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안동 예술제"가 열리는 줄은 줏어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 행사가 벌써 16회나 년륜을 쌓았으며, 특히 올해는 "이육사 시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로 치룬다고 초대장이 와서 입이 딱 벌어졌다.안동이 유학(儒學)의 본향이라는 점과 "안동 지존 의식"을 문득 떠올려보니,"에헴! 놀랐지"하는 양반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이 곳이 고향인 김종길 교수님도 오신다고 하고, 또 안동 고을에서는 신 양반에 속하는 유지들이 나하고는 친구 사이로 존재하여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겸,더위를 무릅쓴 행차를 도모하자고 문학 딜레탄트 몇 사람이 손을 얼른 덥석 잡았다.하지만 일단 손은 거창하게 잡았으나 몇차례 개인사의 곡절 끝에 기사 달린 내 차를 마침내 네 명이 채우니 거창하게 시작한 안동행은 가까스로 시동을 걸었다.오랜 외무부 대사 생활 끝에 지금은 큰 대학의 초빙 교수로 있는 친구, 연주계에서는 이제 은퇴한 현직 피아노 교수, 발 닿는 데로 다니며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 예술가, 이문 없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나, 이런 친구들이 모였으니 입은 걸고 화제는 넓었고 소회는 깊었다.주제는---, 시국 근심과 육담일 수 밖에.봉화를 지나서 안동이 가까워지자 입심들도 조심을 하기 시작하였다. 儒學의 향기가 과연 무섭긴 무서웠다. "육사의 시 '청포도'하고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를 외우기 시합하자."디카를 든 사진예술가가 수준 높은 제안을 하였다. 지금부터 그를 자유인이라고 호칭한다."너 그거 고등학교 때 실력이 아니고 최근에 외웠지?"내가 윽박질렀다. "맞다, 맞어, 꼼수야!"다들 소리 질렀다.한때 소월과 육사의 시를 다 꿰었으나 지금은 키 워드조차 오락가락하는 두명의 동기들도 내 항변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열심히 "육사"를 외운 혐의가 있는 이 사진쟁이 자유인이 결국은 청포도의 끝을 맺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우리의 닥달은 동정으로 바뀌었다."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어여쁜 아가씨들 손잡고 가자네"피아노 교수가 옛 노래를 끄집어내었다. 하지만 그 것도 마지막 소절은 실종되고 말았다.우리는 서로 위로하였다.안동의 파크 호텔에 차가 도착하자 안동 대학 국문학 교수와 고급 공무원하다가 낙향하여 과수원을 하며 역시 대학에 특강을 나가는 친구가 미리 와서 대기하다가 여장을 풀도록 도와주었다.이러는 중에 대구에서 교수하는 친구들이 또 세사람 들이닥쳤다.때는 바야흐로 저녁 시간, 안동 댐 인근의 헛제사 밥 집으로 오랜만에 허기가 진 배를 채우러 갔다."배가 고파보기 얼마만인가---.""그래, 건강에도 좋고 정신도 맑아지네."배고픔 예찬이었다."헛 제사 밥이란---."안동 친구가 설명하였다.보통의 해석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도 제사 때처럼 잘 차려 먹는다는 뜻으로만 해석하겠지만,사실은 좀더 깊은 뜻이 스며있단다.양반들이 보릿고개에도 광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차려먹어야겠는데, 이 일이 배를 곯는 상놈들에게는 너무 미안하여서,제사도 없는데 제사를 지낸다고 헛 소문을 내고 음식을 차려 먹었다는 것이다. 음식 담는 그릇이 제기(祭器)일수 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헛제사 밥의 유래도 일년에 한번 양반을 빗대고 패러디하는 안동 탈춤 축제의 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러니까 헛제사 밥도 사실은 양반들이 만들어낸게 아니라상놈이나 종들이 패러디로 만든 메뉴가 아닐는지---.물론 이건 내 생각이었다.그리고 안동 친구들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