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책들의 고향 (7--끝)

원평재 2007. 4. 22. 08:55

24618

 

 

 

 

 

이옥분 선생의 얼굴이 새하얗게 다시 질렸다.

그녀는 갑자기 울려고 하는 모양이었으나 꺼이 꺼이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낼뿐, 정작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제발 그렇게 너무 격하지는 마시게. 

나도 울고 싶도록 감상이 많다오.

이번 경우 때문만이 아니라 항상 과거라는 족쇄가 잘 가꾸어 온 생애의

끝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많은걸 절제

하며 자기관리를 해왔는데, 이제와서 우리가 이렇게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간다면 참으로 인생 헛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

인생의 패자가 어디 따로있나요.

생각해 봅시다. 

어술라가 조울증에 빠진건 그 이모의 탓이었소.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는 레지스탕스, 그 중에서도 첩보를 빼내는 스파이

노릇을 하면서 나중의 활동에 지장이 올까봐 제 가족 건사도 제대로 못하고

겨우 조카 하나만 빼내온 그 이모가 조울증에 빠진건 당연한 귀결일텐데,

그게 천형처럼 어술라에게로 고스란히 감정 이입이 되었다는구만. 

무슨 생물학적 유전처럼 말이오.

정신과 의사의 말이래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된 어술라의 슬하에서 또 하나의 소녀가 성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오로지 여기 내 울타리 안쪽 만을 보호하기

위하여서 시치미를 떼고 살아온 자가 바로 나란 말이오."

 

"궤변 같아요. 내게서 위안이나 칭찬을 기대해요?

그리고 어쩌면 그 소녀 사진은 어술라인지 뭔지 하는 여자의 유년시절

자기 사진인지도 몰라요.

조울증 환자의 이상심리가 그런식으로 모태 회귀 본능이 되어 나왔는지도

모르잖아요.

뭘 좀 아는체 한다고 생각지는 말아요.

이게 다 교감, 교장 연수하면서 들은 교육 심리학 풍월이라요."

이옥분 선생이 울음을 포기하고 현상을 유리한 국면으로 타개하면서 다시

달려들 태세를 갖추려고 하였다.

 

"여보, 싸우지 말자고 했지요. 하긴 당신의 말이 크게 위안도 되지만

지금은 누가 이기고 지거나, 칭찬이나 비난 받을 근거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하는게 아니라오.

빨리 결론으로 들어가리다.

내가 평생의 소원이 만권당(萬券堂)을 지어 오거서(五車書)로 채우고 가는

것이었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걸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다행하게도 모교

도서관의 별실에서 그 꿈을 흉내는 내는가 보오.

지금 내가 그곳으로 기증하는 도서에 나와 당신이 갖고 있는 이 모든

자료들을 넣어서 보냅시다.

'영원히'라던가, '영구적'이라던가, 하는 말의 현실적 한계를 내가 모르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인식력이 상상하고 우리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은 이 책과 자료들이 '영구 소장 도서'로서 불멸의 생명력을

갖게 될 것 같소.

우리 대학 도서관이 참으로 훌륭한 기획과 발상을 했어요.

내가 구한 귀하거나 일반적인 모든 책들 뿐만 아니라 지도교수로 배출해

제자들의 석박사 학위 논문, 내가 논문 작성을 위하여 준비했던 카드와

기초 자료 일체, 심지어 해적판이라는 혐의를 쓸수도 있는 복사본,

또 그럴 마음만 있다면 내 사적인 일기장, 공식적인 앨범은 물론이려니와

내 사사로운 앨범까지도 기증만 하면 모두 소장해 주겠다니 이렇게 고맙고

의미심장할 데가 어디 있겠오.

아무래도 수집과 전시와 보존의 목적이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아간 인간들의

모습을 후대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서 보여주자는 깊고 높은 뜻이 발견되는

대목이란 말이오.

그 자료 속에 아직도 태우다 남은 당신이 보존해온 모든 공식적인 보물,

그리고 그보다 몇십배 더 가치가 있을성 싶은 당신의 사적인 보물 보따리도

모두 넣어서 내 문고 코너에 영구 보존합시다---.

저 빛나는 이민형 시인의 작품과 자료들까지 모두."

 

"그런 내용을 왜 이제야 알려줘요? 엉엉---."

그녀의 입, 아니 목에서 그제서야 제대로 울음이 생성되어 나왔다.

"당신도 이제 와서야 사정을 다 털어놓았으니 나도 그걸 받아들여 짧은

시간이나마 고통스럽게 삭이고 타협하여 방금 내린 결정이 아니겠소.

그건 그렇고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아호 받은게 더러 있잖소.

그걸 넣어서 영구 소장 문고의 이름을 지으라는데 무어라고 할까?

당신이 한번 결정해 주시지---."

"제가 뭘 알아요. 당신이 알아서 다 하셔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얼른 양미간을 좁히며 무얼로 고를까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두사람을 태운 차가 어느새 그들의 농가주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끝)

 

아래에 올린 "후기"와 "사족" 까지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후기;

 

모교 대학 도서관에 "영구 보존 도서 문고"라는 개별적 공간이 마련되어서

약 5000권의 변변치 못한 도서를 기증하면서 남다른 감상을 맛 보았습니다.

 

오거서 만권당(五車書 萬券堂)에는 비교해보는 일 조차도 송구스럽지만

범속한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보다 더한 벅찬 감회를 느낍니다.

 

저는 지리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아직 정년이 아니며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교장 선생님도 가까이 두지 못했습니다.

 

별장은 커녕 농가주택도 없습니다만 마음 속에는 마침내 오거서 만권당을

지었습니다.

정년이 되면 가끔 고향에 내려가 제 도서가 따로 보관된 공간에서 한 참

앉아있다가 올 생각입니다.

 

책갈피를 뒤적거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지루한 글, 읽어 주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

 

 

 

 

사족

 

五車書는 莊子의 惠施多方其書五車에서 유래되고 

두보(杜甫)의 柏學士茅屋 (백학사모옥)에서 詩心으로 만개하였습니다.

 

題 柏學士茅屋(제 백학사모옥)

 

碧山學士焚銀魚(벽산학사분은어)벽산의 학사가 은어모양의 학사증서 불태우고 

                                            

白馬却走身巖居(백마각주신암거)백마로 달려서 몸을 바위속에 숨겼도다

                                            

古人已用三冬足(고인이용삼동종)옛 사람은 겨울동안 독서에 몰두했다거늘

                                            

年少今開萬券餘(년소금개만권여)그대 젊은 나이에 이제 만여권을 읽었도다

 

晴雲萬戶圓傾蓋(청운만호원경개)채색구름이 집에 가득차서 둥글게 덮게를 엎어

                                                                  놓은듯 하고 

秋水浮階溜決渠(추수부계유결거)가을물이 섬돌에 넘쳐서 도랑으로 떨어지네

 

富貴必從勤苦得(부귀필종근고득)부귀는 반드시 근면한 데서 얻어야 하니니

 

男兒須讀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남아로서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을지니

                                                                   라!

 

옛날 중국의 책은 대나무를 엷게 깍아서 글을 쓰고 여러개를 엮어서 한책

이라고 했으니 부피를 생각하면 다섯수레는 지금의 책으로 약 500권 정도

일 것입니다.

 

讀書萬券始通神(독서만권시통신)이란 말도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소식(蘇軾:호 東坡)이 柳氏二外甥求筆跡 (유씨이외생구필적)

이란 詩에서 한 말로서  '만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신과 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동 시대 (2)  (0) 2007.05.31
청동 시대 (1)  (0) 2007.05.29
책들의 고향 (6)  (0) 2007.04.18
책들의 고향 (5)  (0) 2007.04.17
책들의 고향 (4)  (0) 2007.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