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명왕성이 소멸되던 날

원평재 2006. 9. 10. 09:16

아파트 동네의 입구에 "푸드 코트"라는 빌딩이 서 있다.
이름이 약간 멋을 냈지만 허름하고 낮은 "먹자 건물"일 따름이다.
혼자 사는 이결 선생은 오늘 저녁도 여기 이층에 있는 "희망 실비집"에 들렀다.
그녀는 여름 내내 콩국수로 버티었으나 가을 바람이 불자 추어탕과 칼제비 사이에서

다소 방황을 하였다.
오늘 저녁은 두가지 다 그만두고 "가정식 백반"을 얼른 시킨 다음, 몇개 되지 않는

실내의 탁자를 둘러 보았다.

넷으로 구성된 한 가족과 그 옆 식탁에 혼자 앉아있는 중년의 남자가 각각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명으로 된 이 가족은 늙은 할머니, 초로의 어머니,키가 멀대같은 중학교 상급반

정도의 여학생, 초등학교 졸업반 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 등이었고
그 옆 탁자에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몸집이 탄탄한 운동 선수
타입이었다.
멀대 여학생은 아까부터 초로의 어머니에게 무언가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고생끼가 얼굴에 잔뜩 낀 어머니는 그러나 인자한 표정과 넉넉한 거동을 잃지않고

멀대같은 딸을 다독이고 있었다.

식당의 고물 티비에서는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태양계의 행성, 그러니까 떠돌이 별들 중에서 명왕성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꽤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엄마, 태양계에는 수지화금목천명--- 그런게 있지? 명왕성은 맨 끝에 있으니까 끈이

 떨어져 날라가 버린다는거야 뭐야?"
멀대 여학생이 멍한 표정으로 멀대같이 물었다.
"이런! 누나는 정말 바보야. 떠돌이별은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순서야! 그리고 명왕성은

그 자체가 없어져버린게 아니라 워낙 자잘한 돌과 얼음 덩어리가 느슨하게 모여서

돌고있던걸 천문학자들이 별이 아닌걸로 명단에서 재껴버린거라구."

남자 아이는 누나와 달리 아주 똑똑하였다.
"그래, 난 그런 것도 못 외워! 또 무슨 말인지도 몰라. 정말 난 바보야!"
여자 아이가 의외로 소리죽여 주눅든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누나는 멀대같은게 정말 아는건 하나도 없네. 오늘 아침에는 또 초신성이

폭발했다는 뉴스도 나왔는데 못들었어? 어린이 신문이랑 인터넷에도 다 떴어!"
영악하고 영리하게 보이는 초등학생 동생이 옆에서 놀리듯 계속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 엄마에게 대들던 기세와 멀대같이 큰 몸집으로는 동생을 한대 갈길듯도

 하건만 그녀는 금방 기세가 꺽어져버렸다.

"그래, 난 바보야. 초신성은 또 뭐니?"
"그건 수명이 다한 별이야. 태양처럼 빛을 내고 또 내다가 수명이 다하면 별은 폭삭

사그라지는데 그 서슬과 무게에 큰 폭발이 일어난다는거야."
"아이구, 잘났다. 그래도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누나가 어리버리한 표정을 지으며 완전히 졌다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딸을 끌어안으며 아들을 멀리 떼놓는 시늉을 하고 조용히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너 불티강산이라는 말 아니? 시골에서 밤에 짚단으로 모기불을 놓을 때, 아니 거 왜

학교에서 하루 밤 캠프 파이어 할때 나무 등걸 쌓은데에 불을 놓으면 마침내 다 타고

푹석 무너지는 불덩어리가 불티를 온 천지에 마구 날리지 않니---. 속 빈 강정 같지만

멀리서 보면 불덩이는 그때가 가장 크게 보이지않니. 그런 것 처럼 다 삭은 별이 끝내

폭발하며 크게 보이는게 초신성이란다.
교과서와 신문을 잘 읽으면 그런게 다 나온단다---."

"우와, 우리 엄마 최고야! 엄마가 어떻게 그런걸 다 알어? 폭발하기 직전에 별이 사글어

들어서 오그라붙은걸 왜성이라고 부른데요---. 누나야, 시골 큰집에 왜성 사과 밭이

있잖아. 나즈막한 사과나무 말이야. 아, 왜놈, 일본놈 같이 자잘하게 생긴 사과 나무

말이야---."
"일본 애들이 왜 작냐? 네가 작지---. 시합붙어서 운동장에 나가봐라. 장대같은 애들

투성이다."
누나가 그 부분만은 자신 있다는 투로 동생에게 대들었다.

"진희 말이 맞아요. 일본 애들, 특히 운동 선수들은 다 크답니다. 그래서 진희같이 키 큰

아이들이 여자 축구 선수가 되어서 나라의 명예도 세우고 또 선수로서 성공도 해야

한다니까요."
옆 좌석에 혼자 있던 딱벌어진 어깨의 중년 신사는 학교의 체육 선생님이거나 스카우트

나온 체육 코치인 모양이었다.
"선생님, 다 좋은데요, 여자 축구 선수만은 안되겠어요. 얘 아버지도 축구 뛰다가

그라운드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잖아요. 그것도 억울한데 딸까지 뺐어가실려고

하다니요."
"아, 돌아가신 선배님 말씀을 하시니까 그런데요, 오히려 그렇게 진희가 대를 이어 나가는

것이 선배님의 유지를 잇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여자 축구가 전망이 밝고 장래성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진출하기도 쉽고요---."

"엄마, 나 정말 축구 할래. 수금지화목토천해명도 모르는게 무슨 공부를 해요."
진희가 또 초로의 어머니에게 대들듯 하자 축구 선생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희야! 어머니에게 무슨 말버릇이 그래. 그리고 운동 선수가 공부 못해서 하던 시절은

벌써 지났어. 예전에는 선수들이 자기 이름을 한자로 못쓰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국제적 선수가 얼마나 많으냐.
또 선수 생활이 끝나면 국제 심판처럼 국제 스포츠 계에서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그러자 마침내 할머니가 조용히 나섰다.

"선생님, 진희가 바보가 아니예요. 수금지화도 모르는게 아니잖아요. 저게 아범이 돌아간

후에 집이 가난한걸 알고 에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꾀를 쓴답니다. 저 년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요. 어멈아, 다 팔자다. 축구 선수로 키워보자. 네가 명문가의 딸로서

하필이면 그라운드에서 뛰는 아범의 팬이 되어 따라다니다가 결국 쪽박을 찬 것도
팔자듯이 네 딸을 다시 그라운드로 내 보내야 하는 것도 네 팔자 같구나."
"할머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팔자는 나쁜 뜻이 아닐겁니다.
정말 팔자 고치는 일이 될겁니다. 저만 믿어보십시오---."

이야기들이 길다 보니 언제부터 나와있는 칼국수, 칼제비, 수제비, 콩국수들이 모두

풀어져있었다.
"선생님, 어서드시고 너희들도 어서 먹자."
할머니가 채근하였다.
이결 선생도 얼핏 정신이 들어서 반쯤 식은 된장국에 수저를 담그었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남들을 딱하게 여길 처지도 아니었다.
그녀도 얼른 저녁을 먹고 다시 대입 학원에서 고된 저녁 강의를 해야할 형편이었다.

그녀가 맡고 있는 강좌는 논술 과목이었다.
국문학 박사 학위를 하고나서 이제는 연구실 지킴이와 대학 강단에서의 열강을 대망하는

젊은 여류 국문학자가 겨우 입시 학원 강사 노릇을 하는 것이 내내 한탄스러웠으나

생계를 유지하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일이 딱히 절망을 느낄 수준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이곳 저곳 대학에도 물론 몇 강좌의 강의 자리는 확보해 두어서 결정적

순간에도 대비를 하고 있지않은가.
이런 삶을 고단하고 신산하다고 생각하는건 사치라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대학 졸업반 때에 시인으로 등단을 한 사실도 그녀에게는 위안이자 자긍이었다.
4대 일간지의 신춘문예 당선 정도로 문단에 입신을 하였다면 더 바랄게 없었으련만

어쨌든 중간 수준의 계간 문예지를 통하여서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면서도 움켜쥐었다.
등단을 하고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도 시를 쓴다는 용모 준수한 청년의 프러포즈,

조금 긴 연애, 그리고 결혼이 이어졌다.
동갑내기 남편은 작은 광고회사의 빛나는 카피라이터이자 발이 빠른 영업 사원이었다.
꿈과 불타는 사랑 속에서 둘은 서른이 되었고 그리고,그리고 정말 "서른, 잔치는 끝났다".

몸으로 떼우는 광고계를 우습게 본 남편이 광고회사를 하나 차리더니 이윽고 부도.
중국으로 도망을 간 그는 처음 열심히 소식을 전해왔으나 일년이 지나자 생사와 안위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소식 두절.
일찍이 아이라도 하나 만들어 둘껄---, 간절한 그녀의 소망에 친정에서는 큰일날뻔 했다고

펄쩍 뛰었다.

벌써 십대 말의 나이에 신춘문예로 등단까지 하여 파문을 일으켰던 청년 시인은 한때

광고계의 총아로서 큰 주목을 받았으나 끝내 태양과 같은 혹성이 되지 못하고 행성의

반열에서도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순서로 떠돌이 별의 끝까지 밀리다가 마침내 이제는

명왕성처럼 소멸되고 있었다.
생성과 소멸이 자연의 법칙이겠지만 남편의 부도와 소멸은 사실 광고계 사람들이 만든

사기극에 신출내기 젊은 시인이 말려든 꼴이었다.
행성의 크기로 자라기에는 아직 세월이 먼 작은 돌덩어리 군집체를 명왕성이라는 별의

이름으로 불러준 사람들이 "켈러스"니 뭐니 다른 소행성 집단도 행성으로 추가한다고

떠들다가 느닷없이 명왕성까지 소멸시켜버린 작태와 비슷하였다.

문득 이결 선생은 얼마전에 인터넷 카페에서 사라진 "강변 마을"이라는 시 동호인 카페를

떠올렸다.
그녀가 계간 문예지로 등단을 하자 그 카페에서 초대가 왔다.
당시 막 생긴 시인들의 카페라고 하였다.
등단 작가와 아직 미등단한 시인 열망생들이 참여한 순수 시 문학 카페였다.
마땅한 발표 공간이 항상 부족한 젊은 시인들에게 인터넷 카페의 광대무변한 공간은

신천지이자 축복이었다.
신인인 이결 선생에게도 이 "강변 마을"은 따뜻한 고향마을이었다.
남편이 중국으로 도망을 간 이후에는 더더욱 이 마을이 요긴한 우체통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은 신분이 들어났다는 핑계로 카페로부터 가출인지 탈퇴인지를

해버렸고, 시인들 사이에는 자기 시에 대한 조회수 조작인가 뭔가하는 치사한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더우기 이결 선생의 가정이 남편의 부도로 파탄 국면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돌면서 때때로

뜨는 위로사 같은 답글도 그녀에게는 고까웠고 마침내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유혹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카페 출입을 그만 두었지만 탈퇴는 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는 망부석이 되어 그 마을에 버티고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저녁을 먹으러 오기 직전에도 그녀는 사무실의 인터넷으로 "강변 마을"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달까, 안타깝다고 할까,
카페 주인의 선언이 대문에 대문짝만하게 떠있었다.
"카페를 폐쇄합니다. 사흘간 여유를 드릴테니 필요한 시인들 께서는 자신의 작품을

퍼담아 가십시오."
내분과 스캔들의 결말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선생님, 빨리 오셔요. 시작 시간이 지났어요."
여학생 하나가 달려와서 이결 선생을 빨리 오라고 하였다.
학원 건물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래,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구나."
그녀는 "희망 실비 집" 문을 잰 걸음으로 나섰다.
아까 여자 축구 선수를 탄생시킨 가족들도 희망을 안고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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