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술라와 연결이 끊어진 원인이니 책임이니 하는 걸 따지자면 조금 복잡한
궤적이 전제되었다.
일년은 짧았다.
그것도 처음 얼마간의 탐색 과정이랄까 그런 시간을 빼고보니 더욱 그러
하였다.
하여간 그가 귀국할 때 쯤, 어술라는 연구 기간 연장이 받아들여져서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헤어지는 날짜가 꼬박 꼬박 닥아 올 때 쯤이 되자 어술라는 두가지 반응을
보였다.
잠자리에서의 치열함과 연구소에서의 양 교수에 대한 무표정이 그것이었다.
하긴 양 교수의 초조해진 일상에도 그와 비슷한 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도 심한 양극단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헤어지는 날은 닥쳐와서 그는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왔고
그녀는 연구소를 대표하여 공항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귀국 후에 그는 몇차례 부지런히 편지를 띄었으나 답신은 없었다.
강의 준비와 끊어졌던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을 복원하기가 그리 쉽고
한가롭지는 않았으나 그는 정말 열심히 편지를 썼다.
불임의 공포까지 겪은 끝에 아내는 그가 출국하기 전에 이미 만삭이었는데
이제는 공주를 출산하여서 전에 없이 집안에 화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가 어술라에게 열심히 편지를 쓴 것은 아직도 덜
연소된 미해결의 사랑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비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와 자기자신에게 끊임없이 선언하겠다는 욕구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더우기 그녀는 세상을 용기와 비겁이라는 이항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답신은 종내 없었고 마침내 그의 편지는 반신이 되었다.
안타까움 반, 안도하는 마음 반쯤이 되면서 그도 편지 쓰기를 마쳤다.
아니, 그냥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연구소에 그녀의 행방을 문의하는
절차까지 밟았다.
공식적인 답은 연구소와의 계약이 끝나서 카나다로 돌아갔으며 우편
서신에 관한 포워딩(forwarding)은 사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금발의 소녀 사진이 날라왔다.
봉투에 발신인은 없었으나 주소는 카나다에서 개인이 개설한 CPO로
되어있었다.
내용물이라고는 달랑 금발 소녀의 사진 뿐이었다.
편지는 커녕 사진에 짧은 캡션도 붙이지 않았다.
양 교수는 왜 그랬는지 가슴이 철렁하였다.
헤어지던 해에 아기가 태어났다면 그만할 정도의 인물상이었다.
그는 답신을 내지 않았다.
그녀가 바다 낚시 때의 습성대로 릴을 금방 감지않고 더 큰 손 맛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의도치 않다가 어떤 변화가 생겨서
그에게 사진을 보냈는지 그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만히 있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진이 오기 얼마전에는 친구이자 시인인 이민형 선생이 그와
아내인 이옥분 선생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히고는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나버린 일도 있었다.
떠나기 며칠전, 술이 과해서 그랬는지 아니 작심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지
그는 자정 무렵 양교수 집을 찾아와서 야료를 조금 부렸다.
"치사해서 못살겠어. 이 나라 꼴도 그렇지만 두 사람이 깨 쏟아지게
사는 꼴이 더 심사를 사납게 해.
그런 마음을 먹게되는 내가 또 더 치사하게 느껴지고---."
이옥분 선생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였다.
양 교수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렇게 낙담하는 표정을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본적이 없었다.
교수인 남편의 안락한 그늘 아래에서, 또 이름난 시인 한 사람을 문학적
동반자랄까, 친구이자 동지로 파악하면서 아무 일도 없이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사실은 언제라도 무너질 가교에 불과했구나---,
그런 성찰이 하얗게 질린 그녀에게 밀어닥친 모양이었다.
그는 떠나갔고 소식이 끊어졌으며 그 얼마 후에 양교수는 그 금발
소녀의 사진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 복잡한 시련 속에서 침묵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나 소녀의 사진만은 고이 책갈피에 넣어두었다.
어떤 책을 고를까 하다가 그는 박사 과정 때의 일본인 지도교수가 물려준
책 속에 그 사진을 넣어두었다.
그 지도교수는 또 자기의 지도교수로 부터 그 책을 받아서 보관해 오다가
양교수에게 물려주었으니 학문 3대의 손때가 거기 묻어있는 셈이었다.
"여보, 책에 얽힌 이야기가 참 많지요---?"
"어? 응, 그렇지, 뭐---."
그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어 차에 시동을 걸다가 아내의 말을 듣고
얼떨결에 조금 막연한 답변을 했다.
아내와 말없이 걸어오면서 과거의 회상이 너무 깊었나 보았다.
"책이 곧 당신 학교 도서관으로 시집을 가네요. 무슨 비자금 같은걸 넣어둔
책은 정말 따로 없어요?"
"그런게 어디있어. 당신처럼 러브 레터나 책 갈피에 넣어두었다가 그게
연서라고 황홀해 하는 그런건 없어요."
"여보, 좀 진정하세요. 지금 당신과 무얼 다투자고 이러는건 아니예요.
즐거운 이야기 해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닌 야간 대학이 국립 한밭
대학에 흡수된건 참 다행이었네요.
그래서 당신 책도 모교가 된 국립 대학에서 영구 소장 기회까지 얻게
되었구요."
"서정 시를 쓰시는 시인께서 세상 물정을 어찌 그리 공리적으로만
보시오, 하하하. 하긴 그래요.
5-16 군사정부의 공과가 두루 많았지만 당시 대학 통폐합은 잘한것이었지.
나중에는 결국 다 풀어졌지만---."
"정말 비자금 감추어둔거 없어요?"
"없다니깐---, 그리고 있어도 그런걸로 당신에게 꿀리지는 않아요."
"그럼 꿀리는게 따로 있군요---?"
"당신부터 내게 고백 성사하시오. 그럼 나도 다 털어놓을테니---."
애초에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책 이야기가 그의 잊고자
했던 과거를 이끌고 나오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그의 입술을
타고 술술 흘러나왔다.
하긴 그동안 참아왔던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들어온 아내에 관한
좁은 바닥의 소문들이 그동안 조금씩 발효해 오다가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의 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도 하였다.
이옥분 선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듯 바튼 기침을 하였다.
양교수가 옆으로 힐끗 보니 그녀의 얼굴이 그 예전 어느 때처럼 창백
하게 바래어있었다.
"여보, 후회할 일이면 말하지 말아요."
그는 걱정이 되어서 아내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아녜요. 결정적인 흠이나 고백할 잘못은 저지른게 없지요.
하지만 조금 마음 속에 찝찝하게 걸리는건 있어요.
이제와서 털어놓는다고 당신이 날 내쫓을 것도 아니고, 간직하기 보다는
고백하는게 낫겠어요, 호호호."
그녀가 조금 안색이 돌아오며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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