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떤 수필가와 인사동에서 만났다.
그는 "월간 수필 문학"을 통하여서 등단하였고 개인 수필집과 함께 수필가 동인지도
몇차례 주도적으로 발간하였으며 "한국 수필가 협회"의 회장도 역임하였으니
"수필가"라는 칭호가 딱 들어맞지만 그렇게만 부르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
그는 사관학교를 나왔고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무관 자격의 해외 정보통으로 활약
하였으며 대통령 시해 사건 때에는 피의자로 구금되기도 했다.
한달 후, 무혐의로 석방된 다음에는 지금은 해체된 대기업의 임원과 CEO를 거치게 되고,
현재는 알만한 기업의 고문과 사외이사 등을 맡고있다.
그는 해외에서의 인연을 바탕으로 어떤 중동 석유 재벌의 배타적 한국 에이전트로도
활약하고 있는데 돈을 벌려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문화 교류에 더 관심이 많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모습은 항상 이런 식이다.
사람이 돈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에게서는 돈 냄새보다는 활자 냄새,
유화냄새, 그러니까 문화의 냄새가 항상 풍긴다.
이런 그를 무어라고 불러야하나---.
"딜레탄트",
그래 좀 낯 선 표현이지만 이 말이 딱일 것 같다.
그와 내가 흐린날에 인사동에서 만났다.
나도 대 기업의 해외 지사를 돌며 평생 밥을 먹었지만 크게 출세를 하거나 대단한
업적을 내지는 못하고 퇴직을 하여 그동안 아내가 틈틈이 하고있던 양재동 꽃 마을
화훼 위탁 판매 사업과 꽃 배달을 하고 있다.
그와 나는 충청도 어느 향리의 동향이라는 인연과 서로 비슷한 나이, 내 꽃가게의
꾸준한 고객, 그런 정도의 공통분모 밖에는 없다.
그 외에는 온통 다른 구석 뿐이다.
나는 술을 입에 대지만 그는 금주론자이고 나는 삼겹살을 좋아하지만 그는
베지테리언,
그러니까 식물성 음식 예찬론자이다.
그가 "건달 불자"라고 자신을 말할때 나는 "날라리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종교적으로도 그렇고 그렇게 다른데,
그런데도 우리가 가끔 만나서 즐기는 근본 동인은 어디에서 나올까?
아무래도 우리 둘이 공유한 그 딜레탄트 기질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가 하는 일은 화훼 위탁 판매라고 하였지만 사실 화원 안의 꽃 관리는 이런 일에
백전노장인 아내가 일하는 사람 하나를 데리고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배달이야 전국 규모로 아웃 소싱 조직을 이용하여 해결하고 있으니 정작 내가 할
일은 고객 확장, 아니 그런 공격적 표현은 맞지않고 그저 확보된 고객의 유지 차원
정도여서 내게는 시간이 많았다.
다시 말하지만 대기업에 있을 때 내가 쌓은 안면으로 우리 가게는 사무실의
정기적인 화분 교체, 임직원들의 때맞춘 화환 및 꽃바구니 주문 등을 전업으로
삼아서 먹고 살고 있다.
나와 그,
두 딜레탄트는 이날도 문득 아무런 목적없이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장소는 "고촌(古村)"이라고하는 크지 않은 화랑에서였다.
사실 그 화랑의 건너편에는 국내 굴지의 어떤 기업 본사가 있는데 "고촌"은
그 기업체 본사의 정문 보다도 추녀가 낮은 작은 건물에 강렬한 인상의 그림들을
빼꼭히 채워놓은 작은 그림집이었다.
내가 안국 역에서 내리는 지하철을 잘못 바꾸어타서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그는
고촌의 여사장으로부터 녹차를 이미 대접 받고 있었다.
이 그림집 이야기는 그로 부터 가끔 들었지만 내가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반야(盤若)라고 하는 이름의 녹차인데 한번 드시죠?"
중후한 인상의 그림집 여사장이 마침 물을 끓여 찻잎에 부으며 내게 권유하였다.
"사제품 같군요?"
내가 알은체를 하였다.
"네, 잘 아시는군요. 이름 있는 스님이 생산하여 주신 사제품이랍니다. 향이
독특합니다."
아하, 여기 조계사가 있지 않던가.
나는 "반야"의 미묘한 차향을 음미하면서 한 잔을 예의상 비워내고 내 취향으로
다른 차를 요구하였다.
"제가 녹차 앨러지가 있어요. 발효차를 좋아합니다만---."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잘 아시겠지만 보이차로 하시죠."
"그것도 스님이 주신건가요?"
나와는 친구 사이가 다 된 그가 농담을 섞고 싶은 시선으로 물어보았다.
"네, 오래 발효된건 못되지만 향이 부드러워서 위에도 부담이 가지 않고 좋아요."
내가 힐끗 내 친구의 입술을 보았더니 그는 무슨 예리한 농담을 만들다가 웃음으로
지우고 있었다.
첫물은 따루어버리고 우리는 새로 우려낸 두번째를 음미했는데 보릿집 냄새도
심하지 않고 아주 좋았다.
"내가 갖고 있는게 한 50년 된건데 너무 독해요. 이게 훨씬 더 좋은데요."
아첨이 되지 않는 선에서 내가 그림 집의 보이차를 칭찬하였다.
"네, 발효차라고 오래된게 모두 좋은건 아니라네요. 또 너무 딱딱하게 붙어버린건
보관중에 빗물이들어간 것일 수도 있고 일부러 물을 부어넣어 발효를 촉진한 것도
있다고 하네요."
"아이구, 그렇겠군. 쥐나 고양이 오줌도 막 들어갔겠소."
내 친구가 기어이 한 농담을 끼웠다.
보아하니 이 딜레탄트 양반이 발효차 같은데에는 식견이 없어서 대화에 조금
싫증이 난듯 싶었다.
"고촌"에는 이 여 주인의 남편되는 분이 그린 강렬한 색채의 그림도 몇점 자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 친구, 딜레탄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화가의 솜씨가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나는 그림 보는 눈이 그리 높지는 못하다.
우리는 보이차를 마시고나서 낮은 추녀의 그 그림 집을 빠져나왔다.
"이 보시오! 아까 보이차 이야기에 쥐 오줌, 고양이 오줌을 끼워넣을건 뭐요, 하하하---."
내가 길 거리에서 웃으며 그를 힐난하였다.
"에이, 그 여주인 이야기가 조금 길어서 한 농담 끼운걸 갖고 뭘---, 하하하."
"그래도 그렇지. 난 아침마다 그 보이차를 마시는데 그럼 맨날 쥐 오줌이나 마시는
사람이네."
"사람 오줌도 아니고 동물 오줌인데 뭘---. 정력에 좋다면 박쥐 똥도 먹습디다.
하하하."
"박쥐도 똥을 눕니까? 하하하."
흐린 날이라는 것도 잊고 우리 둘은 오래 크게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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