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원형 아래에는 전라의 남녀들이 껴안고 있는 입상들이 있어서 춤추는 연인들이
그 사이 사이에서 진한 키스들을 하고 있었다.
아니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월드컵 축구날, 특히 토고와 우리가 붙는 역사적인
저녁에 손님이 있을리는 없었다.
그저 몇 쌍이 이른 저녁의 무료를 달래며 스탭을 밟는 분위기였는데 이들도 축구가
시작되면 모두 밖으로 나갈 사람들 같았다.
내가 이십년 만에 만난, 한 때 몸을 섞었던 사내를 앞세우고도 새로 생긴 나이트의
홀이나 감상하고 있는 꼴이 스스로 생각하여도 조금 웃으웠다.
"양 여사! 우리 조용한 룸으로 들어갑시다. 나윤씨도 이리 따라와요."
춘식이 오빠는 잽싼 걸을걸이로 별실이 있는 쪽을 향하였다.
"그냥 여기 홀에 앉아요."
내가 조금 큰 소리로 우겼으나 그는 내말을 내숭떠는 정도로만 여기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너 쪽의 별실 문을 들어섰다.
문을 열고 안내해 준 것은 물론 "웨타씨"라고 하는 웨이터들이었다.
"양 여사! 정말 반갑소이다. 밀린 이야기도 많고 해서 내가 특별히 조용한 별실을
예약해 두었지. 이리와요 양 여사! 정말 반갑네."
"양 여사란 소리 그만 해요. 속이 느글거리고 울렁거리네요. 그리고 반갑소이다가
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오빠가 하나도 반갑지 않네요. 그리고 무슨 말씀 했는지는
몰라도 저기 나윤이가 오해하겠어요. 소문이 두렵소."
"하하하, 항개도 안반갑다니 오히려 나윤씨가 오해하겠소. 나하고 무슨 감정이
있는줄 알고---. 하하하. 어쨌든 그렇게 냉정해도 나는 반갑기만 하구려."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너스레로 무마하였다.
맥주와 과일 기본이 들어오자 그는 국산 양주를 한병 따로 더 시켰다.
"언니, 빈포 총동문회 모임에 나오면 벌써 만났을텐데 고집 피우고 안나오다가
이제야 옛 사랑을 만나보네요. 호호호."
"이년아, 너 형부가 오해하면 나 쫓겨나는 줄 알지. 말을 조심해라."
"아이구 난 모르겠소. 홀에 나가서 춤이나 한판 돌고 올께요."
이제 별실 룸에는 그와 나만 남았다.
그가 내 잔에 맥주를 부어주고 자기 잔에는 양주를 따루어 달라고 내밀었다.
"싫소. 자작으로 하시오."
처음에 나는 그런 식으로 까탈을 부렸으나 이내 술이 몇잔 돌자 그런걸 따지는건
다 부질없는 노름 같아서 그에게 술을 따루어 주었고 그러는 사이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꽉 쥐는 손에 힘이 느껴져서 맥빠진 영감 생각이 문득났다.
그의 손 힘은 예로부터 동네 최고라서 팔씨름도 항상 최고였다는 기억까지
솟아났다.
팔의 힘만 전달 되는게 아니라 손바닥의 뜨거움도 여전했다.
"다 망했다면서요?"
내가 들은 풍월에 살을 보태서 그의 부아를 한번 질러보았다.
"아, 무슨 그런 엉터리 악성 소문을---. 마누라는 도망 갔지만 아직 내 수중에는
먹고살 만한 돈이 두둑하다오. 빚쟁이들이 무슨 소리 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솔직히 뒤로 다 빼돌려 놓았지."
쫄딱 망하긴 망한 모양같았다.
마누라까지 도망갔다면---.
"내가 이제와서 예전의 영숙이란 처녀에게 청혼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이제 그런
쓰잘데 없는 악성 소문 이야기는 그만하자구---. 하여간 양 여사는 여전히 곱네.
나이도 항개도 안먹었고 몸매도 좋고 눈빛도 그윽하고---. 그래 눈빛이 정말 정답네.
돈도 많이 모았다고 소문이 자자 하더군. 빈포 마을의 성공사례야, 성공사례---."
그가 내 옆으로 와서 붙어 앉았다.
신사복 상의는 언제 벗어던졌던지 그 아래 받쳐입은 반팔 티 셔츠가 딱 벌어진 어깨
때문에 터질 것 같았는데, 그 뜨거운 어깨가 내 소매없는 민짜 브라우스에 지긋이
닿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경끼가 났다.
춤도 한판 돌리기 전에 전기부터 오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쩌랴, 내 몸에서는 오랜만에 전기가 조금씩 통하기 시작하였다.
"네년의 살은 다리이하고 달라서 뜨거버 큰일이야!"
엄마의 닥달이 생각났다.
"내가 뭐가 다르노. 엄마 살이 다리이하고 달라서 맨날 찹지, 찹아."
생각해 보면 우리 모녀는 모두 다른이 하고는 조금 달랐다.
나는 조금 뜨거웠고 엄마는 조금 차가웠다.
내 뜨거움을 이 사내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내도 예사롭지는 않아서 살이 뜨겁고 달았다.
이 사내의 억세고도 달콤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말하자면 국민 가수, 나훈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가 좋아서 연말이면 그의 디너쇼에 남편과 꼭 함께 가 보았고 그의 쇼를
녹화한 테이프도 여러가지로 사와서 심심하면 틀어놓고 보고 즐겼다.
"영영"과 "사랑"이 나오면 나는 껌뻑 죽었는데 남편이 나의 이런 모양을 별로
좋아할리는 없었으나 내가 이어서 잠자리에서도 죽는 바람에 남편이 먼저
"테이프 돌리자" 할 때도 있었다.
"아이구, 그림이 좋아요. 옛 사랑의 그림자---."
나윤이가 홀에서 한 판을 돌고 별실로 들어오다가 공연한 방정을 떨었다.
"이런, 잘나가는데 무드 깨네. 우리도 홀로 나가서 한번 돌고 옵시다."
그가 내 손을 이끌었고 나는 못이기는척 따라나갔다.
플로어에서 도는 사람은 아직도 두어쌍 밖에 없었는데 다만 지터벅인지 지루박인지
조금 괜찮은 노래의 박자를 트럼펫과 드럼이 고조시켜서 홀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분위기 띄우는데는 트럼펫이 최고지. 여기 뺏다씨가 최고로 스카웃 된 사람미래요."
그가 유식한 티를 내었다.
"뺏다씨가 뭐예요. 트럼피터지."
나도 유식한 티를 내었다.
우리가 손을 잡고 나가자 음악은 갑자기 블루스로 바뀌었다.
조명도 더 어두워졌다.
그는 우리 사이에 주먹이 하나 들어갈 만큼 거리를 두고 내 등 뒤로도 두 손가락만
가볍게 닿게 정통 무도 기법으로 제법 신사티를 내며 나를 이끌었다.
블루스가 끝나고 탱고가 나오더니 뜬금없이 자이브 곡이 잇달아 나왔으나 그의
능수능란한 스텝 유도로 우리 커플은 플로어에 신바람을 쏟아내었다.
춤 실력이 이 정도이니 사업이 거덜날 수밖에---.
내가 그의 춤실력을 감탄은 커녕 비난성의 혀를 차려는데 다시 블루스 메들리가
한정없이 나오면서 우리는 어느새 남녀의 조각 입상이 있는 그 무대 아래 어두컴컴한
지대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너무 감미로워져서 혀를 차려던 내 혀가 낼름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가 내 허리를 당겨 자기의 단전, 그러니까 배꼽 쪽에 붙였다.
단전 아래 그의 백두대간이 이제는 백두종간도 되지 못하는 남편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나게했다.
"잘났군, 잘났어."
나는 구태어 그의 백두대간에서 내 몸을 떼지는 않았다.
음악이 너무나 감미로웠고 언제부터인가 내 히프께로 내려 와있는 그의 손가락
놀림이 도무지 싫지 않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의 어느 부분인들 망가지지가 않으랴.
주름을 펴고 속 눈섭 문신을 하고 살을 빼고 붙이고 하면 위안은 된다.
그런데 그렇게 공사를 벌여봐야 가장 기가막히는 것은 기본이 되는 피부, 그러니까
생살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부의 탄력을 말하는게 아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아직도 안일한 수준이다.
나이가 들면 생 살, 맨 살이 보여주는 시각적 즐거움이 사라지고 그 생 살, 맨 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사라진다.
소나무 숲에서 오전에 나온다는 피톤치트가 사라지고 해 넘긴 김장의 "묵은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해 보라.
그건 아무리 용을 써 보아야 말짱 헛것이다.
내가 아무리 용을 많이 넣어서 한약을 다려 먹여보아야 열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영감의 몸에 붙은 나이 귀신은 물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살과 맨살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이 사내는 아직도 영감이 신혼 시절에 보여주었던 그런 힘과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양 여사."
그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내 귓전에서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그만 닭살이 돋고 말았다.
이 사내가 뭘 좀 안다 싶었는데 여인의 마음을 이렇게도 모르는가.
그가 만약 "영숙아"라고 했으면 내 몸은 그냥 백두대간 숲속에 파묻혔을지도 몰랐다.
"영숙아~, 라고 해봐요."
"영숙씨!"
그가 아직도 우리 사이의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나른하던 내 몸도 그만 뻣뻣해지기 시작하였다.
"왜 그래요, 오빠."
"양 여사, 우리는 인생에서 항상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니까---."
"아이 오빠.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와서 기회라니요. 저를 잘못 보고 계시나 봐요.
내 형편을---,"
"아니오, 기회는 안에서 여자가 주도적으로 잡아야해요. 큰 부담은 되지않아요.
아직도 청평 쪽에는 기회가 있다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한 천평 정도 마련해
놓으면 노후 대책으로---."
내 정신이 번쩍 머리를 쳤다.
"차차차"의 마지막 스텝에서 나는 하이힐 뒷축으로 그의 구두 앞 잔등이 쪽을 콱
찍어눌렀다.
그가 "아야" 소리를 음악에 파묻고 있는데 나윤이가 플로어에 보였다.
"나윤아, 나가자!"
내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 음악 소리가 갑자기 그치더니 무대의 대형 스크린에
이천수가 프리킥을 하여 한골을 터뜨리는 장면이 터져 나왓다.
방금 차넣은 슛 모습을 리플레이로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이트 클럽의 시의적절한 적시, 즉시 서비스였다.
내가 나윤이를 이끌고 출입구로 나서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왔다.
"저런 자식 다시 나한테 붙이지 말어, 이년아."
내 날카롭고도 험한 소리는 그러나 바깥의 함성에 파묻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리는 붉은 악마들이 소리소리를 지르며 아우성이었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이천수의 귀신 같은 프리킥 장면을 자꾸만 다시 보여주었다.
그 함성, 그 열기, 그 포효 속에서 묻어나는 생살, 맨살의 신선한 냄새는
붉은 악마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는 결코 느끼거나 맡을 수 없는 그런 냄새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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