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술라의 부모와 가족들은 모두 2차대전의 말기에 있었던 연합군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몰사를 했다.
드레스덴이 종전 후에 동독에 속하여서 서방 세계에 그 참화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점이 많았지만 아무리 전쟁중이라고 하였지만 그 공습
사건은 참혹, 그 자체였다.
전투원들이 모두 전선으로 나가있는 사이에 후방에 있는 노인들과
비전투원인 여인들, 어린이들을 모두 합하여서 20만명 이상이 사흘간의
연합군 공습으로 모두 불타죽은 참화가 바로 드레스덴 공습 사건이었다.
당시 어술라는 아직 강보에 쌓인 유아였는데 나이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전장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와 간호사로 병원 근무를 하는 어머니
등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날, 공습이 시작되기 전날 밤에 이모가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만
빼았다시피 안고서 이웃 동네로 미리 피신을 하는 통에 두사람만 겨우
살아남았다.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은 사흘 밤낮에 이르렀다.
전쟁이 끝나고 이모는 어술라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어술라는 캐나디언이 되었고 그 덕분에 콜롬보 계획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모, 왜 나만 갑자기 데리고 피신을 했어요?"
이런 질문을 그녀는 이모가 임파선 암으로 중년의 나이에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무슨 신비한 계시같은 것이 그 전 날 밤 꿈에 내 마음을 훑어지나갔어.
그 길로 너를 데리고 이웃 동네 들판으로 내달렸지."
이모의 답변이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어술라는 그 말을 자꾸만 듣고
싶어했다.
혼자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같은 것을 이모의 그 거짓말로 떼우고
싶었다는 것이다.
죄책감이란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속죄라니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심리상태가 그러하였다.
이모는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스파이 노릇을 하여서 공습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나중의 활동을 위하여 가족 모두를 표나게 피신 시킬 수는
없었다는 고백을 임종 때에 했는데, 어술라는 이모의 그 유언이 되려
거짓말처럼 들렸다고 한다.
혼자가 된 어술라는 이모가 살아 생전에 거짓 반, 진실 반으로 자주 되뇌던
그 신비한 감정, 비의(秘意)에 가득한 느낌을 유산처럼 마음에 간직하여
살면서 여러가지 밀교에 심취하였고 깊은 연구도 하였다.
특별히 그녀는 아프리카의 부두(Voodoo)교 의식,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
이나 호주의 애보리진(Aborigin) 흑인 종족들의 원시 종교를 연구
프로젝트로 내세워서 콜롬보 계획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캐나다는 원래 이 계획의 시혜국가였고 수혜국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국가였지만 그녀는 특이한 연구 주제로 인하여 다국적 연구 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혼자 사는 삼십대 중반의 두 연구원은 정말 "근린필통(近隣必通)"의
원리가 아니더라도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들은 특별히 바다 낚시를 좋아하였다.
그녀와 자주 다닌 바다 낚시에서 그는 낚시의 손 맛 논쟁을 몇차례 한 적도
있었다.
그는 릴 낚시대에 붙은 줄을 바다에 던져 넣고는 이 줄을 통하여 작은
손 맛이라도 감지되면 무조건 낚시대를 윗쪽으로 확 쳐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힘껏 끌어당긴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작은 손 맛은 무시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큰 손맛이
오면 그제서야 좌우측 어느 한쪽으로 순간적인 베팅을 하여 그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려서 비스듬히 당겨낸다고 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당기기를 하는 경우 입질한 물고기 중의 절반은 놓치지만
그건 모두 잔챙이에 불과하고 큰 물고기만 건져올리게 되는데,
절반을 놓치면서도 고독하게 또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마침내 대어를 잡아
올릴때의 손맛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강조하였다.
작은 손 맛에는 스케일이 작은 물고기, 약삭 빠른 물고기, 비겁한
물고기들이 덤비는 꼴들이라서 상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큰 손 맛의 끝자락이야말로 스케일이 크거나 용감한 녀석들과
한 판 승부를 거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말하자면 평생에 대어를 한마리만 낚으면 나머지 여생은 포기하고
살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종의 기인이었다.
그가 그해 일년간 마침내 사랑의 이야기를 일상 가운데에서 실천적으로
행하게 된 데에는 외로움과 우울증이 최대의 매개 변수로 작용한
탓이 있었겠지만 그녀의 그런 성격도 거대 서사 담론의 역할을 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을 건축 구조물에 빗대자면 그녀의 그런 성격은 대들보
이자 또한 마감재였을 것이다.
그도 물론 주춧돌을 놓기는 하였다.
그는 한국 전란 후에 씨가 말라버려서 몇명 남아있지 않던 풍수의 아들
이었다.
이름을 별로 팔고 다니지 않던 풍수를 아비로 둔 죄로 그의 집안은 가난
했고 그나마 가장은 모습도 잘 나타내지 않았다.
맨날 산야로 돌아다니느라고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
이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던 해에 그 아비는 객사를
하고 말았다.
아들인 양한철 선생이 타지의 여관에서 작고한 아버지로부터 수습한
것이라고는 패철, 혹은 나경이라고 하는, 지남철이 달린 방위 놓는 도구와
몇권의 기서(奇書)와 비서(秘書)가 전부였다.
그 책들은 모두 한자로 쓰여져 있었고 때로 이상한 문자, 혹은 기호들이
가득하여서 전혀 요령부득이었으나 그는 작고한 아버지의 몸에 손을 댄
그 순간에 강신(降神)의 기(氣)를 받아서 이후 풍수 관련이라면 자신도
조금은 도가 통했다고 한동안 뻥을 치고 다녔다.
그가 그런 사기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작고한 아버지의 생애가 너무나
억울하고 애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야간대학에서 토목과를 다녔는데
지리학도 부전공으로하였고 일본 문부성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교도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는 자연지리를 전공하였다.
그때도 풍수지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컸고 일본의 풍수관련 기서
(奇書)들도 다수 입수하여서 그는 그 방면의 권위자를 자처하였으나
예전처럼 뻥이라고 대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접신(接神)의 체험을 강조하며 풍수지리를 내세우는 사실이 한동안
종교적으로나 국립대학 교수로서의 체통에 일부 저촉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가 워낙 과학적 체계를 내세우면서 미신이나 기복
신앙적인 측면을 공격하였기에 어려운 국면은 다 피해나갔다.
그는 도시 계획이나 산업 입지, 공업단지 심의 등과 같은 정부 발주의
프로젝트에도 관여하여 돈도 좀 벌었는데 이런 일들은 물론 나중에
얻은 과실이었다.
Voodoo교 의식
좀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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