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말고. 잘 알지요."
"아니, 질투나는데요. 누구랑 거기 효창공원 데이트 했어요?"
"이런 청년을 봤나. 질투에 눈이 어두워서---. 내가 BBB운동 회원
인줄 알잖아요. 거 왜 한국 방문 외국인들이 말이 통하지 않을땐
휴대폰으로 즉각 통역을 의뢰할 수 있는 시스템 말이야---.
그 회원들을 일년에 한두번 교육이랄까, 훈련시키는 곳이 효창 공원 안의
백범 기념관 아니오. 금년에는 한국 관광공사에서도 하지만---.
하여간 그래서 내가 가끔 간다오."
"아이구, 잘 되었네요. 거기에서 독도 영유권과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
그러니까 한일간에 새로 그은 EEZ 경계 획정에 관한 문제성을 두고
이제나마 때늦은 학술 대 토론회가 있어요."
"사람살려! 박 선생, 난 그런거 몰라요. 관심도 없고---."
"정 선배! 회색분자, 경계인이란 소리 안들려요? 겁 안나요?"
박 준수가 다그쳐서 그들은 백범 기념관으로 갔다.
일본이라면 손가락도 작두로 자르고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리며
민족 혼을 일깨우던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학술 대회장은 썰렁하였다.
두 사람은 군사 독재 시절의 한일 협정 보다 더 못한 경제수역 협정이
민간 정부 때에 이루어졌다는 통탄할 사연을 알게 되었고 또 실효성에
의문이 가는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서도 이럭저럭 깨달음이 있었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다만 학술 대회가 끝나고 철 이른 가을 단풍의 효창 공원을 거니는
것으로 반 분은 풀었다.
"정 선배, 왜 하필이면 흑백 혼혈 자마이카 인과 결혼했어요?"
"박 선생, 내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대가 나에게 동료관계를
넘어서 남녀 사이로 관심을 갖는다니까 내가 이해를 한다쳐요.
하지만 왜 국제결혼을 했느냐는 정도라면 혹 몰라도, 앞에다가 한정사는
넣지 말어야지.
흑백 혼혈이니 뭐니 그런 모디파이어, 한정사는 빼고 그냥 왜 국제결혼
했냐 하는 식으로 묻는 것도 사실은 좀 월권이긴 하지만 말이야---."
"정 선배,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특권이라구요."
"좋아요. 내가 순혈 청년 박 선생의 진지한 얼굴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인사이드 스토리를 여기 백범 선생 동상 앞에서 털어놓고야 마네.
그러니까 내 이야기 잘 들으시고 사랑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고치세요.
여기 건국의 아버지 앞이니까 비장하게 고백성사 보는거야.
정말로 여기라서 나도 나중에 입이 가벼웠다고 자학은 하지 않을것
같애."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키고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예전에 교대 다닐 때 첫 사랑이 있었어. 첫 사랑이라고 하고나니까
신파같아 겁이나네.
그리고 또 두번째 세번째 사랑이 줄줄이 사탕으로 있었던 것처럼 들릴까
억울하기도 하고---. 하긴 그 후 내가 국제결혼을 했으니 두번째 사랑은
또 있었구나.
하여간 첫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 못할 그 남자가 자살을 했어.
연애기간 동안 그는 줄창 몸을 요구했는데 내가 완강했지.
그랬더니 이 청년이 아마도 호어 하우스에 갔다가 허피즈인지
아니 에이즈에 걸렸는지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거야.
그걸 그는 내 책임이라고 장난하듯, 놀리듯 말하더니 그냥 바다로
뛰어든거야. 수색인지 조사인지를 나온 해경 사람들은 그걸 전문용어로
자진 입수라고하대."
"트래저디!"
박준수가 신음을 하였다.
"평가나 분석은 하지마, 위로도 하지마!"
정진주가 낮게 명령하였다.
"그래 시신은 찾았어요?"
"이 사람이 보기보단 독종이네. 그런 현실적 질문이 왜 나오냐, 이
추억어린 낭만적 시점에서."
"선배가 과거를 너무 생생하게 반추하여서 솔직히 질투도 나고---.
아니 그럼 내가 이 시점에서 '누님!' 하고 울며 정 선배를 껴안기라도
해야 어울리겠수?
아무튼 부산 앞바다의 제주 해류라면 동해안을 타고 북쪽으로 흘러
가는데---."
"야, 이 사람 정말 무섭다. 범상한 사람이 아니야. 교대 일등이란건
내가 익히 알고있지만---. 하여간 이야기 더 듣고 싶어, 말어?"
"선생님, 더해 주세요."
그가 조금 아이들 목소리를 흉내내며 과거사에 대한 그녀의 성실한
성찰에 마지막 항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코믹 전술은 분위기에 떠밀렸고 그녀는 흔들리지 않으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대 다닐때 영어교육 전공 쪽의
리딩 리스트에 헤밍웨이가 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가 있었지.
거기 여주인공이 브렛 애슐리잖아.
그녀는 일차대전에 출정하는 약혼자의 마지막 청, 그러니까 몸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그가 죽은 후에 전투지의 특지 간호사로 나가서
젊은이들에게 몸을 마구 심하게 맡기잖아. 속죄하는 심정으로---.
내 첫사랑 남자의 자살 사건 이후로 브렛의 그 행위가 내겐 문득 문득
떠올랐어.
사실 미국이라는 이방에서 내가 자마이카 출신, 전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건 애초에 서로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그 사람에게 미안한건, 미국식 약혼의 징표로 '커플 링'을 그가
나에게 끼워주고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바로 그 순간에 브렛 애슐리
생각이 떠오른거야.
그가 코리언이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안이나 순수한 백인이기만
했어도 내가 브렛과 같은 행위를 한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을거야---.
하지만 그가 흑백 혼혈이었기 때문에 나도 브렛 애슐리처럼 몸을 막
돌린건 아닌가하는 그런 의문이 고문처럼 날 짓늘렀어.
그런 생각이 두고두고 미안하더란 말이야."
"정 선배! 자학하지 말어요. 이 순간 깨끗한 내 코리언의 가슴으로
선배를 안아주고싶네."
"가까이 오지마, 후려칠거야!"
"선생님,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그가 초등학생 목소리를 다시 냈지만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이른 낙엽이 한두개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아무래도 기대고
서있던 나무에 그녀가 너무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기 때문인듯 하였다.
"정 선배, 내가 활동하고 있는 자연보호 중앙회에서 독도 탐방을 가는데
거기 함께 가 봅시다. 삼일간의 여정이니 우리 연구원에는 금요일 하루
월차를 내고 다녀 오자구요."
"난 섬에는 안간다니까. 알잖아."
"기회가 좋아요. 그리고 '자연보호 사람보호', 캐취 프레이즈가 또
마음에 들잖아요.
이제는 자연보호와 환경문제 같은데에도 다양하게 관심을 쏟으면서
그 과거의 미망으로부터 해방 되셔야해요. 갑시다."
박준수가 떼를 쓰듯이 밀어부쳤다.
"이번에는 회비가 삼십만원이어서 제가 전액을 대납하기는 힘들지만,
신청금은 두 사람분을 이미 다 냈어요. 이럴때 아니면 독도 구경도
힘들어요."
"박 선생이 나를 아예 잡네."
그녀가 또 몸을 떨어서 벌레 먹은 나뭇잎 몇개가 다시 스르르 내려
앉았다.
그 다음 날부터 사흘간 그녀는 몸살을 몹씨 앓았으나 박준수가 꼭 잡은
두 손을 의지하여 자연보호 독도탐방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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