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7월 4일의 모감주 나무

원평재 2006. 7. 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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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원장님 보이소.

 

레오니아의 정숙이라요.

나와 이제 내 세번째 남편 김씨는 다시 레오니아로 돌아와서 이발관과 "네일 숍"을

열었어요.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탈북자 여섯분도 이 곳 뉴저지에서 미국 사회 적응 훈련을

받고 있는데 이 기간이 끝나면 대체로 LA의 한인 타운으로 가서 정착을 한답니다.

우리도 그런 권유를 받았으나 이제는 미국에서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레오니아를

떠날 생각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어요.

 

오늘 내가 편지를 두번째로 쓰는 것은 이 곳 가로수로 많이 자라고 있는

"모감주 나무"를 보고 문득 고향이 그리워서 한 자 적는 것이라요.

그렇다고 내가 당신 생각이 간절하다는게 아니라 모감주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니 다른 데는 귀한 이 나무가,  

희안하게도 지천으로 자라던 고향 빈포가 생각났다는 것이지요.

 

고향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에서도 7월만 되면 모감주 나무에는 황금색 꽃이 피는데

그 특이한 모양을 보니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인 내 모양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물론 고향이라고 가봐야 누추한 추억뿐이겠지만 그래도 갈 수 있는데 안가는거 하고

가고싶은데 못가는거 하고는 심정이 사뭇다르네요. 여보.

 

모감주 나무는 흔하지가 않고 북한 쪽에는 자라지도 않아서 남편인 김씨만 하여도

전혀 추억이나 감정이 없는 그런 나무이군요.

그래도 어떻게 된건지 여기 가든 스테이트라고 별명이 붙은 뉴저지의 레오니아에는

이 나무가 가로수로 자랄만큼 흔하여서 해마다 유월에서 팔월 까지 내 마음을 이리도

아프게 하네요.

이곳에서는 모감주 나무를 황금 꽃이 나무 위에 비오듯이 피는 모양을 보고 

"골든레인 트리"라고도 하고 또 "차이나 트리"라고도 부르네요.

이상한 일에는 인디언이나 오리엔탈이나 차이나라는 말을 붙여쓰는 이곳 습성이

때로 고깝지만 황금 나무에 차이나라는 말을 붙이니 이것만은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더라구요.

하긴 그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던가 속을 파서 목탁을 만들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합디다만---.

 

참, 사실은 당신 이름이 우리 민족 더불어 살기 공동체 운동 후원회 명단에 올라있고

꽤 많은 돈을 donation, 그러니까 후원하였기에 정말 감사했어요.

그게 단순히 우리 사이에 난 아들을 찾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내가 공갈을 친

결과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네요.

나, 정옥이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아직도 조금만치는 남아있다고 믿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이면서 아울러 당신도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높고 깊어졌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당신은 사실 환경이 그러했지, 본심은 항상 대범하고 꿈이 크고 사랑도 많았어요.

 

여기 우리 부부에게도 아이가 하나 생겼어요.

당신이 후원회에 이름을 올린 그때쯤 우리도 아이를 키우게 되었어요.

김씨는 북한이나 중국 조선족 쪽을 내심 원했지만 우선 절차가 복잡하였어요.

요즈음 미국에 입양아를 제일 많이 보내는 나라가 중국인거는 아시나요?

 

나는 또 한국 아이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어서 역삼동의 충현 교회 근처에 있는

"대한 사회 복지협회"에 부탁을 하는 등, 난리를 쳤는데 문제는 우리 두사람의

수입이 미국의 기준으로 해외 입양아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는군요.

우선 최소한의 수속비와 입양아를 데리고 올 사람에게 지출할 비행기 값 등의

제 경비, 약간의 donation, 등등으로 지출할 돈만 이만불에 달하고

입양 한 후, 만 18세가 될 때까지의 양육비 부담에 관한 계획서가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8년간의 양육기간 중,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무한 책임 보증인을

또 달리 한사람 세워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우리에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할 수 없이 우리는 여기에서 이혼한 한국출신 부부의 아이 하나를 위탁하여

키우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지요.

이 아이는 여기 나이로 세살이라서 우리 말과 영어를 둘 다 곧 잘 하지요.

이렇게 잘 키우던 아이를 버리고 이 부부는 왜 헤어져야 했는지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그건 그렇지만 나와 남편인 김씨 사이에도 가끔 트러블이 있지요.

아무리 깊은 이해 속에서 사랑으로 맺어졌고 주위에서 보고있는 사람들이

많다 할지라도 서로 자라온 배경과 환경이 다르니 어찌 가끔 부부 간에

충돌이 없겠어요.

그럴때마다 위탁 양육을 하는 우리의 패트리셔는 큰 중화작용을 한답니다.

패트리셔를 키울 수 있는 자격은 우리가 가게와 거처를 함께하기에

가능했고 파트 타임 베이비 시터를 두는 조건이 또 붙었어요.

 

엊그게 맞이한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여기에서는 Independance Day라고

하기 보다는 the Fourth of July, 그러니까 그냥 7월 4일이라고 한답니다.

나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이 곳 사람들처럼 "해피 포스 데이(Happy Fourth Day)!"

라고 인사하기를 좋아하는데, 나에게는 사실 남다른 감회가 있어요.

내가 미국에 처음으로 랜딩한 때가 바로 이날이었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앨리스 섬으로 처음 들어온 초기 유럽 이민자들과는 달리

내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워싱턴 디시의 초라한 덜레스 공항이었지만

내 가슴은 초기 이민자들 못지 않게 힘차게 뛰었어요.

 

당신에게 배신 당한 삼각지의 면도사가 미군 지아이, 토미를 만나서 필사적으로

구애를 하여 팔자를 고치기로 작정한 첫 걸음은 광화문 미국 대사관의

INS(이민 귀화국)로 가던 날이었답니다.

온 밤을 뜬 눈으로 새운 이유는 감격 때문이 아니라 걱정 때문이었지요.

어떻게 벌인 팔자 고치기 작업인데 만약에 실패한다면---, 나는 아마도 약을 먹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일날 아침에는 걸음을 걸을 수 조차 없이 내가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대사관 문밖에서 속수무책으로 끝없는 줄을 길게 서있는

이 나라의 잘난 남녀들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차라리 진정이 되더라구요.

내노라하는 이 땅의 잘난 사람들도 면도사인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지요.

 

더구나 나처럼 INS로 가는 사람은 그 긴 줄을 설 필요없이 바로 대사관 3층으로

올라가라는 안내를 받고 부터는 자부심으로 목에 힘이 들어가더라구요. 

 

남편인 김씨는 그런 과정은 모르지요.

그 양반은 북한에서 발행한 공식 여권이 없는 난민이기 때문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higher commissioner)의 이서(endorsement)에

근거하여 미 국토 안보국의 양해 아래 바로 영주권을 취득하였지요.

그때 이서를 해 준 고등판무관은 한국 출신의 젊은 여성 관리로서 이화여대를

졸업하였답니다.

나보다 훨씬 젊은 한국 출신 여성 관리의 활약에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쓰는 것은 새로 키우게 된 한국계 여아, 패트리셔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모두 녹아들어있는 심정인가 보네요.

우린 참 억울한 세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나 나나, 젠장.

 

모감주 나무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한민족 더불어 살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 준 데

대한 감동으로 시작한 이번 편지라서 모감주 나무 이야기로 편지를 마감할까

합니다.

독립 기념일 휴일에 멀리갈 처지는 못되고, 우리는 레오니아에서 가까이에 있는

"밴 선 파크"라는 공원으로 차를 몰았지요.

 

아침에 우리는 무슨 일이었던지 사소한 일로 부부 싸움을 했어요.

아, 그게 북한이 미사일을 쏜 사실 때문은 결코 아니었어요.

아마도 집 앞의 모감주 나무를 보고 Goldenrain Tree라는 그 나무의 영어 이름처럼

돈 벼락이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다는 나의 짜증스런 소견에 김씨가 자기 고향에는

그런 나무도 없고 그런 돈벼락 내리게 할 능력도 자기에게는 없다고 되받은 것이

말다툼의 씨앗이 아니었나 싶네요.

모감주 나무가 추운 북한 땽에는 자라지 않는 모양이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공원으로 달리는 우리 고물차 내부의 공기는 더운 날씨와 달리 냉랭했는데

갑자기 패트리셔가 길가의 모감주 나무를 내다보며 소리를 질렀지요.

처음 그 아이의 소리는 "네모" 혹은 "니모"처럼 들렸지요.

"오, 팻, 니모?"

그이가 대꾸를 해 주면서 요즈음 한참 뜨는 아동 만화 영화의 주인공 "니모"로

알아듣고 플라스틱 작난감 "니모"를 앞쪽 운전대 옆 설합에서 찾아내어 

베이비 시트의 패트리셔에게 건넸어요.

그러나 그애는 고개를 가로져으며 다시 소리를 쳤어요.

"오, 노우, 대디, 나무!"

아이는 "나무"라고 우리말로 또렷이 말하더니 다시 덧붙였어요.

"나무! 골든 트리!"

 

이게 웬 일인가요.

패트리셔가 모감주 나무를 가리키며 황금 나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는가요.

그애의 외침메 우리는 크게 깨달음이 오고 다시는 부부 싸움을 말자고 웃으며

화해하였지요.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제일 기분 좋았던 일은 능력이 없다던 그이가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지요.

 

정 원장님,

당신도 모쪼록 돈을 더 많이 버셔서 후원회에 많이 기부하시기를 바래요.

우리는 donation을 돈네이션이라고 우스게로 발음합니다.

구약 전도서의 헛되고도 헛되도다, All is frailty라는  세상사의 이치를 읽고 깨달으면서

그러므로 진실로, 진실로 뜻있는 일에 돈네이션 하자고 우리는 가난한 주머니를 채우려

합니다.

 

모감주 나무 동네, 레오니아에서

정숙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