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포 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상경기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설이다.
더우기 나레이터를 달리하면 같은 이야기도 서너가지로 확장될 수 있다.
이번에는 빈포 초등학교 출신으로 국문학 교수를 하는 박교수의 입을
빌어본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일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이야기의
전개 형식은 "1인칭 시점"이 아니라, "작가 전지적 시점" 비슷하다.
박교수를 미리 언급하고 동원하는 것은 팩션의 묘미 때문이다.
팩션이란 모름지기 팩트를 강조하면서 슬그머니 픽션을 이야기하는
형식이 아니겠는가---.
빈포 초등학교에서는 해마다 광복절이면 총 동문회 주관으로 운동회를
개최한다.
삼복 더위에 무슨 놈의 운동회냐고 따지는 동문들도 초기에는 많았으나
봄, 가을 행락철에 누가 꼴난 초등학교 운동회에 올 것이며 눈내리는
겨울철에 한다면, 이 바닷바람 거친 땅에 얼어죽으러 올 (년)놈이
있겠냐고 십여년 전 처음 행사가 출발하던 때의 총 동문회 회장이
대갈일성하는 바람에 잡소리가 쑥 들어가버린 역사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여름 운동회가 웬일이냐는 항의를 한 축들은 대저 후원회 회비같은건
한 푼도 내지 않는 족속들에 다름아니었다.
아무튼 이야기의 주인공 격이 된 이발관 주인의 재경 동기들도 자신들의
성공 사례를 고향 땅에서 확인 받을 겸, 가급적 이 날을 기려서 머나먼
남쪽 나라 빈포 땅으로 모여드는 것을 연례 행사로 하였다.
이제는 나이들이 50줄에 접어 들어서 이 사람들도 젊잖은 흉내들을 낼 줄
알게 되었지만 40대 초에 시작된 이 행사에 처음 참가할 때의 분위기는
가관이었다.
그 먼길을 "남반" 출신이나 "여반" 출신이나 모두 자가용 승용차를 끌고
내려오는 추태도 있었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추세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잡힐 때 쯤에는 난데 없이 남녀 동기들이 "삼천포로 빠진다"는 풍설이
돌면서 다시 물을 흐리기도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고하면 그동안 멀쩡히 잘 지내던 남녀 동기들이 1박 2일
객기가 발동하여서인지, 집에다가는 고향 방문 일정을 2박 3일이라고
해놓고는 하룻밤을 빈포 인근의 삼천포의 모텔에서 남녀 동기들끼리
얼렁뚱땅하고 왔다는 야설이 그것이었다.
무슨 시골 운동회에 2박 3일이나 되는 "장기 휴가(?)"를 각자의 집에서
결재 받아올 수 있느냐고 할지 몰라도 오랜만에 친정으로 혹은 본가로
내려간다는 겸사 겸사의 의미를 들이대면 어느 남편이나 마누라가 막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집안에 따라서는 일주일씩 최장기 휴가를 얻어내는 경우도 있는 모양
이었다.
그런데 이런 천혜의 조건과 상황에서도 야설이 터져나온 것은 부부가
모두 빈포 초등학교 출신이라서 막말로 달리 재미나 장난을 칠 궁리를
만들지 못한 가문에서 사실반, 만든말 반으로 "삼천포로 빠졌다"는 야설이
유포된 모양같았다.
고약할 손, 조건이 같았어야 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로 백년해로할 부부가 갈라섰다는 사례는 나타나지
않았고 운동회 행사가 위축되었다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금년만은 이발관 동기들의 졸업 기수에서는 예년의 성황 보다는
다소 위축 현상이 오고야 말았다.
그동안 회장은 두해에 한번씩 바뀌어가며 금전적 과시의 기회를 동기들에게
공평히 배분해왔는데 실질적인 노력 봉사, 가령 연락 책임이라던지 특별
찬조금의 징수, 대중 교통 티켓의 단체 구입등등을 완벽하게 해오던
김완기 사무총장이 금년초 어느 몹씨 추운날에 그만 풍을 맞고 쓸어진
것이었다.
이제 동기들 간에는 막 자녀들의 혼사도 시작되었고 연로한 부모님들이
별세하시는 당상도 슬슬 일어나는 중요한 시점에 김 사무총장이 이렇게
쓸어지고 나니 광복절 운동회 참석이라는 빛나는 전통은 그만 바람빠진
풍선 꼴이 되고 말았다.
재경 회장 감투를 막 쓰게된 신발 가게하는 박청도 사장은 사무총장을
갈아야한다고 펄펄 뛰었으나 풍 맞은 친구를 야박하게 갈아치우자는
운동에 참여할 사람은 없었고 당장 그 사무총장 직을 맡을 후임 인재도
주위에는 없었다.
어려울 때가 되니 사람 값이 더 돋보였다.
김완기 사무총장은 학벌이라고는 사실 빈포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상경을 한 이후에 경기도의 어느 중소 도시의 시청에서 사환
노릇을 하면서 야학과 통신 강의록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당당히
공채 과정을 거쳐 그 시청의 지방 공무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동기회 사무총장을 오래 맡았으니 일 처리하는 성의와 정성이
보통 아니었다.
다만 그는 능력은 많았으나 항상 청렴하여서 가난하였고 그러다 보니 무슨
돈이나 물건으로 동기회에 기여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또 그의 자랑이었으며 언젠가는 청백리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헌신적 활동으로 동기회는 항상 활기에 찼으나 돌아가며 하는 회장들은
적은 돈, 작은 생색으로 그를 머슴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 돈 버는 일 말고는 모범이 없고 터가 좁고 가난했던 마을에서 자란
배경에 걸맞고도 어울리는 작태였으나 그는 대범하였다.
그는 여러 방면에 재주가 있어서 피리와 퉁수도 잘 불었고 묵화도 잘 쳤다.
그런 쪽의 재능이 남들의 평가를 받아내자면, 아니 본인의 자부심을
지탱 시키려면 여러가지 자기 신분 조건이 뒷밭침해야 한다는걸 깨달은
탓일까, 그는 그때까지 "해오던 지랄"은다 때려치우고 새로 목각 공예를
시작하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늦게 시작한 탓에다 고급 공예로 마무리하기에는 돈과 시간과 특수 기술이
뒤따르지 않아서 그의 "새 지랄"은 도예로 치자면 항상 초벌구이 정도에
머룰렀지만 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항상 경이와 신선함이었다.
공짜로 그의 목각을 건네받기가 뭣하여 박 교수는 약간의 선물을 답례로
보냈으나 그런 염치도 없이 널름 받아먹고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친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박 교수에게도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을 주는 일은
없었다.
매일 저녁마다, 그리고 주말이면 하루종일 나무를 깎는 그의 재주와 정성
으로 보아서 목각은 꽤 많을텐데도 그는 다른 경우와는 달리 남주는 일에
인색하였다.
"도대체 그 작품들을 다 어디다 두는거야? 그 놈의 집이래야 광교산 아래
열댓평 임대 주택인데---."
박 교수가 박 회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하하, 내가 좀 알지. 비밀이야. 장 여사라고 그 여자 집에 좀 있지."
"아니, 그 친구에게 여자가?"
(계속)
'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산에 살리라 (세번째) (0) | 2006.08.25 |
---|---|
청산에 살리라 (두번째) (0) | 2006.08.23 |
7월 4일의 모감주 나무 (0) | 2006.07.09 |
(팩션) 월드 컵 축구 탓 (2회중 마지막) (0) | 2006.06.19 |
월드 컵 축구 탓 (0) | 2006.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