 사실 여부를 따질 여우가 바쁜 여행객에게 있을리 없었으나, 하여간 이
세가지 현실이 엄존하고 지배하는 곳이 포르투갈이라는 인식론은 가파른 해안도로에서
결코 떨칠 수가 없었다.
흐르는 곡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돛배 (Barco negr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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