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해 보시오. 우리 교장 선생님."
그가 아내에게 말문을 터 주었다.
"제가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솔직히 이민형 선생하고 더 가까웠잖아요.
그분의 시가 정말 좋았어요. 그때 이미 학원이니 학생계니 하는 고등학생
문예지에 그 사람의 시가 장원으로 뽑혀서 활자화 되어 나오고---.
그래서 요즘 말로 하면 이민형 선생은 킹카였고 나는 또 여학생 부장인가를
해서 자연스레 가까웠지요."
"그래, 그래. 당신이 좀 여우라야 말이지. 그때는 이 선생한테 정을 주다가
내가 문부성 장학생이다, 유학이다 뭐다 떠들썩하니까 얼른 내게로
와서 결혼 작전을 폈지---.
내가 실은 다 알았지만 당신이 워낙 미녀, 퀸카라서 그냥 속아준 것이었지."
"남편감으로는 처음부터 당신이 훨씬 더 좋았어요. 솔직히 고백하오니 다른
말씀은 마시옵고 제 이야기나 좀 잘들어주세요.
저와 이 선생하고는 추억이 많았어요. 아슬아슬한 추억까지 말이지요.
그런 사연을 기분 나쁘실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도 많이 기록해 남겼어요.
그걸 이 선생 시가 나온 학원 잡지 몇권의 책갈피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답니다. 이 선생의 편지도 함께---.
그때는 그 사람이 편지도 참 잘 썼어요.
지난번 불태우다 떨어뜨린 편지는 이 선생이 한참 질투심에 들떠서, 당신을
샘내면서 작위적으로 쓴 것이었지요.
어쩌다가 당신이 보면 약오르라고 쓴 것이니 이미 순수시대를 지난 다음의
무가치한 것이었어요---."
그녀가 잠시 말을 끊고 그를 쳐다 보았다.
"용케도 감추어두었다가 적시에 적소에서 들킨 셈이 되었네. 그러고 보면
일부러 떨어뜨렸는지, 원---."
"아이구, 내가 미쳤게요. 하여간 지난번에 보신 그 엉터리 편지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이 순정한 편지들을 자작시와 함께 많이 보냈구요,
저는 또 잘 보관해 왔지요.
그게 태우지 않은 학원 잡지 서너권에 지금 보존되고 있다니까요---.
지금에라도 태울까요?"
"그런 순정한 시절의 기록을 왜 태워---. 내가 젊을 때라면 욱하는 기분으로
찢어버리라고도 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생을 정리할 때가 아니겠소.
간직하시구려.
아, 내가 지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생각들을 조금 정리해 봅시다."
그는 차를 천천히 운전해가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엇다.
"내가 도서관에 보낼 책들 중에는 진짜 보물급들이 꽤 많어---.
특히 고지도들은 값을 매길 수도 없고 역사적 자료로도 대단하지.
그게 책처럼 접어서 보관하게 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요.
범례라든가 지역별로 상세 지도를 다시 만들어 합철한 것은 부피만해도
보통의 책 보다 더 두껍고 아예 표지도 하드 카버로 해 놓았다니까---.
그런가하면 내가 일본 교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할 때에 지도 교수께서
내게 주셨거나, 그 후 그 분이 정년 퇴임을 하시면서 물려주신 책들 중에도
진짜 희귀하거나 귀중한 자료들이 많아요.
예컨데 중국 동북지방의 만주국에 관한 연구와 그 강역에 관한 지도를
함께 모아 엮은 책도 인상에 남는데 그가 주장한 현상적 연구에 따르면
만주국은 예전 우리의 고구려 국과 여러모로 꼭 같더라구.
그분이 주신 책에는 그네들 표현대로 조선 근대화 계획에 관한 연구서도
많았지.
부산 지리지라는건 부산의 개발을 위한 기초 자료로서 항구 조성에 관한
상세 계획서였는데 지도는 모두 컬러로 인쇄했더군.
그런데 그 인쇄 연도가 아주 오래되어서 소화 시대도 아니고 대정 시대의
인쇄물이었는데 통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더라구.
아, 백두산 정계비에 관한 연구서적도 있었는데 작가의 주장을 따라가
보니 그 위치가 여러차례 편의적으로 옮겨진 과정이 명증되었더라구.
청국 관헌이 원래의 위치에서 옯겨버린 것을 일제가 처음에는 도루
원위치 시켰다가 나중에 만주국을 세울 때는 다시 또 만주국에 유리하게
옮겼다는 것을 연구해 놓은 것이었어요.
이 연구서로 그 학자는 나중에 일본에서 큰 고초를 당했다는군---.
내 지도 교수가 또 자신의 지도 교수로 부터 물려 받은 오래된 책도 두권
이나 내게 주셨는데 그 중 하나에는 쓰지않은 단성사 티켓이 두장 책갈피에
들어있더군.
식민지 경성 제국 대학의 교수를 지낸 분이었던 모양인데 영화 티켓 두장이
무엇을 뜯하는지는 결국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부분이겠지."
양 교수는 시골 국도의 분기점에 있는 붉은 신호등을 받으며 갖고 온
생수로 목을 추겼다.
"저런!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란---."
단성사 티켓 이야기가 나오자 이옥분 선생이 조금 발끈하였다.
"글쎄 당신의 상상력의 세계가 고작 발끈하는 수준이니 당신의 의식계도
한심하구려."
"미안해요. 여자란 그렇게 반응해야 정상적이란 소릴 들으니 한번 추임새를
넣은걸로 여기세요."
"솔직해서 고맙구려, 얼쑤~. 하하하."
양 교수도 가급적이면 분위기를 느긋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물려받은 두권 중, 또 한권은요?"
"그건 천문과 풍수지리와 선(禪)을 다룬 비의에 가득한 책이었어.
그런데 그런 내용도 신비로웠지만 그 책갈피에 옛 우표가 붙은 편지가
봉투채 들어있었는데 내용이 애절한 것이었어.
조선 총독부 관리의 아내로 들어간 제자가 그 책의 저자인 스승과 깊이
사랑을 했는데 이제 그 관리가 경성부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도꾜로 돌아
가게 되면서 서로 이별을 해야하는 슬픔과 기약 없는 재회를 다짐하는
그런 내용이었어.
일본말도 그 때 이래로 많이 변천사를 겪었지만 더듬거리며 지금 읽어
보아도 가슴이 찡하더군."
"아니, 여보! 학문적 서적이야 당신의 고유한 세계라 치더라도 방금 그런
재미있는 사연이야 제게도 미리 좀 알려주실 수 있었잖아요.
도대체 당신은 나를 제대로 사람 대접도 하지 않고 살아오셨어요."
"미안하오. 미안한건 사실이지만 이런 내용을 당신에게 말하기는 싫었지.
당신의 인생에는 항상 이민형 시인이라는 존재가 항상 이보다도 더 깊은
사연으로 인각되어 있을꺼야---, 그런 오기가 내겐 있었어.
이런 정도의 감성 세계는 막말로 새발의 피라는 고까운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또 이제 이선생이 떠나서 당신 가슴의 풍파도 가라앉은 형편에
또 다시 이런 센치멘탈 스토리로 물결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하는
나 나름의 깊은 분별과 지략도 작용하였다오."
"아이구, 참! 고맙기도 하셔라."
"뿐만 아니라 당신은 일본어를 잘 모르니까 일본어로된 이 고서적을
내게 필요한 도구로 쓰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소.
그러니까 당신이 관심도 없고 손도 대지 않을 책으로서의 도구로---."
"도구요?"
"그래요. 내가 다 이야기할께.
당신은 이민형 시인이 보낸 만지장서의 연서와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세레나데를 담은 사진까지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도 풍문으로
알고있는 어술라와의 사이에 오간 편지도 한장 없고 또 몇 장의 기념이
될 사진은 귀국할 때에 모두 버리고 왔지.
그러던 어느날, 한 참 세월이 흐른 어느날, 어술라에게서 한통의 편지가
왔는데 내용이라고는 정말 아무 내용도 없이 소녀의 사진 한장만
달랑 들어있었다오."
"맙소사! 내용이 없다라구요? 그만한 내용이 세상에 또 어디있겠어요.
백마디 말이나 글보다 더한 내용이네요.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어요? 법적인 분쟁 같은건 없었어요?"
"여보, 아무리 나이가 들어 고목나무가 되었다 칩시다. 문학한다는 여류
시인의 반응이 어쩌면 그렇소?"
"당신이야말로 허구헌날 현실 세계는 무시하고 살아온 책상물림에
딸깍발이가 아니던가요?
유성구의 새 아파트와 여기 농가주택을 장만한 것도 다 제 현실감각
이었어요.
아니, 아니지요. 일본 유학은 또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 당신 말이 다 옳아요. 내가 결혼 하나는 참 잘했어. 우리 딸을
캐나다로 조기유학 시킨 것도 다 당신의 아이디어였고 지출도 당신 월급에서
감당하였지."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요."
"내가 그 소녀의 사진을 그 책갈피에 넣어서 간직해 오고 있다오."
"뭐라구요? 정말 기분나뻐 죽겠어요. 사진은 찢어버리세요. 그리고 그 책은
오늘 저녁에 가서 당장 태워버릴거예요."
"당신 기분은 이해하겠소. 하지만 그 희귀본 책까지 태워버리겠다는
심사는 너무 고약하네."
"내 심사가 고약하다구요? 아이구,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군요. 나 여기
내려주세요, 당장!"
"여보, 여기에서 내려드릴 수는 없고 일단 우리 전원주택으로 갑시다.
가서 찢을건 찢고, 하여간 태워버릴 우선 순위나 정합시다.
당신이 이민형 시인에게서 받은 만지장서 연서도 태우고 그의 시가
들어있는, 아니 당신들의 사진이 들어있는 학원, 학생계 잡지도 태우고
이선생이 떠나면서 당신에게 넘겨준 폐허, 개벽, 장미촌, 현대문학
창간호도 태우고---."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책을 태우려면 다 태우지 그런 추억이 남은 것들은 왜 뒤로 빼돌리고
이중 잣대, 이중 플레이를 했오? 당신과 나의 이 좁은 공간에서 내가
아무리 책상물림에 딸각발이라 한들 당신의 그 일거수일투족까지 모르고
지냈을성 싶소?
오늘 다 태웁시다.
거기 당신 화장대 뒤에 숨겨놓은 이민형 선생의 브라질에서 온 편지와
그의 시가
실린 상 파울로 교포 문학지도 다 태웁시다.
한가지 미리 밝혀둘 것은 내가 당신에게 온 편지를 훔쳐 읽지는 않았소.
우연히 무얼 찾다가 겉만 보게 된 것이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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