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가 점모기"하필이면 '좋구먼!'인가"'샘가의 카페'라는 인터넷 사이버 카페에서 점심 번개, 또다른 말로 '점모'를 소집하면서,장소를 정신문화연구원 인근의 '좋구먼'이라는 곳으로 정했다는 공지 사항이 나오자 처음에 나는 낭패하였다.시내에 사무실이 있는 나의 입장이 첫 번째 낭패의 이유였으나 사실은 '좋구먼' 인근에 얽힌 나의 과거사 때문이었다.물론 가지 않으면 될 터였지만 이번 기회에 내가 꼭 가보아야 할 사연이 따로 있었으니 "시내"라는 닉을 쓰며 이 문학 카페에 어느 아침에는 온유와 절제를또 어느 저녁에는 길길이 격정의 불길을 지피는 어느 여류시인을 만나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런 일이라면 나중으로 미루어도 될 것 같지만 S그룹의 전무이사로있는 나는 곧 상해에 있는 그룹의 현지 법인 대표이사로 떠나야할 처지였다.하긴 내 나이에 사이버 카페에 출입을 하고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 관심을 갖는 일이 좀 어줍잖은 행동인 듯 자책도 되었지만,젊은 시절의 나를 항상 사로잡았던 준거의 기본은 바로 문학 청년의 위상이 아니었던가.YTN에 나가던 내 친구가 '인터넷 다음'에서 운용하는 '카페'라는 존재를 알려주고 자기가 가입한 어떤 카페를 소개하여 주었을 때 나는 금방 허겁지겁 몰입, 탐닉하였는데,그 과정에는 아마도 나의 이런 이루지 못한 문학청년 기질이 내심 동면하고 있다가 갑자기 날개를 달고 지표, 지상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하지만 이 낯선 신세계도 인간이 만드는 세상이라 하찮은 일로 구성원들 간에 갈등이 생겼고 나도 그 카페의 무의미함에 싫증이 생겼을 무렵, '샘가의 카페'에서 초대장이 왔던 것이다.내 글이 관찰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일종의 스카웃이 된 셈이었다.나 스스로 찾아본 이런 저런 문학 카페라는 데가 너무 경직되어 있었거나 한두명의 기성 문인들이 쫄개들을 데리고 아성을 쌓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이 곳 "샘가 카페"는 순수 문학적 열정으로 분투 노력하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아이큐가 네자리 숫자 쯤은 되어 보이는 지적 게릴라들이 종횡으로 준동하는---, 아, 묘사하자면 가슴이 벅찬 곳이었다.내 어이 이런 신천지를 몰랐던가, 이 나이까지 헛 살았네,탄식을 하며 이 신계지를 살피는데 과연 헛 살았다는 최초의 느낌은 갈수록 정확하였다. 구성원들의 나이는 대체로 40대, 아니 20대와 30대도 적지 않았으니 막말로 지적 영계들의 놀이터가 아니던가---.더우기 문학청년 시절의 꿈으로 가득찬 산문들을 새삼스레 샘가 카페에 올려보니 일반 카페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평론과 격려와 예리한 질타의 반응이 나오는데 이제 이런 물을 맛보아놓고 여기에서 발 빼기는 글렀다는 황홀한 탄식이 절로 나왔다.더욱이 '시내'라는 회원의 인생을 체념한 이후에 도달한 달관과 내관으로 가득한 탁월하고도 고아한 시!결혼치 않고 19세기를 살다간 미국 동부의 에밀리 디킨슨의 내관적인 시가 이러했던가.내가 몰래 치마를 들추듯 슬그머니 시내의 정보를 살펴보니 맙소사, 시내는 방년 스무살이 아닌가.정말 내가 세상 헛살았구나. 문학 청년 시절을 욹어 먹는 것도 이제 끝이다. 사업계의 장똘뱅이 노릇이나 착실히 해야겠구나.탄식과 절망의 첫 반응 이후에 나는 그녀의 신상이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로맨스 그레이의 욕망까지 능청맞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물론 마음 속에서만---.한 스무해 전쯤,뜬금없이 신애(信愛)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내가 미국의 '골드만 삭스'라는 인베스트먼트 뱅크에서 동아시아 쪽을 맡고 있을 때였다. 동아시아 파이낸스의 최일선은 홍콩이었지만 나는 지금은 무너진 맨하탄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는 본사에서 최종 애널리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당연히 한국 방문이 잦았다. 카알라일 증권의 한국 책임자가 인터넷에 엉뚱하게 접대 문화의 체험을 썼다가 망신을 당한 그런 체험을 나도 무시로 겪었다.그 때 알게된 강남 카페의 젊은 여사장이 신애였다. 몸을 섞은 후에야 내 아내가 난소 부전으로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계산된 몸사랑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나는 화약냄새와 피와 살쩜이 나뒹그는 금융 전장터에서도 다시 연봉 인상을 받으며 '모건 스탠리'로 자리를 옮겼고,일찍 부여받은 파트너라는 고위직에서 마침내 어쩌면 중소 규모 파이낸스 회사의 CEO 제의도 받게 되리라는 미래를 염두에 두면서 마침내 일상생활에서도 몸을 사렸고 당연히 신애와의 관계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면서 끊어졌다.신애와 내가 한창 정열을 불태울 때는 신애의 문학 소녀 취향과 나의 이루지 못한 문학 청년의 꿈이 녹아서 자정이 넘은 강북 도심의 호텔에서 별 밤을 헤는 날들이 잦았었다.비슷한 DNA를 소유한 자들이 몸을 섞었으니---.소생이 있다면 시인이리라."'좋구먼'이 얼마나 걸릴까?"내가 기사에게 물어보았다."40분 밖에 안걸릴겁니다."안 가본 데가 없는 내 기사의 답이었다. 신중한 답변이 그렇다면 30분에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오늘 점심은 그곳에서 하세."'좋구먼'이 있는 곳은 정신문화 연구원이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최근에 그 '정문연'에서 숙박을 하며 경영인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는데,예전에 신애와 데이트 드라이브를 하면서 가끔 차를 세우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던 저수지가 그대로 있었고 그 위로 그 이름도 독특한 '좋구먼!'이라는 음식점이 새로 태어나 있어서 추억 있는 사람의 심금을 아리게 하였었다.생각해 보니 진한 키스 만이 아니었다.아니야, 그 때의 상황은 키스 이상으로 진전 되어서 몸이 달고 체열을 참기 힘들어서 마침 내리는 비를 뛰어나가 맞으며 체온을 식히기도 하였지.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20여년전의 안양 국도 안쪽 상황이 그러하였다.비 오는 교외길이 한적하여서 과거를 반추하는 사이 다이네스티 구루마는 정오 10분전에 '좋구먼'에 도착하였다."인덕원 쪽으로 돌다가 정각에 들어가세."사업상 써먹던 내 오랜 버릇이 순수한 문학 서클 동네에서도 발동하였다.마침내 정각에 나는 그 음식점 지하에 있는 '하늘 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의 '하늘 실'이라---, 지상에는 '카타콤베 실'이 있으려나.실없는 생각으로 긴장을 풀고 하늘실로 들어가보니 10여명의 남녀 회원이 약간은 어색한 몸짓으로, 그러나 얼굴에는 전혀 꾸밈새가 없는 선한 인상으로 나를 맞아주었다.카페 가족 사진난에서 익혔던 주인장의 모습이 익숙하게 들어왔고 운영자 두분의 얼굴도 친숙한 윤곽으로 닥아왔다.만방에 문을 활짝 열어둔 이 사이버 카페에 이렇게 얼굴을 내어 놓아도 되는지, 남의 일에 걱정이 앞선적도 있었지만 이 순간만은 우선 '좋구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연배를 보아주어서인가, 첫 출입에 대한 대접인가, 나는 가운데 자리로 안내 되었다.내 옆에는 아주 애띤 얼굴의, 더우기 얼굴의 윤곽이 아주 익숙, 친밀하게 내 가슴에 묻어들어오는 여인이 자리하게 되었다. "시내가 틀림없을거야---."분위기를 살피니 다행하게도 모두가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이런 저런 카페 방에서 글쟁이나 예술 딜레탄트들로 이리저리 연결되어 선택하고 간택되어 형성된 사이였다. 내 마음이 편해졌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진행되고 있는 대화의 범주 속에서 나도 이미 한통속이 되고 있었다.유쾌한 공범자이거나 아니 동업자가 맞지---.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튀는 대화에 모두 낄 수는 없었으나 또 상대적으로 나이가 든 사람들의 은근한 목소리에 화음으로나 백 뮤직으로 내 언사도 손색은 없었다.아니야, 내가 여기에 화음을 넣으러 온게 아니잖아---.'신애' 특유의 갸름한 얼굴과 저 큰 눈을 빼박고 있는 '시내'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지 않은가."시내님은 어디 사시나요?""신도시에 살죠."신도시도 많으련만---."젊은 나이에 이미 결혼을 하신 것 같던데---.""신랑도 어려요, 호호호.""부모님은?""네에?"시내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이 중년 남자의 말속에 야유나 혹은 일말이나마 유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가를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동공의 확장이었다."아, 너무 어려 보여서 문득 보호 본능 같은게 생겼달까요, 하여간 실언한 것이죠."내가 사과하였다."아뇨. 전혀 실수하신 것 아니죠. 분위기가 그렇게 변전한 과정 이해하고도 남아요. 그분들은 일본 사세요."내가 물어본 부모님들이라는 표현 대신에 '그 분들'이라는 거친 묘사가 묘한 뉴앙스를 풍겼으나 이제 나에게 더 이상의 실수를 위한 질문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일드한 옐로우 카드를 나는 이미 접수한 상태가 아니던가."젊은 분이 어이 그런 관조의 시를 쓸 수 있나요?""에밀리 디킨슨의 내관적 시와 동질적이라는 평을 꼬리말로 달아주신적 있지요?""그래요. 엘리엇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를 써서 중년 남자의 한숨 소리로 한 재미 본 것도 20대였지요.""호호호, 전 사실 실비아 플라쓰를 더 좋아하거든요."그녀가 밝게 웃으며 주장을 폈다."시내 새댁의 맑은 얼굴에 그 시인의 이미지가 꼭 어울리지는 않네요. 그녀는 자살했잖아요."내가 딸을 나무래듯 그녀의 주장에 간섭하였다."어릴적부터 저는 그런 충동을 많이 느꼈지요. 실비아 처럼 생래적인지 후천적 환경 탓인지는 몰라요. 그래도 지금은 젊은 신랑이 있어서 어느듯 쾌유되었지요. 호호호."그녀의 얼굴은 밝았다.코스로 먹는 한정식이 음식을 내올 때마다 맥을 가끔 끊었으나 새로운 음식의 이어짐이라는 맥락에서 어색함에 대한 구원의 경우도 되더니, 마침내 술이 들어오면서 만사는 형통이었다.기지 넘치는 언사가 공중을 가르고 촌철살인의 만담이 배꼽들을 모두 분리 수거하여 식탁에 올려놓더니 이윽고는 시 쓰는 사람들 여럿이서 자기의 대표작을 어색하지 않게 낭송하였다. 분위기가 좀 생소, 기이하였으나 격조는 한껏 높아졌다. 시간이 흐르고 먼저 자리를 뜰 순간이 되었다. "저는 곧 샹하이로 떠납니다. 제가 한때 문청이었다는 사실이 이 곳에서 가슴 절절히 확인되었군요. 즐거웠습니다."시내가 시집을 나에게 건넸다. 속 표지에 붓글씨로 헌사를 넣어주었다.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서체도 만만치 않았다.남녀 회원 모두가 서로 빼앗듯이 자기 이름이 쓰여진 시집을 받았다. 그리고 호수가로 나가서 커피들을 마실 채비를 차렸다. 폭풍 예보 속에 비가 조금씩 더 내리기 시작하였다. 노래방 같은 곳 보다는 회원중의 한 사람이 운영하는 음악 카페로 가자고 의견이 모아지는 듯 했다. 나처럼 일찍 직장으로 떠나야할 사람들도 있었고 이제야 이 곳으로 찾아오는 핸드 폰 소리도 있었다.시내의 눈길이 내 얼굴에서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유추는 서로 불가능하였다.석별의 인사를 보내주는 회원들의 얼굴에는 창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독특한 예지와 선함과 장난끼 어린 모양들이 선연했다.돌아오는 차안에서 카폰으로 강남의 카페, "돈텔 마마"의 박 마담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어디갔다 오세요? 비서실에서 어디 나가셨다는 말만---.""어, 카페에서 모임이---, 아니 아니야.""낮부터 카페 다니세요. 팔자 좋으시군요.""허튼 소리말어. 나 지금 바뻐요.""한동안 나가 계시는 모양이던데 우리 카페에서 석별 파티 어때요.""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지."내가 대학 다닐 때 들었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마지막에 주인공 제이크 반즈가 내뱉은 어정쩡한 가정법의 대답과 똑 같은 소리를 하였다.그 상황은 이룰 수 없는 현실적 사랑에 대한 주인공의 반어적 표현이었다.그러나 나는 이내 나의 가정법 답변에 단호한 평서문을 보태었다. "마담, 그런데 지금은 안되겠어.""섭섭하네요. 좋은 카페 하나 개발하셨나보다.""응, 그랬는지도 모르지---."내 대답도 결국은 가정법으로 돌아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