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팩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지크

원평재 2006. 7. 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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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로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 때부터 서양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용모와 닮으셨던 중학교 때의 음악 선생님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풍금이나 겨우 구경하다가 대처로 나온 나에게 현악과 관악을, 그리고 마침내는

교향악을 들이대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처에서 초등학교를 밟은 내 빼어난 친구들이자 경쟁자들도

아직 서양 음악에는 다들 문외한일 만큼 나라의 수준은 계몽기 이전이었다.

 

음악이라고는 시골에서 굿거리 할때의 무당 패 타악과 기생들의 지화자 장고소리,

사당패들의 흥을 돋구는 현악기 "앵금"의 떨리는 흐느낌으로 내 청음의 세계는

시작하였으나 어쨌든 중학교 교정에서 아침 등교길에 울려퍼지는 주페의

"경기병 서곡", 모찰트의 "터키 행진곡",  또 높은 이상에 스스로를 닥달하다시피

하시는 음악 선생님의 교향곡 감상 수업은 음악에 관한 내 교양의 수준을 압축 발전

시켰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냉엄한 것을---.

이윽고 꽃피는 춘삼월도 지나고 소나기 후두둑하는 여름이 오자 1학기말 시험이

다가왔는데 음악 시험은 그동안 즐겨 들었던 수많은 실내악과 교향곡을 조금씩

짧게 틀어준다음, 작곡자와 곡명 알아맞추기, 그리고 짧은 감상문을 요구하는

일종의 퀴즈 형식히라고 사전 예시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사정으로는 속수무책, 무엇으로 복습이나 시험 준비를 하랴.  

 

시험장은 가관이었다.

1학년 전체를 강당에 집어넣고 음악은 짧게 틀어주고 알아맞추기 게임은 시작된

것이다.

시간중에는 수많은 고전 명곡을 듣고 벅찬 감격의 흉내도 내보았지만 막상 시험에

대비해서는 무슨 방책이 없었던게 당시 우리의 문화수준이었다.

오디오 시설은 커녕 유성기 한대 없는 절대 빈곤의 사회 인프라 구조에서 서양 음악

감상이란 어쩌면 시대를 앞선 음악선생님의 과욕인지도 몰랐다.

명곡의 이름이나 작곡자를 택없이 못맞춘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충 백지 동맹이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그런 국가적 사회적 수준에서도 빛나는 소수는 항상 있었다.

그때도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하는 몇몇 친구집에는 그런 음악 시설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런 녀석들의 "이너 서클"에라도 접근하여 귓청을 좀 소제하려고

우리는 또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세월이 흘러 그나마 음악 감상의 기회와 사정이 조금 좋아진 것은 우리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부터였던 것 같다.

나아진 그 사정과 기회란 우선 첫째로 고등학교 교복을 걸치면서 부터는

고전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곳 출입을 위협적으로 금한적도 있었으나 영화관을 몰래

다니는 학생들 보다는 훨씬 근면 성실, 조숙한 사춘기 범생이들에게 지적

피항처의 역할이 되리라는 인식이 마침내 훈육 선생님들에게도 생겼는지

우리는 별 일 없이 그런 곳을 내내 드나들었다.

 

두번째로 나아진 사정이란 그때 언제부터인가 손으로 만든 오디오 음향기기가

"전축"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우리의 집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 집에도 들어온 이 값싼 전축은 합판을 쓱쓱 잘라서 만든 톱날의 흔적이

그대로였고 향음판이 고음을 이기지 못하여 부르르, 부르르 떨던 것이었으나

차이코프스키의 1864년에 나오는 대포알 소리도 용케 토해 놓고 있었고,

더우기  잘 사는 내 친구의 집에있는 High Fidelity 전축은 제법 카라얀의 속이라도

썩히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느그들 합판을 잘라서만든 하이파이 전축으로 음악을 들은 적이 있지?"

얼마전 중학교 동기 L을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났더니 그가 낄낄거리면서

좌중에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럼, 그때 네 발 달린 싸구려 전축 한 대씩 집안에 모두 가보처럼

장만했었지."

동기들이 추억어린 동의를 하였다.

"그게 내가 다 만들어 판거야."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안이 폭삭한 그 친구는 일반계 고교를 버리고

공고 전기과로 진학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손재주가 좋은 데다가 먹고 살

궁리도 겸하여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부품을 소위 양키시장이라는 데에서

대량으로 사다가 합판 전축을 조립하여 팔았다는 것이다.

그도 나중에 다 크게 성공하여서 그런 어려웠던 시절을 술회할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때에는 소위 "사인 지(sign paper)"라고, "우리의 우정 영원히" 같은

글과 그림을 도화지에 그려서 서로 돌리는 일이 당시 유행이었는데 이 친구가 그려준

사인 지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였다.

그의 것은 형식이 아름다웠고 내용은 낭만적이었지, 아마.

그에게는 인근의 여학생들로부터도 사인 지 주문이 많았다는 기억이 난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의 꿈은 "가정 음악회" 같은 것을 꾸미는

것이었다.

음대 다니는 학생들에게 체임버 뮤직을 연주케하고 이를 감상, 토론하는

한마당이라도 꾸미자는게 내 꿈의 극치였으나 그런건 그만두고라도

하다못해 고전 음악을 마음껏 듣고 감상하고 토론하는 그런 한마당 조차도

각박한 현실 앞에서는 결국 성사 직전에 와해되곤 하였다.

 

슈바이처가 바흐 음악의 대가라는 것은 상삭이었지만 그가 연주와 감상회를 

전문가 수준으로 집안에서도 꾸려갔다는 외신은, 동방의 빛은 커녕 툭하면

전기가 나가서 촛불 켜고 사는 가난한 나라의 청년들에게는 신기루 같은

소문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촛불 꺼지지 않고 이 내 가슴에는 항상 불씨로 남아 있었다.

 

엊그제 그 불씨는 미국 동부 뉴저지의 파라무스(Paramus)에서 다시

불타올랐다.

기복 많았던 미국 이민생활 30년사를 대하 소설로 꾸려낼만한 이력의  내 성공한

친구, C가 자기 집에서 음악 감상의 저녁 모임을 연다고 나를 초청 한 것이다.

"Eine Kleine Nacht Musik이네--", 내가 부르짖었다.

"응, 그런 이름이 가당키나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밥 먹으며 음악 듣자는

취지일쎄."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얼마전에 부부가 의사를 하는 어떤 가정에서 음악

감상의 저녁 시간을 갖였는데 그 날 분위기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내 친구도 

답례 겸 그 부부와 또 다른 여섯 커플을 초대하여 비슷한 저녁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우리 커플도 끼게 된 것이다.

 

내 친구는 공대를 나와서 그런가, 여러가지 능력에 더하여 손재주도 평소 남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앞에서 말한 L 군과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특히 음악 기기를 설치하고

다루는 기술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는데 이런 탁월한 경지가 다시한번 재현될

순간이었다.

 

 

 

드디어 토요일 저녁,

파라무스의 미드우드(Midwood) 동네, 그러니까 숲이 우거진 동네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최고의 음향기기들이 이 저녁에 초대된 여섯 커플의 앞에서 한도

끝도없이 그 아름답고도 위풍당당한 음색을 자랑하게 되었다.

 

음악 감상도 이제는 오디오만으로는 궁색한 시대가 되었다.

비주얼 영상 매체가 지휘자와 연주자의 격렬한 모습, 또 넋이 나간 객석의 표정,

그리고 표제 음악이 아닌 경우라도 배경이 되는 보조 영상들을 모두 모니터에

쏟아 붓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보통 한 세트로 조립되어 나오지만 공대 나온 내 친구는 기능별로 

최고의 기기들만 사모아서 다시 조합, 운용하여 본인과 듣는이 모두 기쁨을

누리게하였다.

 

이 날 초대된 면면들은 음악 세계에서도 한가락하는 전문가적 수준의 소유자들

이었다.

아까 말한 의사 부부는 음악이 너무 좋아 본업 말고도 줄리어드에서 음악 감상

코스를 한학기 수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커플은 음대를 나왔으나 지금은 여기 이민을 와서 큰 가구상을

하지만 전공을 항상 그리워 하는 사람,

약대를 나와서 크게  제약업을 하는 분은 최근에 수필집도 낸 문인인데

음악 이야기가 글의 대부분의 주제라고 하였고,

맨해튼에 큰 골프장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또 다른 분은 고객들 중에 유명한

세계적 연예인들이 많다고 하였다.

 

호스트인 내 친구는 보석상을 하지만 만돌린과 드럼에 또 일가견이 있고

앞에서 말한데로 음향기기 수집과 운용에도 달인이니 가히 음악 예술계의

기라성들이 이날 밤 파라무스 숲속에 모인 셈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었으니 모르긴 해도 소년 시절의 음악에 대한

가슴저린 동경과 열망, 이에 반하는 척박한 현실적 제약의 체험은 나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겨우 나이가 들어서야 음악에 관한 소년 시절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슈바이처의 "음악이 있는 저녁"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처지에

아슬아슬하게 진입은한 셈이 아니겠는가---.

 

처음 온 사람이라고 테이블 스피치의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위에서 써내려온

그런 취지의 말을 하였다.

물론 길게하여 배고픈 사람들의 눈총을 사지는 않았다.

 

우리는 오늘의 호스티스가 만들어 내 놓은 동서양 퓨전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고급 와인도 몇잔씩 걸쳤다.

이윽고 후식이 나와서 역시 동서양의 여러가지 과일을 음미하고 스파클로 목을

축이는데,

벌써 "이차크 펄먼"이 영상으로 나와서 땀을 뻘뻘흘리며 바이얼린의 활을 휘둘렀다.

지휘자는 당연히 "다니엘 바렌보임"이었는데 누가 "앙드레 프레빈"이라고 오판을

하였다.

바렌보임을 주장한 이가 당연히 승리하자 앙드레 프레빈의 주창자가 슬그머니

프레빈과 정경화와의 스캔들 이야기로 논쟁을 봉합하였다.

 

오늘의 호스트, 내 친구는 재치도 있어서 클래식의 중간 중간에 가벼운 성악곡도

넣어서, "태미 와이네트"가 정말 오랜만에 등장하여 "Stand by your man"을

불렀다.

얼마나 오랜만인가,

그녀를 대학시절 라일락 언덕 위의 학생회관 음악 감상실에서 음정으로만 대했던

이래로---.

아름다운 음색에 항상 우수가 끼어있다고 생각했던 추억의 내 추측이 맞았다.

우리와 태어난 때가 비슷한 그녀는 천형처럼 병력(病歷)을 타고 나서 결국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내 친구가 이제야 설명해 주었다.

 

감상의 중간에는 연주회처럼 중간 인터미션이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나가서 이 집의 1.5에이커 후원에 있는 비거리 80야드 정도의

골프 연습 코스에서 피치나 칩 샷으로 "온 그린" 시합을 하였다.

모기와 풀벌레가 조금 있었으나 야간 골프 샷의 운치를 당하지 못했다.

이웃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집에서는 조국이 이날 월드컵에 우승하였다고 

큰 가든 파티가 있는듯 멀리 불빛이 밝았다.

 

 

 

 

음악 감상의 밤은 다시 이어졌다.

비발디의 "사계"가 선곡되어있었고 그 중에서도 "여름" 악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말하였다.

사계의 바이얼린 연주는 "겨울"이 압권이라고---.

주인장은 얼른 "겨울"로 악장을 바꾸어서 올렸다.

과연 동유럽, 루마니아 출신의 새로뜨는 젊은 바이얼리니스트 줄리아 피셔는

겨울 혹한 보다 더 엄혹하고 냉엄한 표정으로 줄이 끊어져라 활을 상승, 하강

시키고 있었따.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겨울 악장의 연주 디렉션을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빠르게 (그러나) 너무 목에 힘주지는 말고---.

우리도 지금껏 참 알레그로로 달려왔구나.

그러나 이제는 논 트로포, 너무 힘주어 살지는 말자---.

 

이제 샬롯 처치가  듣는이의 숨이 멎을듯한 청아한 목소리로 객석을 고혹시키더니

이어서 파바로티, 카레라스, 도밍고 트리오가 나왔다.

"파파라치가 나왔네."

누가 웃겼다.

"저 사람 이제 무대에 못 선데요. 최근에 큰 수술을 받았지요."

여 의사께서 무거운 뉴스를 전했다.

그러자 음대 나온 가구 거상이 내게 속삭였다.

"계시는 학교의 경제학과 C 교수를 아시나요?"

"그럼요. 전공은 다르지만 제가 본부에서 일을 했기에 잘 알지요. 우리와

나이도 비슷하고 또 청아한 분이라서 제가 좋아했지요."

"지난 봄에 한국 나가서 그와 식사를 나누었어요. 그 친구가 최근에 바깥

출입을 않는다더니 그날 마지막 만찬이라고 나타났어요. 불치의 병이더군요---."

"세상에! 처음 듣습니다. 제가 최근에 한참 바깥으로 나돌았는데 그 사이에

어째 그런 일이---."

 

왜 그랬는지 호스트인 내 친구는 이날 감상 레파토리의 휘날레 부분을

성가곡으로 채웠다.

같은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르는 묘미의 비교 차원이라는 내 친구의 설명과 함께

안드레 보첼리와 파바로티가 각각 "아베 마리아"를 불렀고 르네 플레밍과

린다 에더가 "오, 홀리 나잇"을 경쟁하듯 불렀다.

이어서 린다 에더가 다시 나와 "사일런트 나잇"을 부르자 샤롯 처치도 질세라

다시 등장하여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한 여름밤에 선사하였다.

"어이쿠, 눈이 내리기 전에 빨리 집으로 가야겠네."

누가 소리쳤다.

정말 시간은 자정이 넘어있었다.

 

모두들 서둘러 차들이 파킹해 있는 앞 뜰로 나서는데 익명의 부인께서 내게

닥아왔다.

"아까 그 전축 만들었다는 친구, 지금도 연락이 되세요?"

"아, L 군 말이군요. 그럼요."

"뉴저지에서 어떤 여인이 안부 전하더라고만 해주세요."

마침 그때 저쪽에서 그 부인의 남편이 소릴 질렀다.

"여보 뭐해, 빨리 오지않고---."

"아, 네, 정말 눈이 오는 것 같아요. 저기 반딧불이들이---."

반딧불이들이 정말 한 밤에 내리는 눈처럼 눈 앞에 가득하였다.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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