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청포도

원평재 2004. 8. 6. 06:25


해마다 "안동 예술제"가 열리는 줄은 줏어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 행사가 벌써 16회나 년륜을 쌓았으며, 특히 올해는 "이육사 시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로 치룬다고 초대장이 와서 입이 딱 벌어졌다.안동이 유학(儒學)의 본향이라는 점과 "안동 지존 의식"을 문득 떠올려보니,"에헴! 놀랐지"하는 양반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이 곳이 고향인 김종길 교수님도 오신다고 하고, 또 안동 고을에서는 신 양반에 속하는 유지들이 나하고는 친구 사이로 존재하여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겸,더위를 무릅쓴 행차를 도모하자고 문학 딜레탄트 몇 사람이 손을 얼른 덥석 잡았다.하지만 일단 손은 거창하게 잡았으나 몇차례 개인사의 곡절 끝에 기사 달린 내 차를 마침내 네 명이 채우니 거창하게 시작한 안동행은 가까스로 시동을 걸었다.오랜 외무부 대사 생활 끝에 지금은 큰 대학의 초빙 교수로 있는 친구, 연주계에서는 이제 은퇴한 현직 피아노 교수, 발 닿는 데로 다니며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 예술가, 이문 없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나, 이런 친구들이 모였으니 입은 걸고 화제는 넓었고 소회는 깊었다.주제는---, 시국 근심과 육담일 수 밖에.봉화를 지나서 안동이 가까워지자 입심들도 조심을 하기 시작하였다. 儒學의 향기가 과연 무섭긴 무서웠다. "육사의 시 '청포도'하고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를 외우기 시합하자."디카를 든 사진예술가가 수준 높은 제안을 하였다. 지금부터 그를 자유인이라고 호칭한다."너 그거 고등학교 때 실력이 아니고 최근에 외웠지?"내가 윽박질렀다. "맞다, 맞어, 꼼수야!"다들 소리 질렀다.한때 소월과 육사의 시를 다 꿰었으나 지금은 키 워드조차 오락가락하는 두명의 동기들도 내 항변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열심히 "육사"를 외운 혐의가 있는 이 사진쟁이 자유인이 결국은 청포도의 끝을 맺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우리의 닥달은 동정으로 바뀌었다."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어여쁜 아가씨들 손잡고 가자네"피아노 교수가 옛 노래를 끄집어내었다. 하지만 그 것도 마지막 소절은 실종되고 말았다.우리는 서로 위로하였다.안동의 파크 호텔에 차가 도착하자 안동 대학 국문학 교수와 고급 공무원하다가 낙향하여 과수원을 하며 역시 대학에 특강을 나가는 친구가 미리 와서 대기하다가 여장을 풀도록 도와주었다.이러는 중에 대구에서 교수하는 친구들이 또 세사람 들이닥쳤다.때는 바야흐로 저녁 시간, 안동 댐 인근의 헛제사 밥 집으로 오랜만에 허기가 진 배를 채우러 갔다."배가 고파보기 얼마만인가---.""그래, 건강에도 좋고 정신도 맑아지네."배고픔 예찬이었다."헛 제사 밥이란---."안동 친구가 설명하였다.보통의 해석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도 제사 때처럼 잘 차려 먹는다는 뜻으로만 해석하겠지만,사실은 좀더 깊은 뜻이 스며있단다.양반들이 보릿고개에도 광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차려먹어야겠는데, 이 일이 배를 곯는 상놈들에게는 너무 미안하여서,제사도 없는데 제사를 지낸다고 헛 소문을 내고 음식을 차려 먹었다는 것이다. 음식 담는 그릇이 제기(祭器)일수 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헛제사 밥의 유래도 일년에 한번 양반을 빗대고 패러디하는 안동 탈춤 축제의 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러니까 헛제사 밥도 사실은 양반들이 만들어낸게 아니라상놈이나 종들이 패러디로 만든 메뉴가 아닐는지---.물론 이건 내 생각이었다.그리고 안동 친구들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디카 자유인의 핸드폰이 아까부터 자꾸 칭얼대었다."너 그거 '믈도리동'이라는 여자에게서 온 전화구나?!"안동에 칩거하는 전직 대사의 예리한 지적.자유인은 원래 중등학교 우리 동기들이 대상인 "사랑방"이라는인터넷 카페의 운영자이자 주인장이기도 하였는데,삭막한 남정네들의 가상 공간에 글이나 노래나 그림을 잘 넣는 여성 용병들을 몇 사람 초빙하여 목하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그런 사람들 중에는 안동에 사는 공예 전공의 예술인도 한 사람 있는 줄은 우리들도 대충 대충 알고 있었는데,아마도 그 쪽과 연락이 미리 닿은 모양이었다.그 여성의 사랑방에서의 닉 네임이 "믈도리동"이었다.그녀는 육사 시인을 흠모하여 외지에서 들이닥친 딜레탄트들에게 안동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사랑방 식구로서의 체면치례가 되지 않겠느냐는 초대의 뜻을 핸드 폰에 담아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제안된 만남의 장소는 제 16회 안동 예술제가 열리는 강변 축제장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초대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다.더우기 그녀는 안동에 있는 내 친구들과는 강연회에서라든지공사간에 인사가 이미 있는 처지이기도 하였다.한국 예총 안동 지부로부터 우리가 초대 받은 곳도 그 축제장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둘렀다.안동에 올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안동은 참으로 역사의 숨결이 연면히 맥을 이어오는 곳이었다. 유학의 옛터전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그 숨결을 더하여 오면서 온고이지신의 뜻을 살려서 새로운 변신을 하는 곳이기에이 아늑한 고장에는 중세와 근세와 현세를 아우르는 곳이 도처에 있었다.강변 축제장도 가서 살펴보니 국내에는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된 곳의 예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식의 고풍은 차라리 미련없이 거두어내면서 그리스 식의 원주 대여섯을 광장에다 세우고 공연 무대도 현대 건축 양식을 과감히 도입한 노력이 역력하였다.전체 모양이 최근에 본 것으로는 샌디에이고의 야외 공연장과 유사하였다.맨 앞자리에 좌정하며 김종길 원로 교수님, 예총 안동 지부장 및 여러 예술인들, 그리고 우리의 중등학교 후배가 되는 권오을 국회의원 등과 인사를 나누는데 어떤 중년의 여인이 화사한 베이지색 연주복을 입고 나타났다.디카 자유인과 안동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하였다."물도리동님이시군요."대구에서 온 어느 동기가 이미 알고있다는 투로 끼어들었다."물이 아니고 믈인데요, 옛날 식으로---.""맞어, 가물, 가말, 가믈이 모두 음운적으로 한 통속이었지."국문학자의 찬탄이었다. 어쨌거나 믈도리동은 하회(河回)마을 이었다."안동이 유학의 고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예향이기도 하네요. 그리고 믈도리동 여사의 복식도 예사롭지 않군요."서울에서 온 전직 대사의 유려한 화술이었다."제가 나염과 매듭 공예로 한 예술 한답니다. 이 곳 안동에 살지 않으면 떠오르지 못할 문양과 아이디어들이 참 많거든요. 물론 전시회 같은 것은 서울등 대도시에서 하지만요.""이 연주복도 특색이 있는데요?"누가 질문 비슷하게 환담을 이어갔다."네, 오늘 합창 순서가 몇 있는데 저도 디자인에 좀 참여하였고 합창 단원이기도 하지요.""몇명이나 되나요?""50명 정도 되는 합창단이 둘이나 되죠. 오늘은 따로 따로 몇차례 출연하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합쳐서 백 명 이상의 대 합창으로 막을 내린답니다."우리가 환담을 하는 사이에도 식순은 진행되어서 육사의 친딸인 이옥비 여사도 인사말을 하였다. 육사는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하였는데 그 분은 몸이 부실한 모양이었다. 안동 사는 내 친구의 설명이었다.

복원 중인 육사의 생가서막의 흥을 돋구는 역할부터 예사롭지 않게 연주를 이어간 안동 심포닉 밴드는 단원들의 숫자도 50명을 넘어섰지만 연주도 그만하면 수준급이었다. 가끔 어떤 소절에서는 음역대를 확장하지 못하여 눈에 띈 오류도 있었으나 그게 또 맛있는 멋진 애교였다. 지휘자가 연신 땀을 닦아내었다. 10년만의 혹서가 여기인들 예외일 수는 없었다.이윽고 합창의 순서가 되었는지 믈도리동 여사는 사라졌다.저녁 식사 때 마신 동동주 탓인가 화장실 생각이 나서 무대 뒤쪽으로 가며, 막 무대에서 내려온 관악단원에게 물어보았다."단원들이 모두 안동 사람들인가요?""왜요?"무슨 컴플렉스가 발동했는지 대답에 조금 적의가 서려있었다."아니, 18만 안동 시민들 가운데에서 이렇게 훌륭한 관악단이 나왔다는게 놀라워서 물어보았지요."그의 얼굴이 그제서야 풀어졌다."아, 그러니껴. 전부 안동 사람 아이니껴.""아이니껴"는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맞다는 말이다.길게 시원한 배설을 하고 돌아오는데 이제는 무대에서 막 내려온 합창단원들이 뒷편에 놓인 긴 의자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들이 한없이 우아하게 보였지만 치렁치렁한 그 연주복이 얼마나 더웠을까.안동 양반들의 딸과 부인들이 모두 치맛단을 허벅지 위까지 걷어 올리고서 부채 대신 "앉은뱅이 캉캉 춤"을 추고 있었다.문득 시선을 돌리다보니 물도리동, 아니 믈도리동 여사도 내 시야에서 캉캉 춤을 추다가 얼른 치마를 내렸다.행사가 끝나고 안동의 음식 거리에 있는 "일석이조"라는 카페에서 모두 둘러앉아 자정까지 동서의 예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던가, 42병을 비운 맥주 값을 내 친구 안동 병원 이사장이 책임졌다던가,다음날 저 유명한 콩나물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하고 이육사 기념관 및 생가 복원의 현장을 방문한 이야기를 자꾸 한다면 사족, 요즘 말로 "덧 뱀 다리"든가, "뱀 덧 다리"든가에 다름 아니리라.그래도 덧다리를 하나 달아야겠다."팩션이 아니라 사실 기록이네요."누가 묻는 다면 하일라이트 부분에 조금 가감첨삭이 있었다고---.(이번 팩션 끝)
    인간문화재 이생강 님피리연주곡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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