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후인가, 제대를 하고 그는 한두번 빈포를 찾아왔으나 그의 옆에는 이미
서울 말씨를 쓰는 멋쟁이 아가씨가 파란 선글래스를 끼고서 붙어있었고
두사람은 곧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는지는 여기에서 다시 밝히고
싶지도 않다.
그 이후부터 나는 남자에 대해서 항상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내 몸을 꽁꽁 동여매었고 장차 내 앞에서 무릅을 꿇지않는 남자에게는
내 몸을 열지 않기로 독기를 품고 맹세하였다.
그와 함께 나도 장차 대처로 나가서 돈을 벌어야한다는 야무진 마음도 가슴에
새겼다.
대처의 대상도 마산, 진주, 부산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서울이어야하고 나도
서울 말씨를 연습하여 유창하게 쓰리라고 우리의 맹세 같은걸 혼자 하였다.
이용원하는 지금 영감이 빈포에 가끔 내려와서 시골 처녀들을 데리고
올라갈 때에는 좋지않은 소문이 동네에 돌았고 뒷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은근히 눈짓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나를 데려갈려고 할 때가 되자 당연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그러나 이 때가 성공의 기회다 싶은 나는 어머니의 반대를 어거지로 꺾고
영감에게는 순진한 척 내숭을 떨며 그의 유혹에 가까운 권유를 받아들여서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마침내는 그의 아내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던
것이다.
테레비에서 "인간 승리"라는 프로가 나올 때마다 나는 역경을 이긴 주인공에게
박수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내 밑바닥 비밀 때문에 몸을 떨었으며 혼자 울고
그리고 웃었다.
며칠 전에는 영감이 집에 들어와서 그 사나이 "춘식"이가 이용원에 들렀더라는
말을 하였다.
영감은 물론 나와 춘식이의 관계를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니 내가 결혼 당시에 새파란 숫처녀였던 걸로만 알고 있다.
"춘식이 오빠가 왔다구요?"
"그래, 당신도 알지?"
"알긴 뭘. 한 동네 선배니깐---."
"당신 안부도 묻던걸?"
"빈포 남자 치고 나를 궁금히 여기지 않는 사람 없을걸요. 내가 한 미모하잖아요.
그래서 또 인기도 많았고."
"동부 이촌동에 사나봐, 그러니까 용산 공원 근방이라나---. 한번 같이 만나서
저녁이라도 하자는 거야."
"싫소. 우리가 돈께나 모은 줄은 알겠지만 밀실 이용원 사장에 면도사 마누라, 뭐
그런 수준으로 볼게 뻔한데 왜 만나요?"
"내 마음도 그래. 이 자식이 찾아 온 김에 건강 휴식 이발을 하고 가겠다기에 그냥
내보냈어. 우리도 이제 그런 장사는 안한다고 했지."
"잘 했어요. 뭘하고 산답디까?"
"동부 이촌동에서 부동산한다나봐. 그런데 어째 이제야 삼각지에 나타났을까?"
"요즈음 공인 중개사가 쏟아져나온다면서요? 뭘하다 망해서 새로 시작하나 보네요."
이런 대화 때문에 내가 용산 가족 공원으로 일요일에 나온건 아니었다.
목적은 당연히 아이들 현장 학습 숙제 때문이었다.
그를 만난다는건 어쩌면 두려움의 대상,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물론 내가 움켜쥔 행운을 이제와서 그로 인하여 놓칠 우려는 전혀 없었다.
그게 두려운게 아니었다.
정작 겁나는 것은 옛날 보리 누름에 내가 그 오빠를 받아들이며 느꼈던 그 강렬한
희열이 아직도 내 몸 저 속 어딘가에서 꿈틀 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타고난 욕망과 희열을 나는 꽁꽁 묶어서 기억의 저편에 두면서 내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써먹었다.
그래, 증오와 분노의 힘은 초인적이라고 어디선가 읽었지.
나같이 가방 끈이 짧은 사람도 책을 읽고 그런 것쯤은 알고 이해하고 마음에 새긴다.
증오와 분노로 변질된 내 희열, 내 욕망의 기억, 내 나이 열넷인가 열다섯에 문득 내
정수리를 쥐나게 했던 그 떨림을 최근에 와서 부쩍 기력이 떨어진 영감을 두고 사는
내가 다시 원점으로 반추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상상을 동반하는 셈이었다.
아니,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게 아니다.
내가 그를 이기고 복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모욕을 갚기 위하여 몸을 꽁꽁여미고
살아 온 지난 날이 하루 아침에 그의 앞에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억울하고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조숙했었지.
그런 내가 지금의 영감과 결혼하여서 어디 한번이라도 정수리에 쥐가 난 적이
있었던가.
피도 마르지 않은 내 머리통에 쥐가 나게한 사내가 우리 아파트 근처
"동부 이촌동"으로 이사를 와서 "용산 가족 공원"이라는 말을 흘리고 간 것이다.
동부 이촌동과 용산 공원이란 말을 흘린 것은 정말 의도적인 것 같았다.
망할 놈!
그런데, 그런데 내 미태치는 왜 이렇게 뜨거워지기 시작하는가.
오래 꽁꽁 묵어 놓았던 내 비밀의 문에 달린 감춰진 초인종이 마구 울리기 시작
하다니---.
갑자기 공원 입구에서 검은 선글래스를 낀 춘식이 오빠를 닮은 중년의 사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한참을 서서 나를 보더니 곧장 나에게로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전시실이 있는 중앙 건물 쪽으로 달려가서 인파 속에 몸을 섞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급히 찾아 헤맸다.
단순한 빙의 현상인가?
아니 그 미지의 사내가 나를 향하여 과연 오고있기나 하였단 말인가.
숨을 겨우 고르며 나는 여러 생각을 정리해 보기 시작하였다.
아, 그런데 모처럼 내가 갑자기 달려서 그런가---.
쓰지 않던 근육들, 예컨데 종아리 같은 데에 갑자기 쥐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체의 저 오묘한 구석에도 정말 얼마만인가,
갑자기 쥐가 나려고하는게 아닌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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