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끄댕이를 잡아 당기지는 않았지만 한 판 난장이 시골 농가 주택을
휩쓴 셈이었으나 나이 탓인지 돈의 위력인지, 결말도 없이 결말은 쉽사리
찾아와서 고구마 밭에는 얼른 고즈넉한 정적이 깔렸다..
해가 뉘엇거리자 고구마 순따기도 대략 끝나고 일행은 다시 남아있는
닭도리 탕과 삼겹살로 "소콜주", 그러니까 소주에 콜라를 탄 술을 마시고
밥도 조금씩 먹었다.
여름이라지만 어쨌거나 해거름이 되면서 어두움은 금방 찾아왔고
박 교수와 또 동행한 동기 한명이 귀가를 서두르며 일어서자 장 여인도
따라 나섰다.
김완기 사무총장은 술이 취하여 벌써 인사불성으로 누워있었다.
"헤헤이, 장 여사는 여기 김 총장과 함께 자고 가야지."
박 사장이 뒤에서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으나 그녀는 막무가내로
박교수 일행을 따라나섰다.
"우리는 서울까지 가지않고 신도시로 빠집니다."
박 교수는 입장이 다소 난감하여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 여주, 이천만 빠져나가면 되어요, 저는."
그녀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술을 별로 마시지 않은 박교수가 핸들을 잡고 세사람은 농장을 빠져
나왔다.
장 여인은 조금 과음을 한 수준이었다.
"제 모습이 흉칙하죠?"
그녀가 승용차의 뒤쪽에 혼자 앉아서 혀를 몹씨 꼬부리며 자학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량은 알리 없었지만 아무래도 과장이 들어있었다.
"제가 막된 여자 같죠?"
그녀가 역시 낮은 음으로 말했다.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춤도 춥니까?"
함께 간 동기가 자기 수준에서 말을 받고 붙였다.
"저 코메디안 아니예요. 땐서의 순정도 없고, 으흐흐흐."
박 교수가 어둠 속에서 뒷거울을 보았으나 그녀가 웃는지 우는지 분별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두가지 감정이 모두 그 낮은 괴성 속에 포함된 듯하였다.
"제가 사실은 김 계장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요."
그녀가 김완기와의 인연을 풀어내었다.
영업용 기사이던 남편이 교통 사고로 죽고나서 자식 둘과 망연히 있는데
마침 시청의 김 계장이 불우 이웃 돕기 담당이 되면서 아이들 둘의 중,
고등학교 학비를 시청 장학금으로 대어주었다.
그의 능력이 그쯤에서 그칠 때, 박 사장이 현찰로 도움을 또 많이 주었다는
것이다.
"아까 그 스포츠 운동화 이야기는 새발의 피고요---."
큰 딸은 박 사장이 아는 곳에 취직을 시켜주었고 둘째인 아들은 전문
대학에 진학을 시켜 주었다.
"저는 이미 김 계장님하고 살을 섞었거든요. 이상한 사이라기 보다 우리는
결혼을 한 셈이었어요. 그 분 사모님이 원래 선천성 간질 환자이잖아요.
속아서 결혼을 했나봐요. 객지에서---."
"아, 지랄병 말입니까?"
박교수의 동기가 또 툭 튀어나왔지만 대화의 내용은 오히려 간결해졌다.
"네, 그래요. 그래서 자식도 없잖아요. 교수님 앞에 문자를 써서 죄송하지만
찰스 램이라는 영국 수필가의 드림 칠드런이라는 책 생각이 나더군요.
간질 환자인 누이를 평생 보살피려고, 또 피 속에 흐르는 유전병을
막으려고 결혼도 하지않고 살았던 찰스 램 이야기를 제가 읽고 김 계장님
께도 위로삼아 들려주었어요. 정말 애틋한 이야기더라구요."
"그 친구가 채금감이 강해요. 아, 내 친구 김 총장 말입니다."
다시 박 교수 친구의 간결한 언급이었다.
"네. 그래서 제가 그 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고 우리는 결혼,
아니 재혼을 한 셈이었지요. 그런데 김 계장님께서는 우리가 몸을 섞은
얼마 후에, 이번에는 친구되시는 그 박 사장을 소개하면서 일단 도움을
받고 나중에 갚으면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저야 막연한 친구라니까
감사하게 호의를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갈수록 너무나 노골적으로 박 사장께서 저에게 덤벼드는거예요.
친구간에 그럴 수가 있어요?"
"김 총장이 장 여사를 막연하게 팔아먹었네."
또 따라온 친구의 간결사였다.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 마구하지 말게."
핸들을 잡은 박 교수가 친구의 막말을 막았지만 내심으로는 그도 의문이
없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막말은 하지 마세요. 사실은 김 계장님이 아프셔요."
장 여인의 말이었다.
"어디가요?"
따라온 친구의 급한 물음이었다.
"혈압이 있어요. 한번 쓸어지기도 하셨고---."
"그런데도 그렇게 술을 마시나?"
또 친구의 말이었다.
"가끔 오늘 보신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을 때에는 어쩌겠어요. 약은 계속
드시지만."
김완기는 그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 할 때면 술을 마시고 또 목각을
깎고 하면서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돈많은 친구에게 내연의 처를 맡길 궁리도 그 목각 깎는 과정에서 천천히
생겨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박 교수는 운전을 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무는 어디서 깎아요? 아파트 같은데에서 그런 짓 하기도 힘들텐데---."
따라온 친구가 쾌도난마로 물어보았다.
"아, 목각 공예 말이군요. 초벌 깎기는 아무데에서나 하지만 마지막
형상 다듬기는 꼭 제 집에서 하지요."
"댁이 어디신데요? 그런 일 하려면 단독 주택인가 봐요?"
"네, 단독 주택이지요."
"위치가 어디신데요?"
"청산에 살아요."
정말 차는 어둠 속에서도 청산을 앞에 놓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 친구와 저는 수지 쪽에 삽니다. 청산으로 모시려면 어디로 갈까요?"
박 교수가 물었다.
"수지 사신다면 제가 수지 맞았네요. 가깝군요. 덜 미안하게 되었어요.
저기 경기대학 들어가는 방향 쪽에 잠시 세워주세요. 지금은 안되겠고
언젠가 때가 되면 청산으로 한번 들어오세요. 찾기 쉬워요.
경기대 들어가는 쪽에서 광교산으로 들어오시다가 목각이 가득한 집을
물어 보시면 많이들 아실겁니다. 다만 오시라고 기별이 갈 때에 오세요.
그 전에는 절대 못 오십니다."
그녀는 높고 푸른 어떤 산 아래에서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햇수로 3년, 만으로는 2년이나 되었을까, 김완기 사무총장은
풍을 맞고 쓸어졌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삼년 기간에 그날 뭉쳤던 네 사람은 마치
비밀결사나 차린듯 그날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치 않고 지냈다.
박 교수의 존재가 방패가 되었는지 신발 장사하는 박 사장까지도 아무 말
없이 지냈다.
마침내 그가 쓰러진 올해에도 광복절 운동회는 속절없이 찾아왔으나
사무총장의 노력과 연락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재경 빈포 동기들은
반이나 고향으로 내려갔을까.
박교수도 물론 불볕 더위에 고향을 찾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들이 그렇게 미친듯이 고향을 찾았던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어쩌면 김완기의 의지에 신들려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박 교수까지도 그런 생각이 드는 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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