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팩션) 어버이 날에---

원평재 2006. 5. 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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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빌리 부낸저(Billy Buenanza)"라고 한다.

학교에서 백인 학생들은 "비비(BB)"라고 불렀고 히스페닉 친구들은 "뻬뻬"라고

하였다.

푸에르토 리코 출신인 내게는 "뻬뻬"가 더 듣기 좋았으나 미군 GI로 입대하고

부터는 육군 이등병, 그러니까 Army Sfc때나 Pfc때나 모두 "빌리 부낸저"라고

정식으로 불렸으며 나는 그 정식 명칭이 좋았다.

 

나는 말을 배우는 데에 재주가 있어서 한국에 배속 되자마자 한국어를 금방

많이 습득하여서 8군 HID에 배속이 되었고 대우도 잘 받았다.

한국어에 존재하는 존대말, 그 수직적 개념은 내가 한국인들을 사귈 때에 그들이

나에게 추가로 부여하는 일종의 존칭사, 가령 "빌리 선생님"같은 데에서 잘

묻어나서 백인 병사들로부터 받는 나의 일종의 열등감을 씻어내기에 충분한

바가 있었다.

 

내가 배속된 HID는 의정부에 있어서 근무지는 의정부 시내였고 영외 활동이

자유로운 편이어서 시내 영어 회화 학원등의 자원봉사 영어 교수, 정확하게는

강사 노릇도 하다가, 마침내 한국인인 내 아내도 사귈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의 집은 의정부 시내에서 무슨 장사를 하는 별로 넉넉지는 못한 집안

이었으나 아내는 전문 대학을 다니는 매우 근면하고 똑똑한 한국 처녀였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였고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고 후회도 없다.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도 우리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서 주위에서는 혹시 아내가 양색시

노릇을 하다가 무슨 불치의 불임증이 생기지나 않았나 의심을 하기도 하지만

참 억울한 노릇일 뿐이다.

참한 여대생이었던 아내는 처녀를 나에게 바쳤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올 때에는 장모님을 동반하였다.

장모님은 우선 조지아의 닭 공장에 도계공으로 취업 이민을 와서 일년간 그

무거운 장화를 신고 닭 목을 비틀었는데 장인님은 결코 미국으로 오지 않겠다고

하여서 그 어려운 이민 수속을 쉽게 통과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장모닙과 장인님은 십년 이상 별거를 하며 지냈는데 10년이상 미국에서

세금을 낸 장모님은 지금 뉴욕의 플러싱에 있는 한인 양로원에서 메디 케어

치료는 물론이고 연금도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장인님은 최근 치매에 걸려서 서울의 은평구에 있는 "시립 서북 병원"에서

치료를 빋고 계신다.

항상 그 곳에만 입원하는 것은 아니고 규정상 또 다른 시립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왔다갔다 해야 하는 모양이다.

무료도 아니고 한 달에 2500불 정도의 입원비도 내고 간병인도 따로 두는

모양이니 비용이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시립병원은 그나마 입원 비용이 좀 싼편이어서 한 곳에만 오래 있을 수는

없고 왔다갔다하는 편법을 쓰는 모양인데 참으로 불합리한 제도같다.

미국 처럼 보험회사에서 돈을 다 내고 "너싱 홈"에 평생을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장인님이 장사를 하던 건물에서는 그나마 월세가 꽤 나와서 병원비를 댄다고 하지만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비용을 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최근 삼년간, 일년에 한번쯤은 미국으로부터 와서 장인님을 방문하였다.

특히 가급적이면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가까이 걸쳐있는 오월 이맘 때쯤을

방문기일로 택하였다.

장모님은 플러싱의 "너싱 홈"에서 한국 출신의 어떤 영감님과 재미있게 지내면서

한국 나들이는 생각도 안하신다.

우리만 한번씩 나오니까 주위에서는 노랑머리 효자  났다고 난리가 났다.

한국에는 처남과 처제들이 좀 있는데 우리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서나마 선물을

많이 사가지고 온다.

우리는 이 방문을 "오월의 한국 행사"라고 부른다.

 

올해에도 우리는 이 한국 행사를 위하여 지금 막, 서울에 왔다.

"시립 서북병원"은 우리가 최근, 자주 찾아와서도 그렇겠지만 어쨌든 내가 이름을

정확히 기억한다.

미국식으로는 North-West General Hospital인데 한국어에서는 북서라는 방향 축을

바꾸어서 서북 병원이라고 하기에 내가 잘 기억을 한다.

서북 병원은 최근에 완전히 새로 재건축을 하였다.

꾀죄죄하던 건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건립되니까 그 전에 이곳을 들리면 슬픈

느낌부터 나던것이 확 달라져서 기분이 좋다.

 

올해에는 오층 건물에 장인님이 입원을 하고 계셨다.

창 너머로 붉은 색갈의 철쭉이 피를 토하듯 온 산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전 어떤 해에는 좀  이른 계졀에도 왔는데, "남쪽 한국"의 국화라던가,

아니지 "북쪽 한국"의 국화라고 하는 진달래가 병원 옆 산허리의 그늘 쪽에 

비실비실 꽃 잎이 찢어지듯이 피는게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조금 늦게 찾아온 올해에는 예년과 달리 화끈하게 피를 토하며 철쭉이

피는게 참 신통한 느낌이 든다.

 

미국의 워싱턴 DC에서는 자주 북한 인권에 대한 데모가 벌어지는 것을

티비로 본다.

그런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모두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왜 이렇게 코리아의 일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북쪽 한국인지, 남쪽 한국인지도 잘 구별 되지 않는 나에게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인권이 어떻고 설명을 한다.

 

하긴 아내의 가족들은 한국 전쟁 때에 모두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자유를 찾아서 왔다고 한다.

처제 중의 하나는 일본으로 시집을 갔고 또 하나는 카나다 사람과 결혼을

하여서 서울에서 산다.

처남 하나는 월남에 있는 한국 공장으로 책임을 맡아서 갔는데 아무래도 월남

처녀와 결혼을 하려는 모양인데 장인님에게 허락을 신청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장인님이 일찌기 미국 시민의 집안과 통혼을 한 국제적 안목이 있는 분이지만

동남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처녀 집안과는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의 보편적 생각이야 아니리라고 믿고싶다.

어쨌든 국제 결혼을 한 이 집안의 내력에는 북으로부터의 공포가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미국에서 해마다 칠월달에 벌어지는 "푸에르토 리코의 날"에는 미국기와

다른 푸에르토 리코 국기를 차에 꽂고 행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서북 병원의 장인님이 입원한 큰 병실에는 환자가 네명 있었다.

환경은 솔직히 플러싱의 양로원 보다 훨씬 좋았다.

새로 지은 병원의 입원실은 한국에 있는 작은 처남의 안내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이구 아버지---, 엉엉엉, 어버이 날에 제가 왔어요."

아내가 엉엉 울었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유난스럽다.

키는 작아도 엉덩이가 유난히 큰데 그것이 들썩들썩한다.

따라온 처남과 처남 댁, 그리고 선물을 염두에둔 가난한 친척 몇이서 이

거대한 행사의 관객이 되었다.

아, 같은 입원실에 함께 입원한 환자들과 그 가족들도 같은 관객이었다.

내가 왜 "거대한 행사"라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내의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처럼 좀 과장이 섞인 행사 때문인지 모르겠다.

 

"댁은 누구세요?"

장인님이 슬피우는 딸의 얼굴을 재쳐올리고 엉뚱한 말씀을 하여서 모두들

낄낄거렸다.

해마다 있는 일이다.

"제가 아들이 되었으면 이렇게 무심치는 않았을텐데요, 아버지---."

아내가 또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아들도 똑 같애요."

장인님이 어린이처럼 또 말대꾸를 하여서 웃음이 다시 일었고 아내의 울음은

더욱 구슬퍼졌다.

 

어느 순간이던가, 아내는 울음을 갑자기 그치더니 갖고온 선물 구러미를

풀어서 정교하게 나누었다.

나는 장인님의 여윈 손목을 잠시 잡았다.

처남 댁이 과자와 과일을 갖고 왔다.

"우리 그거 먹을 시간 없네."

아내의 말은 단호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드시고---."

처남 댁이 머뭇거렸다.

"아니 시간없다니까. 그 보다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다. 여보 빌리, 일어나요."

그녀는 미안해서 과일을 집는 나를 채근했다.

우리는 곧바로 병실 문으로 나섰다.

 

"인사라도 한번 더 하시죠. 누님."

처남이 우리 둘에게 권했다.

"인사 다시 해도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르신다. 우리는 빨리 갈련다."

아내의 서슬에 나도 계속 따라나왔고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합동 작별을

고했다.

대절을 해 둔 차가 시립 서북 병원 주차장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여의도 성모 병원의 바오로 관으로 갔다.

건강 검진 센터인 바오로 관의 로비에는 간난 아이들이 여럿있었고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얼르고 있었다.

주사실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앤드루는 어디에 있지요?"

아내가 안내에게 물었다.

"아, 예방 접종을 다 맞고 대기실에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강보에 쌓아서 인계

하지요."

"네, 우리는 베이비 트랜스포터를 쓰지않고 항상 직접 인계 받아서 데려가니까요

잘 조치해 주세요."

 

불임 판정을 받고 우리는 벌써 세명째 한국 고아의 입양을 하였다.

아내의 의지가 무어니 무어니 해도 강렬하였고 미국의 세금 제도가 입양을

할만 한 제도로 보살펴주고 있었다.

까다로운 내 고향보다 한국쪽으로 혈통을 일치시킨 의미도 있었다.

이제 금년으로 토틀 세명,

내년도 어버이 날에는 한국에 나올 일이 없을듯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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