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으면서도 그녀는 그냥 독신으로 지냈다.
강민경이 살아있을 때에 공갈을 친데로 "깨끗한" 청년들이 주위에
많이 나타났으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독신을 고집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유행처럼 불기 시작한 초등학교의 조기 영어 교육
바람을 타고 TESOL, 그러니까 "영어 습득 교육학"이라는 분야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러 미국으로 갔다.
교육부에서 장학금을 일부 지원하고 휴직 상태를 인정해주는 좋은
조건의 파견교사 시험에 합격을 한 것이었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어떤 대학에서 "티슬" 과정에 도전을
하면서 그녀는 자마이카 출신의 피부색이 짙은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을 하였다.
그렇게 싫어하던 "섬" 출신에 피부색까지 짙은 외국인과 결혼을
하게되었으니 그녀는 전생에 "섬"과는 무슨 필연적 업보, "필업"
같은게 있는 모양같았다.
아무튼 남편이 된 사람은 성취동기가 아주 높아서 툭하면 자마이카
출신인 당시 중동 전쟁의 영웅 파월 장군을 들먹였고 나중에는
라이스 국무장관도 자랑의 메뉴에 집어넣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사랑이 열정으로 불타오르며 이런 메뉴들은
이방에서의 인간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했고 어쨌든 그녀는 그
결혼의 부산물로 미국 영주권, 그린 카드를 얻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TESOL 박사학위는 땄으나 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일도 아니고 또 장학금을 댄 교육부와의 조건도
있고 하여서 그녀는 귀국을 하여 일정 기간 다시 교직에 근무
하게 되었다.
갑자기 원어민 교육이 강조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지며 두 사람은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정씨 성을 되찾았지만 연분홍 빛 그린카드는 반납하지
않았다.
자마이카 출신의 남편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영어는 물론이려니와 강민경 이후 감추어 덮어놓았던 섹스의
세계까지도---.
아마도 G-spot이라는 은밀한 말과 그 밀교적 지역, 그곳에서
수행되는 절정의 의식과 경지도 모두 그가 깨우쳐주었던 것 같다.
"TESOL"이 관념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 학문이어서 오관은 물론
온몸의 바디 랭귀지를 사용하는 습득 체계이듯이,
"G-spot"도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으며 온몸의 떨림이 필요한
생리적 미학이었다.
귀국 후 의무 복무 기간동안에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서 교육부
산하의 영어 조기 교육 연구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부문에서 영어 조기 교육 관련의 연구직도 수행
하다가 일선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을 때에는 영어 전담 교사로
이론과 실제를 병행하는 경력도 쌓았다.
그녀는 곧장 이 방면의 전문가로 대접을 받았고 TV와 라디오
강의도 하였으며 교재도 여러 권 발간하였다.
그녀는 연구와 교재 발간을 위하여 방학 때마다 미국 출장을
가면서 영주권 유지를 위한 절차도 자연스레 해결하었다.
출장지에서는 자마이카 출신의 전 남편과도 연구 분야가 비슷하여
만남이 자연스레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공식적인 자리로 국한되었다.
그의 탐욕에찬 유혹에 그녀도 몸이 떨렸으나 자존심이 그에게로 향하는
길을 막았고 함께 간 일행이 또한 항상 방패가 되었다.
"정 선배, 도대체 뭐요. 전 남편이 이 방면의 국제적 신진 학자라 칩시다.
한번 헤어진 후에도 다시 이런 자리에서 밍기적 거리면 더티한
야합입니다.
야합은 이쪽 저쪽 변경을 왔다갔다하는 변경인, 혹은 경계인들이 흔히
벌이는 작태랍니다.
재결합을 위한 진지한 자세라면 내가 말도 하지 않겠어요."
"박 선생, 할 말은 없네. 그래도 경계인에다 야합이라니 좀 심하군."
박준수 선생은 수도권에서 교대를 일등으로 졸업하여 영어 조기
교육 연구원에 막 부임한 젊은 교사였다.
정진주 보다는 일곱살이나 나이가 젊은 학구적 면모의 청년 교사
였다.
같은 연구원에 근무하다 보니 미국 출장을 몇번 함께하며 정진주의
사정을 잘 알게된 사이였다.
그의 맑은 얼굴과 마음이 아니었으면 정진주의 출장지에서의
일상은 조금 망가졌을는지도 몰랐다.
"내가 전 남편에게 밍기적거리는게 보여요? 하지만 박 선생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내가 남자를 모르는 생과부도 아니고, 하하하."
그녀는 민망하여서 남자처럼 하하 웃었다.
"정 선배님, 그러니 제 품으로 오시라는겁니다. 이거 출장지에서의
유혹이 아니라 정식 프러포즈입니다."
"이보게, 막내동생. 누님을 이런 식으로 놀리면 귀국하여서 성희롱
으로 보고서에 올릴거예요."
"정 선배님, 요즈음 '누나 여보'라는 유행어가 있다는 것도 모르세요?
년상의 아내가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이 사람, 박 선생. 그래서 박 선생도 큰 일이라는거요. 그런 유행
트렌드에나 빠져서 칠년 연상의 이혼녀를 유혹하다니---."
그러나 정진주는 박준수의 접근이 일시적 장난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진지한 청년이어서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끌리게하는 것
그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런만큼 미국 출장은 시스템 자체가 어쩔 수 없어서 자주 동행이
되지만 한국에서만은 사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그녀는 애써
그의 여러가지 제안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가 어느날 "독사모"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무슨 입회원서 비슷한
것을 들고 왔다.
"또 장난이야? 독사모가 모야?"
그녀가 입술을 모아서 말하며 장난처럼 물었다.
"정 선배! 독사모도 몰라요? 독도를 사랑하는 모임이라구 자연보호
연합회의 산하 모임인데요. 정말 독사처럼 독한 마음으로 독도를
지키자는 모임이지요."
"으이그. 난 뱀이라면 질색이라오. 난 좀 빼줘요."
"거 봐요, 정 선배는 역시 경계인에 다름아니네요. 두 지역이 맞물리는
곳에서 오락가락하는 변경인 말입니다.
결국 미국 영주권이 있는 분이니까 독도고 백두산이고 다 관심이
없어지는거라구요."
"아, 정말 너무 그러지 말어. 어쨌건 난 독사모는 싫다. 독도, 거긴
섬이잖아. 난 섬도 뱀 만큼 싫어. 혹시 백사모는 없어요?
백두산 천지 사랑하는 모임 말이야."
"그런 모임 쪽은 뭐 고구려, 발해사에 대한 한중 분쟁 우려 관계로
우리같은 교육 공무원이 끼긴 힘들것 같아요. 우선 독사로 시작하여
백사까지 나갑시다. 울릉도, 독도는 화산 섬이라 뱀도 없구요."
"나같이 변경지대에 사는 경계인을 그렇게 비웃는 박 선생은 그래
백두산은 가봤어?"
"솔직히 돈이 딸려서 아직 못가봤어요."
"독사모에도 회비같은게 있겠네?"
"당연하지요. 연간 삼만 오천원입니다. 자연보호 비용이지요.
정 선배 회비는 내가 다 내 드릴테니 걱정 마시고---,"
"아이구, 백두산 갈 비용도 딸린다는 사람이---."
그녀가 마침내 독사모에 가입된건 그런 사연의 결과였다.
그녀를 "독사모"에 가입시킨 박준수는 이어 독도에 관한 여러 종류의
학술 대회와 세미나에 그녀를 이끌고 갔다.
예컨데 한국 영토학회니 독도학회니 하는데에서 벌이는 "학술
대토론회"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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