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월드 컵 축구 탓

원평재 2006. 6. 17.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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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식이 오빠를 다시 만난건 월드컵 축구 탓인지, 덕분인지 하여간 그랬다.

세상에 탓할게 있다는건 축복인가 보다.

엊그제 저녁, 우리나라와 토고가 축구를 한다고 해도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2002년 월드컵 때에도 나는 별로 감동이 없이 지냈다.

축구가 우리같은 사람 먹여살릴 일 있나---,

그때만 해도 우리 이용원 밀실에는 맛사지만하는 전용 아가씨들도 둘이나 있었고

면도사도 시다까지 역시 둘이었는데 모두 축구 때문에 거리로 뛰어나가서 사실

영업에 적지않은 지장이 있었다.

더우기 손님도 월드컵 기간에는 뜸해서 이용원은 이래저래 한동얀 폐업상태나

마찬가지였었다.

 

그뿐아니라 그때는 또 집의 아이들이 여름 감기까지 걸려서 한 보름을 그

뒤치닥거리로 나는 정신이 없었다.

영감은 월드컵 승리를 핑게삼아 어디에선가 맨날 술만 퍼마시고 늦게 들어왔었다.

월드컵 좋아하시네---,

이게 당시 내 입에 붙은 말이었는데 내 비아냥과는 달리 우리나라가 뭐 4강에 까지

올라버렸으니, 내 험구는 자고로 효염인지 효험인지가 없나보다.

 

이번에도 내 입장은 비슷한 편이다.

아이들은 이제 사년전 그 때보다 모두 커서 큰놈은 시청 쪽으로 진출을 하는 것

같았으나 말릴 수가 없었고, 막내도 학교 체육관에서 단체 관람을 한다고

저녁을 먹고는 휭하니 나가버렸다.

 

영감은 무슨 고기집에서 동네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축구를 단체로 본다고

며칠 전부터 나에게 선포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면 이어서 찜질방으로 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겠다는 것이었다.

승패에는 관계없이---.

 

우리 이용원에는 이제 미발사와 면도사가 각각 한 사람 뿐이다.

퇴폐 밀실 이용원 시절도 이제는 한물가서 단골이 오면 "보도방"에 연락을 하여

아가씨를 조심스레 불러다준다.

우리 이용원 전속의 면도사는 밀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면도만 밀어준다.

일반적인 건강 안마나 지압 서비스는 밝은 홀에서 공개적으로 한다.

손님들의 수준도 모두 고급, 국제화 되어서 중국의 서안이나 연변, 그리고

베트남에서 단련한 몸들이라 이런 장사도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라 점점

국제적 경쟁이 치열해지고 인력도 달려서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를 판이다.

점잖은 사람들은 이제 이용원으로 오지 않고 미용실에서 카트만 하고 가는

풍속도 이젠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 전속 면도사는 나이가 삽십대 중반인데 혹시라도 다른데로 갈까봐

상전 모시듯하고 있다.

더구나 그녀는 지압에 특기가 있다보니 면도 후 밝은 데에서 잠시 서비스

해주는 손 맛으로 우리 이용원에 손님을 많이 끌고있다.

그녀도 역시 빈포가 고향인데 과거는 잘 모르겠고 지금은 혼자 산다고 한다.

축구가 있는 날 그녀는 이웃한 헤어 숍의  미용사 아가씨 둘을 우리 이용원으로

데려와서  함께 월드컵 몸 치장을 하였다.

어디에서 사왔는지 흰색 바탕에 붉고 푸른 "또랑"으로 얼굴에는 형형 색색을 다

부리고 훤히 드러난 등어리 판에는 구멍을 숭숭 뚫은 플라스틱 판을 깔고

칼라 스프레이를 뿌린 다음, 그 판을 떼니 네모난 바둑이 문양이 좍 나타났다.

 

"언니야, 펄을 발라야지~~~."

미용사 아가씨 하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년아, 조용해라. 내가 알아서 다 사왔잖아."

우리 면도사가 펄을 붓으로 찍더니 미용사 아가씨의 그 바둑이 등판 위에다가

척척 발랐다.

"이건 야광 펄이야. 밤에도 삐까번쩍이란 말이다!"

"역시 언니 솜씨, 아니 손맛은 기똥차다니까, 까르륵!"

미용사 아가씨들이 겨드랑이의 털을 전기 면도기로 밀면서 죽겠다고 웃었다.

 

"아이구, 무슨 보디 페인팅인가 하는 큰 공사 같네."

내가 흥미를 보이며 거들었다.

"사모님, 사모님도 같이 가요! 사장님도 아이들도 다 나갔는데---."

면도사의 말이었다.

"미쳤네. 난 여기 셔터 내리고 집에 가서 일찍 잠이나 잘까하네요---."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사실은 내것이 아니고 큰 아이가 쓰던 것인데 이 녀석에게는 영감이 DMB라는

것을 새로 사주고 남은 땡처리가 내 차지였다.

아이가 영어 사전 기능이 있고 회화 공부를 하기 위하여서는 필수라고 하여서

비산 것을 덜컥 영감이 큰 돈을 쓴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영감은 영어라고 하면 사죽을 못쓴다.

여기가 용산 삼각지가 아니던가.

아니 강남은 더하다고 하지.

 

하여간 핸폰인지 손폰인지 휴대폰이 왔다.

"언니, 운동하러 가요."

나윤이, 정나윤이로 부터 온 전화였다.

그녀는 빈포 출신으로 여기 면도사로 왔다가 미군 하사와 결혼하여 미국 사람이

된, 내 초등학교 몇년 후배였다.

부부가 일단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남편이 다시 군속이 되어 용산으로 오면서

이태원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남편은 허구한날 영내에서 지냈고 무료한 여인은 춤도 추러다니고 술도 마시고

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미군 PX에서 못 구하는게 없었다.

머리가 좋은 그녀는 문화와 교양 수준도 높아서 그런 방면에 갈증이 많은 나에게는

일단 선배이자 선생이었다.

운동을 하러 가자는 것은 춤을 추러가자는 소리였다.

 

"언니, 3만원을 둘이 나누어 내면 저녁나절 내내 음악듣고 맥주 한잔 하고 몸 풀며

운동하는 거라요. 내 만보계에 딱 만보가 찍힌다니깐."

나도 영감이 술타령을 할 때에는 이태원의 아리랑 나이트에 몇번 나윤이와 나가서

운동을 한 바가 있었다.

내가 춤은 잘 추지 못했지만 그 분위기, 또 부킹을 바꾸어 하면서 접하는 새롭고

멋진 남자들의 매너는 정말 죽여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나 나윤이는 한계를 알았다.

그곳에 나오는 번지르르한 남자들의 속내에는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환상 세계의

티끌 하나 건질게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꿈많은 나윤이가 몇차례 사랑에 속은 체험담으로부터, 그리고 저 흔한 테레비

연속극에서, 그리고 말하면 무엇하랴, 춘식이 오빠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는 그래서 가끔 성인 나이트의 휘황한 불빛 아래로 진출하였지만 사실 그곳을

조명이 잘된 야간 헬쓰 클럽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만 여기며 지냈다. 

밖에서 차소리가 났다. 

나윤이가 머스탱을 몰고 나를 데리러 왓다. 

전에 쓰던 뷰익을 처분하고 날렵한 새차를 산지 얼마 되지 않았다.

월드컵 아가씨들은 벌써 거리로 나가고 없었다.

 

"언니, 오늘은 동부 이촌동 쪽으로 가봅시다. 새로 개장한 물 좋은데가 있어요---."

"동부 이촌동이라---?"

마음에 무언가 짚히는 데가 있었으나 나는 그냥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다.

차가 강변을 조금 누비다다 큰 교회, 그러니까 온누리 교회가 있는 쪽으로

접어들었다.

이 근처에 유명한 피자집이 있어서 전에 아이들과 자주 들리던 생각이 문득났다.

 

"우와!"

우리는 눈 앞의 광경에 함께 함성을 질렀다.

그 큰 교회 앞 네거리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붉은 악마들이 미어터지게

몰려앉아서 "대~한 민 국"을 연호하고 있지 않은가.

그너머로 새로 지은 빌딩이 보이고 만국기가 휘날리며 새로 개장한 성인 나이트를

선전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머스탱은 야생마라는 뜻과 달리 한발자욱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일 났네."

자칫하다가는 군중 속에서 차가 망가질 우려까지 없지 않았다.

"어이 비켜요, 비켜!"

갑자기 몸이 잘 빠진 중년의 사내가 인파를 물리치며 우리의 빨간색 야생마 쪽으로

다가왔다.

"앗, 춘식이 오빠!"

내가 소리를 지르며 나윤이를 노려보았다.

"킬킬킬~~"

나윤이가 웃고 있었다.

"네년 작난이구나!"

"어때, 언니를 한번 만나보자구 얼마나 조르던지---."

춘식이 오빠는 능란하게 우리의 길을 틔어주었고 야생마는 그 덕분에 한걸음 한걸음씩

만국기가 휘날리는 곳으로 전진할 수가 있었다.

 

새로 생긴 나이트 클럽은 넓은 내부에 스테이지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형이었다.

그 원형 아래에는 전라의 남녀들이 껴안고 있는 입상들이 있어서 춤추는 연인들이

그 사이 사이에서 진한 키스들을 하고 있었다.

아니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월드컵 축구날, 특히 토고와 우리가 붙는 역사적인

저녁에 손님이 있을리는 없었다.

그저 몇 쌍이 이른 저녁의 무료를 달래며 스탭을 밟는 분위기였는데 이들도 축구가

시작되면 모두 밖으로 나갈 사람들 같았다.

내가 이십년 만에 만난, 한 때 몸을 섞었던 사내를 앞세우고도 새로 생긴 나이트의

홀이나 감상하고 있는 꼴이 스스로 생각하여도 조금 웃으웠다.

 

"양 여사! 우리 조용한 룸으로 들어갑시다. 나윤씨도 이리 따라와요."

춘식이 오빠는 잽싼 걸을걸이로 별실이 있는 쪽을 향하였다.

"그냥 여기 홀에 앉아요."

내가 조금 큰 소리로 우겼으나 그는 내말을 내숭떠는 정도로만 여기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너 쪽의 별실 문을 들어섰다.

문을 열고 안내해 준 것은 물론 "웨타씨"라고 하는 웨이터들이었다.

 

"양 여사! 정말 반갑소이다. 밀린 이야기도 많고 해서 내가 특별히 조용한 별실을

예약해 두었지. 이리와요 양 여사! 정말 반갑네."

"양 여사란 소리 그만 해요. 속이 느글거리고 울렁거리네요. 그리고 반갑소이다가

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오빠가 하나도 반갑지 않네요. 그리고 무슨 말씀 했는지는

몰라도 저기 나윤이가 오해하겠어요. 소문이 두렵소."

"하하하, 항개도 안반갑다니 오히려 나윤씨가 오해하겠소. 나하고 무슨 감정이

있는줄 알고---. 하하하. 어쨌든 그렇게 냉정해도 나는 반갑기만 하구려."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너스레로 무마하였다.

맥주와 과일 기본이 들어오자 그는 국산 양주를 한병 따로 더 시켰다.

"언니, 빈포 총동문회 모임에 나오면 벌써 만났을텐데 고집 피우고 안나오다가

이제야 옛 사랑을 만나보네요. 호호호."

"이년아, 너 형부가 오해하면 나 쫓겨나는 줄 알지. 말을 조심해라."

"아이구 난 모르겠소. 홀에 나가서 춤이나 한판 돌고 올께요."

 

이제 별실 룸에는 그와 나만 남았다.

그가 내 잔에 맥주를 부어주고 자기 잔에는 양주를 따루어 달라고 내밀었다.

"싫소. 자작으로 하시오."

처음에 나는 그런 식으로 까탈을 부렸으나 이내 술이 몇잔 돌자 그런걸 따지는건

다 부질없는 노름 같아서 그에게 술을 따루어 주었고 그러는 사이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꽉 쥐는 손에 힘이 느껴져서 맥빠진 영감 생각이 문득났다.

그의 손 힘은 예로부터 동네 최고라서 팔씨름도 항상 최고였다는 기억까지

솟아났다.

팔의 힘만 전달 되는게 아니라 손바닥의 뜨거움도 여전했다.

 

"다 망했다면서요?"

내가 들은 풍월에 살을 보태서 그의 부아를 한번 질러보았다.

"아, 무슨 그런 엉터리 악성 소문을---. 마누라는 도망 갔지만 아직 내 수중에는

먹고살 만한 돈이 두둑하다오. 빚쟁이들이 무슨 소리 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솔직히 뒤로 다 빼돌려 놓았지."

쫄딱 망하긴 망한 모양같았다.

마누라까지 도망갔다면---.

 

"내가 이제와서 예전의 영숙이란 처녀에게 청혼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이제 그런

쓰잘데 없는 악성 소문 이야기는 그만하자구---. 하여간 양 여사는 여전히 곱네.

나이도 항개도 안먹었고 몸매도 좋고 눈빛도 그윽하고---. 그래 눈빛이 정말 정답네.

돈도 많이 모았다고 소문이 자자 하더군. 빈포 마을의 성공사례야, 성공사례---."

그가 내 옆으로 와서 붙어 앉았다.

신사복 상의는 언제 벗어던졌던지 그 아래 받쳐입은 반팔 티 셔츠가 딱 벌어진 어깨

때문에 터질 것 같았는데, 그 뜨거운 어깨가 내 소매없는 민짜 브라우스에 지긋이

닿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경끼가 났다.

춤도 한판 돌리기 전에 전기부터 오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쩌랴, 내 몸에서는 오랜만에 전기가 조금씩 통하기 시작하였다.

"네년의 살은 다리이하고 달라서 뜨거버 큰일이야!"

엄마의 닥달이 생각났다.

"내가 뭐가 다르노. 엄마 살이 다리이하고 달라서 맨날 찹지, 찹아."

 

생각해 보면 우리 모녀는 모두 다른이 하고는 조금 달랐다.

나는 조금 뜨거웠고 엄마는 조금 차가웠다.

내 뜨거움을 이 사내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내도 예사롭지는 않아서 살이 뜨겁고 달았다.

이 사내의 억세고도 달콤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말하자면 국민 가수, 나훈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가 좋아서 연말이면 그의 디너쇼에 남편과 꼭 함께 가 보았고 그의 쇼를

녹화한 테이프도 여러가지로 사와서 심심하면 틀어놓고 보고 즐겼다. 

"영영"과 "사랑"이 나오면 나는 껌뻑 죽었는데 남편이 나의 이런 모양을 별로

좋아할리는 없었으나 내가 이어서 잠자리에서도 죽는 바람에 남편이 먼저

"테이프 돌리자" 할 때도 있었다.

 

"아이구, 그림이 좋아요. 옛 사랑의 그림자---."

나윤이가 홀에서 한 판을 돌고 별실로 들어오다가 공연한 방정을 떨었다.

"이런, 잘나가는데 무드 깨네. 우리도 홀로 나가서 한번 돌고 옵시다."

그가 내 손을 이끌었고 나는 못이기는척 따라나갔다.

플로어에서 도는 사람은 아직도 두어쌍 밖에 없었는데 다만 지터벅인지 지루박인지

조금 괜찮은 노래의 박자를 트럼펫과 드럼이 고조시켜서 홀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분위기 띄우는데는 트럼펫이 최고지. 여기 뺏다씨가 최고로 스카웃 된 사람미래요."

그가 유식한 티를 내었다.

"뺏다씨가 뭐예요. 트럼피터지."

나도 유식한 티를 내었다.

우리가 손을 잡고 나가자 음악은 갑자기 블루스로 바뀌었다. 

조명도 더 어두워졌다.

그는 우리 사이에 주먹이 하나 들어갈 만큼 거리를 두고 내 등 뒤로도 두 손가락만

가볍게 닿게 정통 무도 기법으로 제법 신사티를 내며 나를 이끌었다.

 

블루스가 끝나고 탱고가 나오더니 뜬금없이 자이브 곡이 잇달아 나왔으나 그의

능수능란한 스텝 유도로 우리 커플은 플로어에 신바람을 쏟아내었다.

춤 실력이 이 정도이니 사업이 거덜날 수밖에---.

내가 그의 춤실력을 감탄은 커녕 비난성의 혀를 차려는데 다시 블루스 메들리가

한정없이 나오면서 우리는 어느새 남녀의 조각 입상이 있는 그 무대 아래 어두컴컴한

지대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너무 감미로워져서 혀를 차려던 내 혀가 낼름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가 내 허리를 당겨 자기의 단전, 그러니까 배꼽 쪽에 붙였다.

단전 아래 그의 백두대간이 이제는 백두종간도 되지 못하는 남편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나게했다.

 

"잘났군, 잘났어."

나는 구태어 그의 백두대간에서 내 몸을 떼지는 않았다.

음악이 너무나 감미로웠고 언제부터인가  내 히프께로 내려 와있는 그의 손가락

놀림이 도무지 싫지 않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의 어느 부분인들 망가지지가 않으랴.

주름을 펴고 속 눈섭 문신을 하고 살을 빼고 붙이고 하면 위안은 된다.

그런데 그렇게 공사를 벌여봐야 가장 기가막히는 것은 기본이 되는 피부, 그러니까

생살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부의 탄력을 말하는게 아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아직도 안일한 수준이다.

 

나이가 들면 생 살, 맨 살이 보여주는 시각적 즐거움이 사라지고 그 생 살, 맨 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사라진다.

소나무 숲에서 오전에 나온다는 피톤치트가 사라지고 해 넘긴 김장의 "묵은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해 보라.

그건 아무리 용을 써 보아야 말짱 헛것이다.

내가 아무리 용을 많이 넣어서 한약을 다려 먹여보아야 열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영감의 몸에 붙은 나이 귀신은 물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살과 맨살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이 사내는 아직도 영감이 신혼 시절에 보여주었던 그런 힘과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양 여사."

그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내 귓전에서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그만 닭살이 돋고 말았다.

이 사내가 뭘 좀 안다 싶었는데 여인의 마음을 이렇게도 모르는가.

그가 만약 "영숙아"라고 했으면 내 몸은 그냥 백두대간 숲속에 파묻혔을지도 몰랐다.

"영숙아~, 라고 해봐요."

"영숙씨!"

그가 아직도 우리 사이의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나른하던 내 몸도 그만 뻣뻣해지기 시작하였다.

"왜 그래요, 오빠."

"양 여사, 우리는 인생에서 항상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니까---."

"아이 오빠.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와서 기회라니요. 저를 잘못 보고 계시나 봐요.

내 형편을---,"

"아니오, 기회는 안에서 여자가 주도적으로 잡아야해요. 큰 부담은 되지않아요.

아직도 청평 쪽에는 기회가 있다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한 천평 정도 마련해

놓으면 노후 대책으로---."

 

내 정신이 번쩍 머리를 쳤다.

"차차차"의 마지막 스텝에서 나는 하이힐 뒷축으로 그의 구두 앞 잔등이 쪽을 콱

찍어눌렀다.

그가 "아야" 소리를 음악에 파묻고 있는데 나윤이가 플로어에 보였다.

"나윤아, 나가자!"

내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 음악 소리가 갑자기 그치더니 무대의 대형 스크린에

이천수가 프리킥을 하여 한골을 터뜨리는 장면이 터져 나왓다. 

방금 차넣은 슛 모습을 리플레이로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이트 클럽의 시의적절한 적시, 즉시 서비스였다.

내가 나윤이를 이끌고 출입구로 나서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왔다.

 

"저런 자식 다시 나한테 붙이지 말어, 이년아."

내 날카롭고도 험한 소리는 그러나 바깥의 함성에 파묻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리는 붉은 악마들이 소리소리를 지르며 아우성이었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이천수의 귀신 같은 프리킥 장면을 자꾸만 다시 보여주었다.

그 함성, 그 열기, 그 포효 속에서 묻어나는 생살, 맨살의 신선한 냄새는

붉은 악마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는 결코 느끼거나 맡을 수 없는 그런 냄새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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