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청산에 살리라 (두번째)

원평재 2006. 8. 2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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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있어도 여간 예쁜 여자가 아니야."

박 회장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입맛 다시는 시늉까지 하였다.

 

"동기 간에 이런 친구를 봤나. 이 사람, 박 사장, 자네 정말 못말릴 손이네.

여자라면 항상 걸신에, 궁끼에 환장이로구나.

자네 그 싱거운 표정은 이제 그만 거두시고 우리의 김완기 사무총장 가정

사정 이야기나 더 들어보자. 그 녀석이 어려운 경제 사정에 더하여 여자

문제까지 업친데 덥친줄은 짐작도 못했네---. 여지껏 도통 자기 부인

이야기나 자식 이야기는 하지 않았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박 교수는 신발 장사하는 박 회장의 탐욕스런 눈빛과 입맛 다시는 시늉을

힐난하면서도 궁금증은 누를 수가 없었다.

신발 장사라고는 하여도 사실은 중국에서 컨테이너로 미국 상표의 명품을

들여오는 그의 사업 규모는 여간이 아니었다.

"궁금하지? 그럼 내일 모레, 여주에 있는 내 농장으로 한번 와봐. 그 때 그

여자도 나타날테니 한번 구경해보고 아울러 김완기네 가정 사정도 좀

알아볼 수 있을거야---."

 

이런 대화 끝에 박교수가 김완기의 여인을 만나보게 된 것도 벌써 몇해전

일이었다.

대략 김완기가 풍을 맞기 3년전 쯤이었을 것이다.

그 때가 계절로는 6월이던가, 신발 장사, 박 회장은 평소 자랑해 마지않던

여주 농장으로 박 교수를 초대하였다.

땅의 일부는 절묘하게 국도에도 면해있는 만평쯤 되어 보이는 야산 자락의

밭이었는데, 또 한쪽으로는 개울물까지 흐르면서 그림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빈포 초등학교 동기 하나를 더 불러서 자기 승용차에 태우고 박 교수는

초여름 유월의 농장을 반은 견학하는 기분으로, 또 반은 호기심을 마음에

담고서 찾았던 것이다.

전원주택이란 누구에게나 꿈같은 대상이 아니던가.

꽤 넓은 농장의 한쪽에는 페인트 색갈이 울긋불긋 조악한 농가 주택이

자그마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밖으로는 남자 신발 둘과 플라스틱

여자 샌들 하나가 우선 그들을 맞고 있었다.

박 사장의 아우디 외제차와 김 사무총장의 무쏘 중고차도 뒷곁에서 낯익은

체를 하며 그들에게 인사하듯 파킹되어 있었다.

 

 

"이 자슥들아 손님이 오셨는데 나와서 인사도 없어?"

함께 간 동기생이 소리를 질렀다.

한여름인데도 문을 꼭꼭 닫고 있는 농가 주택의 모양새로 봐서는 아마도

에어컨을 틀고있는 것 같았다.

밖의 아우성에 안에 있던 세사람이 쏟아져 나왔는데 두 남정네 사이에서는

정말로 예쁜 중년의 여인이 허둥지둥 옷을 매만지고 뿌시시한 머릿결도

쓰다듬고 있었다.

놀랍게도 박 사장이 그 여인의 허리를 손으로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초여름 햇살에 눈이 부시다는 표정을하며 박 사장의 손길을 풀어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장면들이 빈포 초등 동기생들의 세계에 장 여인이 등장

하는 순간이었다.

남정네 넷과 장 여인은 그 초여름의 하루를 농가 주택에서 잘 지냈다.

여인은 닭도리탕을 맛있게 끓여놓았고 삼겹살도 잘 구워내었다.

낮부터 술추념이 벌어졌는데 농주를 조금 마신 박 교수를 빼고는 모두

소주를 했는데 나중에는 모두들 콜라와 소주를 섞어서 마시기도 했다.

술을 마시는 중에도 박 사장은 연신 그 여인의 허리로 손이 들어가서

도대체 이 여인이 어느 남정네의 현 주소인지를 의아하게 하였다. 

 

그 의아한 분위기를 술이 좀 돌자 그나마 김완기가 소리를 질러서

깨보려고 들었다.

"이놈아, 느그 형수님 좀 그만 주물럭거려라! 주물러터지겠다!"

내용은 포효 비슷했으나 워낙 음정이 얕아서인지 그 말은 신발 장사에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야 임마, 내가 이 작은 댁 조카 아이들에게 고급 스포츠화를 얼마나

신켰는데. 그게 한 켤레에 십만원이 넘는 것들이야. 본전 찾으려면 아직

멀었어."

 

낮 술이 해가 넘어가는 각도만큼 과하게 넘어갔다고는 해도 저질 수준이

정도를 오버했다.

여인이 참다못하여 풀어진 치마끈도 무시한채 와장창 일어서는 서슬에

쭈구러진 주전자가 신발 사장의 반쯤 내려진 지퍼 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쭈구러진 주전자의 용량이 그렇게 대단한가.

콜라 색갈로 은폐된 혼합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 사장의 바지 가랭이

사이로 폭포수 처럼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에헤이, 이 여자가!"

박 사장이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손 바닥으로 허공을 한번 가르더니

다시 낄낄 웃었다.

"그래 이 여편네야, 일어선 김에 밖에 나가서 고구마 순이나 잔뜩 따가거라.

반찬으로는 일품이잖아. 어이 박 교수랑 자네들도 좀 따가고---."

그는 휘청거리면서 자기는 농약 분무기를 어깨에 지더니 한 손으로는

풀무질을 하며 고추밭 쪽으로 갔다.

 

"저 사람이 순 막 되먹은 불한당이예요."

그녀가 박 교수에게 가만히 소리쳤다.

그녀는 분노와 술김으로 가쁜 숨을 모았으나 목청만은 나즈막했다.

천성이 그런건지 스포츠 화의 위력 때문인지는 박 교수에게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고구마 순을 딴다는 말의 낭만성에 혹해서 박교수와 또 함께 간 친구도

밭으로 나가서 쪼그려 앉아보았으나 금방 땀이 비오듯 하는 상황에서

한시를 버틸수가 없었다.

"어이, 박 교수, 여기 이 고구마 밭은 자네들이 나 올 데가 아니야. 얼른

들어가서 에어컨이나 틀고 앉아있어."

김완기 사무총장도 장 여인처럼 한 껏 목소리를 낮추어 두 사람의 동기들

에게 들어가라고 권하고는 자기는 그 여인과 함께 열심히 고구마 순을 땄다.

"이게 순 저 사람의 농간이랍니다. 지금이 고구마 순을 딸 때거든요. 그래야

쓸만한 고구마가 영글어요. 그 일을 우리에게 시키는 셈이지요. 저 자의

수법이 항상 이래요."

장 여인의 목소리에 독기가 들어있었다.

 

"에헤이, 장 여사. 내 욕했지? 파라치온을 확 뿌려버릴까보다."

신발 사장이 귀도 밝았다.

"뿌려봐요, 뿌려봐."

장 여인이 티셔츠 아래로 젖가슴을 출렁이며 유월의 저녁 햇살 아래로

대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