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라 하고는 정말 완전히 끝이난거지요?"
이옥분 교장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듯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게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잖소. 그때만 해도 뉴질랜드를 신서란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오."
양한철 교수는 속으로 찔끔했으나 태연하게 아내의 힐문성 질문에 대답을
하였다.
사실 어술라와는 뉴질랜드에서 헤어지고 귀국한 이래로 두어차례 편지가
교환되다가 끊어지고 말았다.
"아, 아니구나. 편지만 온게 아니었어. 나중 어느날인가 사진이 왔었지.
금발 소녀의 사진이!"
양 교수는 크게 소리를 지를뻔하다가 입을 닫았다.
아내가 옆에 있고 없고 간에 그런 말은 결코 입밖에 낼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소근거렸다.
"그래, 그래. 처음에는 편지가 조금 오가다가 끊어졌어. 그런데 몇 해
만이던가, 그래, 사진이 왔었지, 금발 소녀의---."
그는 남들이 보기에는 화려하게도 국토지리원의 책임자도 지냈고
지리학회의 회장도 역임하면서 학자의 길을 순탄하게 지내왔지만
내면적으로는 뉴질랜드에서의 일을 기억에서 소멸시키느라 힘들게
한 세대를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공직을 떠나는 시점에서 다른 일도 아니고 영구 보존 장서의
문제가 나오면서 그렇게 오래토록 망각의 창고에 가두어 놓고자 빗장을
채워 놓았던 일들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람도 없이 한순간에 그의
의식계로 떠올라 버린 것이었다.
그가 그때의 일을 죽어라고 잊으려 하며 살아 온 것은 무슨 공직자의 몸
조심같은 저차원의 발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술라라는 여인에 대한 평가가 "버린 여인"이니 "잊혀진 여인"이니
하는 식의 맥락이라면 더더구나 천부당 만부당의 말씀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 때의 일이 자신의 의식계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참으로
오랜만에 당시의 정황과 그 때 이미 정리해 놓았던 논리를 반추해 보았다.
잊기로해서 그랬지 망각이라는 보자기를 걷어치우자 차곡 차곡 정리해
놓았던 당시의 인과율과 논리의 틀은 금방 다시 정연하게 머리 속에 제기
되는 터였다.
따지고 보면 사실 아내와 이민형 시인이 가깝게 지낸 전말도 아내의 말과는
달리 본말이 전도되어 있었음을 양 교수는 연대와 시기별로도 환히 꿸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아내는 일의 선후를 남편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사실은 그녀가 이민형 시인에게 먼저 접근을 하였으며 두 사람이 한동안
이나마 가깝게 지낸 그 기간 동안에도 항상 아내가 주도적이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시문학"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전후의 사정이
좁은 바닥에서 양 교수의 오관에 잡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일본 유학을 하던 때만 하여도 교사직이 천직인양 열심히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그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도 물론 학비와 생활비의 거의 전부를 일본 문부성 장학금으로 충당
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보답하였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 자리를 잡을 때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려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내는 어느새 등단 시인이 되어있었다.
"당신만 발전을 하는데---. 나도 문학 소녀의 꿈을 한번 실현하고자
안달하였지요, 뭐---."
그녀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을 하게 된 문예지, "시문학"의 편집 자문
위원이 사범학교 때부터 세 사람이 친하게 지낸 바로 그 이민형 선생
이었다.
그는 실력과 문운이 모두 좋아서 이미 중견 시인으로 경향의 문단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옥분 시인은 문운이 그리 밝지 못하였다.
신인상을 받고 한참 작품 활동에 몰두해야할 즈음에 아이를 갖였고
이어서 출산과 양육의 힘든 일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이 그녀와 이민형 시인의 관계를 적절하게
조절하였고 또한 그녀의 작품 활동이 변변치 못한데에 큰 변명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건 다행이었다.
물론 두사람의 거리 조정에는 이민형 시인의 인품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세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에 양 교수는 콜롬보 계획을
지망하였다.
유엔 기금으로 뉴질랜드에서 연구년을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여러가지 점을 감안해서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을 떠나있을 생각을 했는데,
그녀는 함께 가지 않았다.
공립학교에서의 휴직의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승진 연수의 기회가 왔는데
버릴 수가 없다는 아내의 말을 그는 핑계로 여겼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듯도 하였다.
그의 아내는 두번의 방학 동안에도 뉴질랜드로 짧게 한번 밖에 찾아오지
못하였다.
방학 중의 연수 탓이라고 하였다.
그 동안에 그녀와 이민형 선생은 공동으로 시집을 출판하였다.
장정이 아름다웠으나 내용은 투박하였다.
특히 이민형 시인과 이옥분 시인의 시적 수준 차이가 너무나 큰 괴리를
이루어서 전체적 조화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이 시집의 재고들도 농가 주택에서 모두 불태워졌는데 그 책 중의
하나에서 이민형 시인의 연서 비슷한게 튀어나오기도 한 것이다.
그걸 "연서"라고 맨 처음 우긴 것은 이옥분 선생이었고 양 교수도 마침내는
동의를 해 주었는데 내용은 보잘 것이 없었다.
서정도 낭만도 결여된 러브 레터 속에 이민형 시인은 뚱딴지 같이 두사람
사이의 감미로웠던 키스의 추억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문장을 삽입하여
두었다.
그는 우정과 인품의 화신으로 부부 사이에 군림해왔는데, 나이가 들면서
무언가 쫓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뉴질랜드의 연구소 연구실과 독신자 숙소의 바로 옆 방에 어술라가 배정
되어 들어온 것은 풍수지리상의 숙명이었다.
그녀가 그의 옆으로 그렇게 오지 않았더라면 영어에도 서툴고 또 서구
문화에 그때만 해도 생소한 편이었던 그가 그녀와 인사말이나마 제대로
나누었을는지는 심히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무슨 천지간의 조화인지 풍수지리상의 "근린 필통"의 원리에 따라
두 사람은 이웃 사촌의 정분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몸이 통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어술라는 인문 지리학을 전공한 독신녀로서, 학문적으로는 도시의 형성과
구조에 관한 빼어난 분석력과 직관을 갖고 있었는데 조금 지내고 보니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지구의 정 반대편으로 날라 와서 우울증을
겪지 않을자가 어디 있으랴---,
양한철도 두고온 만삭의 아내를 생각하며 절박한 척 부르짖었으나 사실은
여유가 있어도 한참 있는 소리였고 어술라야말로 정말 절박한 심인성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계속)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들의 고향 (5) (0) | 2007.04.17 |
---|---|
책들의 고향 (4) (0) | 2007.04.14 |
책들의 고향 (2) (0) | 2007.04.11 |
책들의 고향 (1) (0) | 2007.04.09 |
짧고 행복했던 낚시 여행 (9-끝) (0) | 2007.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