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지난 며칠 후 처서도 지났건만 윤칠월이 있어서 그런가,
무더위가 여전한 어느날, 박 교수의 휴대폰에 장 여인의 음성이 울렸다.
여전히 낮은 음정이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있는 곳은 커녕, 와병 사실조차 잘 알리지 않던
김완기가 박교수를 찾는다는 전갈이었다.
사실은 김완기가 찾는 것인지 그녀가 찾는 것인지 분간도 되지않게
느릿느릿 그녀는 주어를 뭉게며 말을 이었다.
"보실 수 있겠지요? 아무래도 한번 보셔야겠네요. 참, 찾을 수나 있으실는
지요?"
"경기대학 입구 쪽에서 산자락으로 난 작은 길이라는걸 기억합니다만---."
박 교수가 고백성사를 보듯 그녀와의 기억을 잊지않고 있다고 털어내었다.
"저 때문에 기억하세요? 호호호. 죄송해요. 지금 농담할 처지가 아닌데.
사실은 조금 급해요."
전화를 끊자 박 교수는 당장 정오의 햇살을 무릅쓰고 그 오밤중에 그녀와
헤어졌던 곳을 혼자 더듬어 찾아갔다.
밤 도깨비에 홀린듯 그녀가 소실점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가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었던 그 지점에, 이번에는 그녀가 낮 도깨비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끼는 전혀없었지만 아름답고 창백한 얼굴에 큰 키, 수척한 몸매를
부러뜨릴듯한 유난히 큰 가슴, 부실한 여름 치마를 밀어올린 엉덩이가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면서도, 욕정과 귀끼까지 서린 한 여인이
거기 길섶에 나와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았는데 여인의 손은 창백한 얼굴보다 더 서늘했다.
여인이 숲 길을 앞장 섰다.
사태가 심각함을 직감하겠는데도 여인의 큰 엉덩이는 정욕을 품은듯
흔들거려서 뒤에 선 사내의 눈을 끌었다 밀었다 했다.
"상태가 심각한 지경인 모양이죠?"
박 교수가 바튼 침을 삼키며 묻지 않아도 당연한 질문을 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여기 산 속에 무슨 집이 있나요?"
"청산에 산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김완기 계장이 시청에 있을 때에 이 산 속에 비닐하우스를 하나 꾸린
모양이었다.
내용이 어떻게 된건지는 여인도 몰랐다.
겨울을 빼고는 두 사람이 이 누옥을 많이 이용하였다.
전기도 들어왔다.
목각은 이 곳에서 거의 다 깎았고 일부는 싣고 나가서 팔았으며 대체로
남아 쳐지는 것들은 비닐하우스 안팎으로 쌓아놓았다.
지난 겨울 김완기가 풍을 맞은 곳은 장 여인의 반지하 셋방이었으나 봄이
오고부터는 다시 이 비닐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 사이에 시청에는 병가를 냈다가 명퇴를 했다.
얼마되지 않는 그의 연금과 간질병 환자인 부인의 이름으로 든
국민연금은 모두 그녀의 병 수발로 들어가고 있었다.
청산에서의 살림은 오로지 장 여인이 파출부로 나가며 버는 돈과 장녀의
월급에서 뗀 약간의 효심어린 돈으로 꾸려나갔으나 최근에는 파출부도
나가지 못하여 어려움이 막심하였다.
"동기회에서도 너무 무심했네. 회장하는 박 사장이 좀 돕지도 않습디까?"
산 속의 한 모퉁이에 천혜의 공터가 마치 이 사람들을 위하여 숨어있듯
꼬부라져 들어가 있는 곳에 김완기가 움집을 틀어놓았다.
계장이라는 자리가 그 정도의 불법을 바람막이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박 사장에게는 알리지도 않았어요. 휴대 전화로 연락이 여러차례 왔지만
내가 자꾸 이러시면 댁에다 알리겠다고 했더니 그만 뚝 끊어지데요."
그녀가 안내한 비닐 하우스 움막은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초라하였다.
우로를 막는 초막이라는 표현이 있던가.
사실은 비와 이슬도 못 막을 비닐하우스가 그나마 평지도 아닌 데에 있어서
그게 정말 사람이 들어있는 곳인지 무슨 거름 창고 같은 것인지 애매하게
보였다.
구태어 말하자면 위장술이라고도 할만 했다.
다만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거나, 실상 보이더라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그 외돌아져 한단 높게 자리한 절묘한
자리에는 그가 깎은 목각들이 입구부터 잔뜩 꽂혀있어서 외부인을 경계
혹은 환영하고 있었다.
하우스라는 표현처럼 명색이 집이니 문도 달려있었다.
출입구의 문을 여니 고약한 냄새가 고물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에 실려
확 달려들었다.
하우스의 여러 군데로 창들이 나 있어서 냄새를 뽑아낸 정도가 그러
하였다.
하우스 안쪽에도 더 많은 목각이 사방을 꽉 채웠는데 바닥 한 가운데에는
시청 철거반에서 작업하다 나온듯한 노란색의 낡은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고 거기 김완기가 누워있었다.
그는 이제 꼼짝도 못하였는데 눈동자만 조금 박 교수에게 굴리는 것이
최소한의 의식은 있는듯 하였다.
"이 사람아! 날쎄!"
무어랄까 치받치는 슬픔을 억제치 못하고 박교수가 소리를 냅다 질렀다.
"눈동자 굴리시는게 선생님을 알아보고 반갑다는 표시라요."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일종의 통역을 하였다.
"날 알아보겠어?"
그가 또 소리를 질렀다.
김완기의 눈동자가 다시한번 굴렀다.
"반갑다네요."
또 그녀의 통역이었다.
"사람을 그저 알아보는 수준이지 반갑다는 표현이라니요?"
격정 속에서 달리 할 말이 없어 박교수가 여인에게 좀 퉁명스런 소리를
냈다.
"눈동자를 굴리시면 반갑다는 거고, 가만히 있으면 보통이고 눈을 감아
버리면 사람은 알아보지만 보기 싫다는 뜻이지요."
듣는 박 교수는 가슴이 미어지는듯 했으나 말하는 장 여인은 그냥 담담한
저음이었다.
"가끔 입술도 움직이시는데 제가 대략 알아듣지요. 그래서 큰 소리로
확인하면 눈동자로 맞다, 틀리다 반응을 보내요."
"시립 병원 같은데에 알아보지 그랬어요."
"저 양반이 공무원 연금도 나오고 해서 극빈자 처리가 오히려 어렵데요.
그리고 또 다른 곳에는 가지않고 오로지 이 곳 청산에서 눈을 감겠다네요.
눈을 감으면 화장을 해서 이 곳에다 뿌려달라는군요. 그때 저 목각도 다
태우라고---. 벌써 오래 전, 말을 할 수 있을 때에 모두 작정을 해 놓은
사항이라니까요."
"진작에 좀 알려주시지 않고---?"
"지금도 사실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에겐 연락 못해요. 저 양반이 곧
죽어도 자존심이 얼마나 센 분인지. 그걸 한 평생 제대로 표현도 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며 살아왔답니다."
"저 놈이나 나나 빈포 인간들이 다 그래요."
"저도 고향없는 떠돌이라 저 양반이 뜬금없이 빈포 댁이라고 불러주고
부터는 같은 마음인가하네요. 호호호."
그녀가 낮게 거리낌없이 웃었다.
고약한 냄새는 산바람이나 선풍기에도 지지않고 맹위를 떨쳤으나 더위는
산 속, 숲 속이라 견딜만 하였다.
비닐하우스에는 이런 저런 명상 서적들도 있었고 소설 책도 있었다.
풍맞은 내 친구의 손때가 묻었다기 보다는 장 여인의 취향이나 수준을
말하는듯 하였다.
아, 음악도 좋아하는지 MP3도 새같이 만든 목각에 걸려있었다.
"길 찾는게 자신 없어서 먹을 것도 못 사왔군요. 책이라도 좀 갖고 올
것을---."
"그냥 오신게 가장 잘하신거예요. 저도 대접할게 없구요."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을까요?"
"당장은 아니구요. 저 양반이 보시고 싶어해서 전화 드렸지요. 이제 얼굴
보셨으니 일어나시지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얼른 연락 드릴께요.
일을 당하면 서명을 해 주실 일들이 좀 있답니다. 선생님은 직함이
있으시니까요.
이 양반이 가족도 모두 그렇고해서 한심해요. 또 저같은 사람이야
법적으로 아무 연고가 없고 위치도 워낙 비천하다보니."
"비천하다니요. 그런 표현 쓰시는걸 보니 아직 빈포댁 될려면 멀었네요."
박교수도 차라리 격의없는 농담을 하며 환자를 고즈넉히 바라보았더니
그도 기쁜 마음인듯 눈을 껌벅거렸다.
"통역하기 쉽네. 자네도 기분이 좋은가봐, 이 사람아---."
웃으며 시작한 말이 감정이 격해져서 끝까지 가지는 못하고 울멍이며
그쳤다.
"나 그러면 일어나 볼께. 가을 바람 불면 벌떡 일어나게. 그래야 고생한
빈포댁에게도 보답이 되지."
두 사람은 목각이 도열해있는 청산 아래로 난 길을 걸어 나왔다.
"목각도 태워달라고 했다지만 이 산중에서 그런 일이 쉽지 않을텐데요."
그가 구체적인 걱정을 했다.
"걱정 마세요, 저 아래에 시에서 설치한 소각장이 있거든요. 미리 다 손을
써 놓았지요. 제가 교수님 앞에 문자를 또 써서 죄송하지만 모옴인가 하는
작가가 쓴 달과 육펜스의 주인공이 타히티 섬이던가 거기에서 죽을 때
자기가 그린 그림 전부를 다 태워버리는 이야기를 읽었어요.
저 양반이 정신 있을 때에는 그런 이야기도 나누었네요. 저도 나중에는
이 곳 청산으로 돌아갈까 해요."
"너무 그렇게 푸르게 푸르게만 살다 갈 생각은 마세요. 그냥 되는데로 좀
재미있게 살 수만 있으면 그렇게도 살아보세요."
여인이 되는데로 끌고 나온 신발이 전에 본적이 있었던 그 고급 스포츠
화인 것에 눈길이 가면서 박 교수는 진심으로 가슴이 아파 그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발이 그게 뭡니까. 그렇게 닳고 헤진걸 끌고 다니면 누가 열녀문이라도
세워준답니까, 이 시대에---."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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