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있는 국립대학의 학부에서 "분자생물학과"를 나오고 또 국내
굴지의 P 공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한 제자 고정희가 뉴욕에 와
있는 강일구 교수를 찾아왔다.
강 교수는 학부에서 그녀를 가르쳤는데 지금 안식년을 맞아 뉴욕에
있는 어떤 제약 회사의 연구소에 와 있었다.
그는 원래 분자생물학이 강한 피츠버그 대학으로 안식년을 갈 계획
이었으나 말썽많은 "줄기 세포" 사건이 갑자기 터진 다음이라 폭격
맞은 곳으로 갈 명분이나 용기가 없었다.
그는 동부에 친척과 제자들이 좀 있어서 일단 마음을 정했던 쪽이라
피츠버그 대학을 포기하게 되자 근처의 다른 대학, 가령 필라델피아의
"유펜"이나 "드렉슬 대학" 같은데로 부랴부랴 다시 찾아 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나인-일레븐" 사건 이후에는 인심 좋던 미국 대학 사회도 외국인을
초청하는데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뉴저지에 있는 유명한 럿거스 대학의 농과대학을 부랴부랴
수소문하여 1년을 지내기로 초청을 받아서 와보니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는 이미 놓쳐버렸다.
실험실 얻기도 예전같지 않고하여 그는 맨해튼에 있는 생물공학 관련
회사에서 실험실을 얻어쓰는 조건으로 시료 분석 작업을 해주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칠팔년 전에 연구 교수로 왔을 때와는 세태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생물학의 인기와 연구 영역은 날로 확장되고 있는데 미국의 분위기,
또 피츠버그 대학을 피하다가 생긴 시간의 갭 등등, 이런 복병이 그의
앞에 놓여있을 줄은 몰랐다.
국제적으로는 학문과 학문이 겹치는 변경지대, 학제적 영역이 끝없이
중첩하면서 외연하는데 국내에서는 밥그릇 싸움으로 네 땅, 내 땅 편
가르기가 아직도 격심하여 오늘날 심각한 국제적 망신까지 떨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 강 교수의 입장이었다.
그가 생물학을 전공하게 된 데에는 집안 내력이 따른다.
시골 닷새장이 열리는 장터에 그의 부모는 상설 건물을 갖고 "생선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옆의 "건어물 가게"와 비교를 하여
그의 집 쪽을 흔히 "생물 가게집" 혹은 아예 줄여서 "생물 집"이라고
불렀다.
결국 어린 아이의 마음에 "생물"이라는 개념이 일찍부터 심어진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꼭 그런건 아닌지 모른다.
그는 어릴때 딱히 집안의 생업인 "생물 가게"를 좋아한 것 만은 아니
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가끔 놀리는 투로 "생물 집" 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나이에는 역겹기 조차했던 추억도 있었다.
다만 깡촌으로 가난한 시골 바닥에서 생선 가게 정도로도 부자 소리를
들었던 건 물론이고 강일구 학생만큼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없었기
때문에 크게 놀림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가 향리의 국립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에 들어간 것은 집안 사정
으로 서울행은 꿈도 꾸지 못하던 차에 농학과를 나오면 지방 중등
학교에 농업교사로 취직이 되거나 농림 관계의 공무원이 쉽게 될 수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귀띔에 힘 입은 바 컸다.
그때는 지방에서 조금 먹고 사는 정도라도 사정들이 다 그랬다.
그런데 운이 그를 따라주었다.
그가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왔더니 그 사이에 다니던 대학교의
농과대학이 분리되어서 자연과학 대학이 하나 더 생기면서 "분자생물
학과"라는 생소한 이름의 전공이 눈앞에 나타났다.
분자생물학이 무얼 전공하는 곳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는 "생물"이라는
말에 끌려서 그리로 옮겼고 결과적으로 대박이 터진 셈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나아간 그 생소한 학과의 1회 졸업생이 되었고 마침
일본 문부성 초청 장학생 시험에 합격이 되어서 명문 "교도(京都)
대학"에서 전공을 계속하여 마침내 박사학위까지 받게되었다.
돌아온 모교에는 생명과학, 생물 공학등의 전공 유행에 발맞추어
심지어 대학원에까지 전공이 생겼으며 이제 시대는 유전자
조작이니 DNA니 하는 말을 모르면 지식인 행세를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는 금의환향하는 분위기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고정희 학생이 들어온건 한 참 후의 일이었으나 그녀는 바로 강 교수
네가 생물 가게를 열었던 때에 그 옆에서 건어물 가게를 열었던
사람의 손녀 딸이었다.
그녀가 분자생물학과를 택한 것은 강일구 교수의 영향이컸다
그는 말하자면 고향 동네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난 성공 사례였다.
건어물 가게 집안의 딸이 인문계 같은 데에 특별한 다른 목표가
있었더라면 몰랐을까, 그렇지 않은 바에야 동네의 모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강교수네는 용이 난 그 개천에서 삶의 터전을 옮겼지만 고정희
학생의 건어물 집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으며 어쨌거나 그 손녀딸이
동네의 영웅인 그를 모를리 없었다.
발랄한 그녀는 학과를 지원하기 전부터 강교수의 연구실을 찾았고
동기 유발을 위한 많은 조언도 받았다.
분자생물학은 "클론"이니 "배아복제"니 하는 어휘들이 일반인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는 시세를 좇아서 대학가에서도 줏가가 자못
높았다.
대학 4년간 그녀는 미모와 발랄함으로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의 사랑도
독차지했고 대학원에는 연구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와 있어서 그녀가
모교 대학원으로 진학하리라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취동기가 높은 젊은이들의 마음의 행로는 예측키 어려웠다.
아무리 시대의 조류를 탔다고 해도 지방 국립대학의 돈 사정과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P 공대와는 시쳇말로 게임이 되지않았다.
그녀는 미련이 많은듯 표정 관리를 하더니 많은 장학금과 미래에 대한
기대 가능성을 내건 그 공대의 대학원으로 아낌없이 향방을 바꾸었다.
강 교수를 비롯한 분자 생물학과의 교수들은 망연자실한 형편이었으나
고정희의 현재와 장래까지를 생각할 때에 달리 말릴 방법도 없었다.
현재의 조건이라는 것은 대학원 장학금, 그러니까 그랜트가 등록금은
물론 숙식과 생활비까지 감당이 되는 수준이었고 미래의 청사진으로는
외국에서의 포스트 닥과 귀국후의 연구소 연구원 자리였다.
물론 장래에는 교수의 자리도 얼마든지 넘볼만 했으며 이런 여러 조건
보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연구 실험실의 최신 시설과 다양한 연구 영역
의 선택과 파격적인 연구비 지원이었다.
강 교수가 있는 학과의 실험실은 한 때 초만원의 준재들이 득시글
했으나 많은 졸업생들이 이제는 조건이 좋은 서울로 진출하였고
서울의 학생들은 해외의 유수한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면서 인력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황금기가 지나간 연구실에는 중국 조선족 출신의 학생들과 인도네시아 출신의
외국인들로 겨우 실험 인력을 채울수 있었다.
고정희는 P 공대로 간 이후에도 틈만 나면 강 교수를 찾아왔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미래의 활동 공간을 넓히는 작업일수도 있었고
그동안 정이 든 강 교수에 대한 흠모의 정도 다소 포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역동적인 성격에 매력적이고 탄력이 있는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생이 되면서 성숙한 여성이 되어갔다.
아니 칙칙한 옷으로 포장을 하고 있어서 그랬지 학부 때부터도 원래의
속성은 저희들 끼리 부르는 별명, "쓰게옷 입은 황진이"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는 졸업을 하고나서 쓰게옷을 활짝 걷어부치고 발랄한 한
사람의 여성으로 재등장을 하여 시도 때도 없이 모교를 누볐다.
그녀의 활동범위는 거의 전방위적이었다.
나이 많은 원로교수인 강 교수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래도 모양이
나쁘지 만은 않았으나 젊거나 중년의 교수 연구실에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주위에 군 말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졸업 후 쓰게옷을 벗어버린 황진이의 모습은 참으로 현란하였다.
진한 화장과 향수가 역겨울 지경이었다.
마침내 생물집 어른이 건어물집 바람난 처녀를 그냥 두어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벼르던 잔소리를 어느 여름날 오후에 대놓고 큰 소리로 해댔다.
초 여름의 옷이 너무 허술한 것도 노여움을 촉발하였다.
"정희야! 실험실에서 지켜야하는 수칙도 모르니?! 화장이나 향수를
바르고 들어올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우선 노(르)말 분석에도
지장이 오잖니. 그 곳 대학원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나?"
"교수니임---, 향수는 바르는게 아니라 뿌린다고 해요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온 몸으로 강 교수에게 엎어졌다.
그의 가벼운 옷차림을 그녀의 무거운 젖가슴이 눌렀고 대학원생들이
마침 바로 그 때에 실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뭐냐, 버르장머리 없이!"
강 교수가 소리를 냅다 질렀다.
"가까이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녀가 사람을 잡으려고 그러는지 거짓말을 해 댈 작정같았다.
"썩 나가거라. 오려면 화장지우고 실습실 가운 입고 들어와!"
평소 젊은 교수들에게 강 교수는 실험실이나 연구실에 이성의 학생이
왔을 때에는 항상 문을 개방해 두라고 일렀다.
그의 이런 수칙과 권위가 그 초여름의 해프닝으로부터 그를 보호
하였다.
이전에 젊은 교수들이 구설수에 몰리고 피해자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고정희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능수능란하였고 뭇 시선 속에서도 우호적 분위기와
사랑을 독점하며 살얼음판을 잘 헤쳐나갔다.
총명하달까,
일정 부분은 그녀의 성격이 빚는 속수무책의 장애 현상이었으나,
그런 장애 상태 위에 군림하는 빛나는 승리의 여신상이 그녀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코스 워크가 끝나고 논문을 쓰는 시점, 그러니까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는 때가 되면서 부터 모교로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녀가 다니는 그 교육기관이 여간 혹독하게 대학원생들을 수련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녀가 꽤 고전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평소 그곳에서 겪는 고전과 스트레스를 고향 마을에서 풀어왔다는
해설도 들렸다.
그런 이야기들 중에는 과장된 혹평과 악평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건 어쨌든, 어느 순간 부터 그녀의 발길이 뚝 끊겼다.
아이를 갖였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렸으나 결혼식 이야기는 없었다.
강 교수와 고정희의 관계, 아니 인연은 당분간은 대책없이 끊어진듯
싶었다.
그러고보니 그 초여름의 꾸지람이 좀 심했나---, 그녀에 대한 생각이
어쩌다 날때면 그는 심사가 편치않았다.
자기 딸 건사하기도 힘드는 세태에 옆집 건어물 가게의 손녀 딸이
화장을 심하게 하건, 옷을 벗고 다니건 그렇게 나설 일이 아니었는데,
그런 늦은 후회가 오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박사학위는 겨우 겨우 통과 되었다는 소식까지 풍편에
들으며 뉴욕으로 안식년을 떠나왔는데, 느닷없이 그녀로부터 자기도
미국에 왔으니 한번 찾아뵙겠다는 메일이 날라온 것이다.
세상이 참 신기하게도 좋아졌다.
소식 끊어진 관계이든 인연이든 "이 메일 문패"만 바꾸지 않으면 다
연결이 되게 마련이었다.
그녀와 만날 장소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있는 펜 스테이션의 매표소
앞 로비로 하였다.
그녀가 기대를 갖고 갔던 피츠버그 대학 쪽은 한국인 연구원들이 모두
귀국했거나 외부에 노출 되기를 싫어하여서 그녀는 현지에서 바람을
맞은 꼴이 되어 그나마 강 교수에게 연락을 취한 모양이었다.
피츠버그에서 오는 암트렉이 서는 곳이 펜 스테이션이었다.
이른 아침 시간에 내린 그녀는 그 사이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고
얼굴이 초췌했으나 강 교수를 만나자 목을 껴안았다.
입술을 맞추자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아니 그녀는 그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다시 뺨과 뺨을 좌우로 갖다 댈 때는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귓볼을 간지럽혔다.
미국의 젊은 사람들이 친할 때 하는 그런 동작이었다.
두 사람은 몇 블럭 걸어서 32번가의 한국인 거리로 갔다.
짐이 많지 않은게 다소 이상했지만 다행이었다.
아침 식사로 뉴욕 곰탕을 앞에 놓고 그녀가 재잘거렸다.
미국 온지는 두어달쯤 되었는데 이리저리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대학의 "포스트 닥" 과정을 알아보았다고 했다.
"그런건 한국에서 수속을 다 밟고 오는게 상례인데 이상도 하구나.
비자 리젝트가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제가 대학원에 가서는 아무래도 타교 출신이라고 구박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서 지도 교수님의 추천도 못받고 이렇게 몸으로 뛰는
거지요. 몸으로---."
"젊은 처녀가 말을 조심해야지. 몸이라는 말을 너무 그렇게 함부로
쓰지 말거라."
"저 처녀 아니에요. 이미 이혼녀가 되었어요. 이혼녀가---."
"낭패로구나. 결혼식 때는 청첩도 하지 않더니---.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구나."
타향에 살다보니 젊은 사람들이 동거를 하게 되었고 사실혼의 상태
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각자 공부에 쫓기다보니 트러블이 생기고
결국 헤어지게 된 모양이라고 강 교수는 그나마 선의로 해석을 해
보았다.
"젊은이의 생각을 내가 잘 모른다 치더라도 임신만은 조심을 했어야
되지 않았겠니---."
"한심하다 여기시겠지만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어요. 남매를 낳은거죠.
친정 어머니가 기르고 계세요. 실험실에 있을 때에 불임치료 병원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보니 남녀의 성관계라든지 그로 인해 아이를
갖는다는 데에 별로 심각한 느낌이 들지않았고 또 거리낌이 없어졌나
봐요.
윤리 감각, 그러니까 삼강오륜 같은거 말고, 생명 윤리 감각 같은 것에
마비가 왔달까요---. 어찌 그리 되었어요.
배아 복제니 체외수정이니 하는 난리 북새통에 남녀간의 섹스가
몰가치로 보였지요."
"생물학을 하는 사람이 생명 윤리를 존중해야지 그런 식으로 마비
증상이 오다니 말세로구나. 그 동안 난자 기증이니 뭐니 여자들이
너무 막 나간 것 아니냐?"
"그 부분에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할 말이 많지요.
그리고 여성들이 나선건 남성들이 망가뜨린 생명과 환경의 폐허
위에서 생명주의의 깃발을 든 것이랍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여성들의 난자 기증은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염두에 둔 숭고한 자기 희생이었지요---."
"너두 숭고한 대열에 섰다는 말이구나?"
"저희 대학원에서는 그런 일에 마구 손을 대지는 않았지요. 모두 국제
감각이 있는 분들이라 신중히 눈치도 보시고---. 그런데 서울의 병원
에 연구원으로 있는 친구들이 권유해서 저도 경험삼아 기증을 했지요, 뭐---."
"돈도 받고?"
"미국에서도 실험 대상이나 기증자는 모두 돈을 받지요."
"경험삼아 그랬다는 네 말도 답답하고, 인체의 생명 창조 메카니즘을
그렇게 산업체에서 공산품 생산하듯이 마구 뜯고 조립하고 거기다가
그런걸 숭고한 희생정신이라니 난 분통이 터진다."
강 교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식당에 있던 한인 손님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이 남녀 한쌍의 새벽 손님을 힐끔거리기 시작하였다.
"밥 먹었으면 어서 나가자. 모처럼 우드베리 구경이나 시켜주마."
강 교수는 마침 부인이 친척 집에 며칠간 다니러 가 있는 관계로
그녀의 메일을 받고 입장이 난처하였었다.
부인이 집에 있으면 곧장 데리고 들어가면 좋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전화로 빨리 돌아오라는 연락을 부인에게 해 놓았으나 저녁에나 오게
될지 말지였다.
뉴저지에 살면서 맨해튼에 차를 몰고 다닐 형편이 아니어서 매일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니 손님이 오면 안내하여 나다니기도
마땅치 않았다.
오늘도 물론 차를 갖고 오지를 않았다.
마침 우드베리라고, 뉴욕 시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대형 의류 쇼핑
몰로 손님을 태워다 주는 셔틀 버스 생각이 강 교수에게 떠오른
것이다.
그 버스의 출발지가 인근에 있었다.
한국에서 온지 얼마되지 않은 그녀이기에 낮 시간에는 그 곳이나 구경
시켜 주고 저녁에 부인이 오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갈 요량으로 그가
궁리를 한 것이었다.
"뉴욕이라고 하지만 한국 보다도 더 소문이 빠르고 무서운 곳이다.
여기 괜히 한국인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는 무슨 모함을 받을지도
몰라. 서울로부터 오가는 한국 사람 투성이이고 또 여기 교민들의
입소문도 무섭지. 또 내가 큰 한인 교회를 나가는데 그 눈총도 만만치
않아요---."
"하지만 우드베리도 맨 한국 관광객 투성이잖아요?"
그녀가 아는체를 하였다.
"너도 잘 아는구나. 가봤니?"
"아, 아니요---."
그녀가 어정쩡하게 부인을 하였다.
"그럼 잘 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지금
줄서서 올라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침 밥 겨우 먹여놓고 이제 잘
가라고 널 버릴 수도 없고---."
"그럼요, 그럼요. 우리 우드베리 가요."
그녀가 그의 팔장을 꼈다.
우드베리로 가는 버스는 가까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근처에
있어서 그들은 조금 걸어가서 금방 탔다.
리무진 버스 안에서 그녀는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하여 많은 말을
했고 그는 경청하였다.
대학에 막 들어간 딸 아이가 건방지게도 벌써 독신주의를 선언해서
놀란 가슴이기도 한 강 교수 였다.
시간이라는 참호를 방패막이로 부모와 딸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유발한 지구전을 이제 막 시작하였지만 승리의 여신, 니케아의 치마
자락은 어느쪽으로 승전의 깃발을 펄렁거려 줄는지---.
제자 고정희의 말 속에서 딸과의 전투를 위한 무슨 전략적 단서라도
포착할까, 그는 귀를 기우린 것이다.
"아까는 절 크게 나무라셨지만 제가 맨날 배아복제니 클론이니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나 참 한심하게도 쌍둥이가 나오더라구요.
저희 집이 대대로 건어물 장사를 하잖아요. 그래 그런지 실험실의
냉동 스펌이나 오붐을 다루면서 또 수정란 건조 공법 같은 것을
연구하면서 이게 다 건어물집 손녀 딸이라서 내 팔자가 된건가하고
생각될 때가 많았어요,
명색이 과학도가 팔자 타령이라니 한심하죠? 죄송해요."
"하긴 우리 모두가 성장해 온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
그게 팔자 소관의 출발점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어릴적 생물집 자식이라 그런지 이제 와서 너에게
이야기이지만 유전자 조작이니 줄기 세포에 관한 갖가지 변형 시도,
수정란 조작 같은 것을 다룰 때면 생명의 외경을 잊기가 십상이었단다.
그거 뭐 내가 어릴때부터 익히 봐왔던, 부모님께서 생선 토막치시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괴로워한 적도 많았지.
물론 일본에서 학위할 때에는 죽기살기로 공부와 연구를 하다보니
어린 시절에 보고 느낀 고생과 체험들이 큰 용기를 준 것도 사실이었
다만---.
이후 내가 종교에 깊이 들어간 것도 그런 상태에서의 탈출구였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건 그렇고 신랑되는 작자는 도대체 어떤 녀석인데 예쁜 마누라와
자식들을 팽개치고 사라졌니. 비겁한 놈이로구나."
"아니죠. 제가 출발부터 사고를 쳤어요. 학교나 학문과는 상관이 없는
비즈니스 맨인데 돈도 잘 벌고 인물도 좋고해서 제가 주도하여 그 곳
바닥이 떠들석하게 연애를 했는데 혼전 임신을 했고, 그 직후에 그가
사업에 실패를 하대요. 그리고는 술 주정뱅이가 되어서 행패를 부리고,
앗차 싶어서 결국 제편에서 헤어지고 말았지요"
"연구와 학교 생활이나 열심히 잘하지, 학자 될 사람이 그런 데에 일찍
눈을 뜨면 되겠니. 타교 출신이라서 괄세받았다는 것도 다 거짓말인
줄 내가 잘 안다. 거기 내가 잘 아는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국제화된 분들이 아니냐?"
"맞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 루틴한 실험실 체질이 아닌가 봐요. 박사
학위도 사실 연한이 차서 겨우 겨우 나왔지요."
"피츠버그 대학은 요즈음 사정이 어떻더냐? 나는 일부러 그쪽에는
가보지 않는다. 모두 원자폭탄 맞은 사람들인데 내가 방독면 쓰고가서
무얼 말하고 도와줄 일이 있겠냐. 또 내가 아는 수준의 사람들은 다
철수 했고---. 우리 기술이 원천 붕괴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껏 너무
안이하고 허술하게 해왔어."
"이제 우리나라는 하청업체가 되었다고 하던데요. 삼성이나 LG의
IT처럼 세계화해서 잘 나갈뻔하다가---."
"하청이니 원청이니 종속이론으로 따질게 아니라 빨리 세계화로 푸는
수 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어?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단위가 인류의
발전사를 주도하다가 그 다음 단계로는 회사나 조직이 그 발전의
주체가 되었는데 이제는 마침내 후기 산업사회, IT 시대가 오고나니
개인이 인류 발달사의 주체가 된다는구나.
물론 순진하게 이런 소리만 믿어도 안되겠지만 사실 젊은이들은 벌써
이런 패러다임으로 나가고 있잖니---. 우리 집에도 미래의 독립 개체,
독신녀 하나 벌써부터 키우고 산단다."
리무진은 한시간 반도 되지 않아서 우드베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한때는 일본과 한국을 주축으로 한 아시안들이 이 패션 몰의 주요
고객이더니 이제는 히스페닉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동양인 얼굴을 한
사람들의 말씨는 중국어 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 나라의 주인인 백인들은 다 어디로 가고---."
강 교수가 탄식을 하였다.
"그래도 자본 참여는 많이 했다는데요---."
"누가?"
"우리나라도 부분적으로 들어왔고 주로 유태계 미국인들이요."
"아는게 많구나. 고 박사. 여긴 처음이라고 하더니?"
"들은 풍월이지요, 뭐. 하긴 어쩌다 두어번 왔습니다. 교수님은요?"
"나도 얼마전 집사람과 와보고 이 번이 딱 두번째이다. 네게 뉴욕 구경
시켜주려고 애를 썼는데 알고보니 그럴 필요도 없었구나, 하하하"
그러면서 강 교수는 조금 게면쩍어했다.
갑자기 저만치에서 한국 말소리들이 시끌짝하게 들렸다.
한국인들을 잔뜩 태운 관광버스가 들어오며 서울에서 온 관광객들이
우루루 내렸다.
"쎄인 존으로 가야해!"
누가 소리질렀다.
구매사절단 같은 사람들의 구성이 대체로 중년의 여성들이었기에
"세인 존"의 드레시한 옷이 서울 거리에서 중년 부인들의 유니폼
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한다.
강 교수가 부인쪽 친척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구매사절단 부인들이 강 교수와 고정희를 힐끔힐끔 보며 지나갔다.
그들의 후각이 또한 매우 발달하여서 고국에서 못다한 사랑을 미국
에서 푸는 남녀들을 재빨리 파악하고 반찬감으로 씹는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고정희는 희희낙낙인데 강교수는 잔뜩 주눅이
들어서 이리로 온 것을 후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로웠다.
저 멀리에서 이번에는 안면이 만만치 않은 한 떼의 사람들이 또 몰려
오고 있지 않은가.
모두 뉴욕의 교회에서 알게된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단체로 의류 구입을 하려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연휴의 시작이었다.
"고 박사, 저기 아무데로나 좀 들어가 있게."
"왜요?"
"하여간 들어가 있으라니깐."
그녀가 골목에 즐비한 몰 중의 하나로 얼른 뛰어들어갔다.
"아이구, 강 박사님이 왠 일이세요?"
교회 합창단의 컨덕터였다.
일행의 구성을 가만히 보니 그가 다니는 교회의 코러스 단원들이었다.
연습의 사이에 이런 일탈이랄까, 휴식도 필요할 것이었다.
그러나 마주친 강 교수에게는 심리적 부담이었다.
가까스로 그들과 작별을 하고 그는 몰이 늘어선 골목길의 중간쯤에
있는 "맥스마라"로 들어섰다.
그녀는 복잡한 매장의 한 군데에 발길을 멈추고 있더니 그를 보고
반색을 하였다.
"용케 찾아오셨네요?"
"고 박사가 들어가는 곳의 간판을 보고 '맵시 몰라'라고 외워두었지.
내가 젊을 때 일본에서만 공부를 해서 영어권에서는 좀 컴플렉스가
있어. 자연히 영어로는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오늘은 고 박사가
절묘하게 들어갔어. 맵시 몰라라---, 나는 맵시는 전혀 몰라,
촌 사람이잖아, 하하하."
두사람은 크게 함께 웃다가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는 움칠 하였다.
그녀가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상품은 예쁜 보닛 형 모자였다.
특히 모자에 달린 헝겁 장미꽃이 인상적이었다.
아기자기한 그 장미꽃에다가 모자 값의 태그를 붙여놓았는데 세일
가격으로 "50 달러"라고 되어있었다.
그옆의 상품들이 모두 최하 300달러에서 1000달러가 보통이었는데
특별한 횡재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저거 하나 사 줄까?"
이런 말이 사실 평소의 강 교수 스타일은 아니었다.
특히 젊은 여성 제자에게 모자 선물이라---.
객기 치고는 좀 심한 상태였다.
역시 객지에서의 남녀 관계란 이렇게도 발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교수님, 감격적이예요. 영광이구요."
그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였다.
그는 장미꽃이 달린 모자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하우 마찌?"
그에게서는 아직도 일본어 냄새가 풍겼다.
모국어가 아니면 일본색이 붙는 병이 그에게는 있었다.
"아, 세일 가격으로 550달러입니다."
"50딸라는 뭐요---?"
"그건 헝겁으로 만들어 붙인 장미 값이죠."
캐시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모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안으로 꼬깃 꼬깃 누가 일부러 말아넣은 듯한 500달러 표시의 태그를
끄집어 내었다.
예쁜 헝겁 장미 값이 50달러이고 모자 값은 따로 500달러라는 짐작이
그제야 강 교수의 머리에 들어왔다.
무언가 부끄럽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하나 사주세요. 교수님."
그녀가 풍만한 몸을 그에게 기대며 응석 비슷한 포즈를 취했다.
"이건 아니다. 그건 내 분수에 넘친다. 또 그게 내 성의나 호의의 범위
라면 불순한 동기로 오인될 수준이구나---."
"아이, 뭐가 그러세요. 교수님이 사 주신다고 했잖아요."
"50달러 수준에서였지.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동기가 의심받을 수준이
되면 안되지."
"사주지 않으시면 저 여기서 나가지 않을래요. 여기 캐시어들 보기도
그렇잖아요."
"문 닫을 때까지 있던지 마음데로 해라. 난 일찍 버스타고 돌아가겠다."
정말 강 교수는 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어쩔수 없다는 듯이 따라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돌아가는 리무진을 탔다.
차가 맨해튼으로 들어서자 강 교수가 말 문을 열었다.
"우리 집에 재울까 했는데 마음의 여건이 달라졌구나. 그럼 어디로
갈래?"
"교수님 사시는 동네를 홈 페이지에서 보고 제가 알았죠. 저는 그 위
쪽에 한인들이 많이 사는 포트리로 갑니다. 저에게 구애를 하는 백인
남자가 거기 살지요."
"잘 되었네. 그럼 그 집으로 가나?"
"아, 아뇨. 거기 외삼촌 댁이 또 있거든요."
"미국에 아는 사람이 많구나. 어쨌거나 몸조심하거라."
"아이, 제 외삼촌 댁 전화번호를 적어드릴께요. 확인해 보세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리는 강 교수의 손을 거의 신경질적으로 밀며
그녀가 핸드백에서 메모지를 꺼내는데 맥스마라 표시가 선명한 종이
뭉텅이가 속에서 따라나오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게 무언지 강 교수는 확인할 용기나 의욕이 없었다.
하지만 모자나 핸드백의 속에 넣어서 외양을 유지케하는 보조내용물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몹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꼬깃꼬깃하게 안으로 말려들어간 500불 표시의 태그와 이 종이
꾸러미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강 교수는 짐작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 욕망의 덩어리인 고정희가 우리 돈으로 오십오만원짜리
보닛 모자를 보고 욕심이 생겼으리라.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게 고정희의 약점이자 그녀의 힘이었다.
마침 희안하게도 이중 태그가 붙은 셈인 그 모자에서 큰 가격표는
안으로 말아올리고 헝겁 꽃 값만 보이게한 다음 젖은 욕망의 눈으로
응시를하면 그는그 시선에 말려들어가서 호의를 베풀 수 밖에
없으리라.
이런 촉촉한 욕망의 시선에 말려들어가지 않은 남성은 여태 없었을
것이겠지.
그런데 태그를 말아올리는 작업을 하다가 속꾸러미가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녀는 당황하여 그걸 자기 핸드백에 쑤셔넣었다?
여기까지 추론을 전개하다가 그는 아까 식당에서 치밀었던 분노가
다시 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적어주는 전화번호는 어쨌든 받아넣었다.
전화번호는 그가 사는 곳과 똑같이 버겐 카운티의 국 번호, 201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옆으로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연하게 서늘한 그녀의 눈을 긴 속눈섭이 보호하고 있었는데
벌써 주름이 가기 시작한 깊이 패인 목덜미가 그의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그래, 사람 일을 어찌 알겠나. 전화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떤 페이소스의 감정이 물씬 솟으며 그는 분노를 눅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고대 희랍이래 비극적 감상이 항상 희극의 위에 군림해 온
그 궤적에 강 교수의 마음도 함께 한 모양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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