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잉글우드 클립스(Englewood Cliffs)

원평재 2004. 9. 13. 08:17
뉴욕에서 인천 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의 옆 좌석에 젊은 여자가 홀로 앉아서 다이어리 북에 무얼 계속 붙이고 또 쓰고 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홀로"라는 것은 그녀의 옆좌석에 한쪽은 내가 앉아있고또다른 쪽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벌여놓은 잡다한 자료들 중의 이런 저런 "참고 팜플렛" 틈에는 갓 구어 낸, 아니 갓 찍어낸 "핸드 아웃" 서류 같은 것도 엿보였는데, 겻눈질하여 가까스로 읽어본 제목의 일부에는 무슨 커뮤니티라는 말이 여러겹 있어서, 사회학 계통에서도 "지역 사회"에 대한 깊은 논의가 그 내용인 듯 하였다. 거룩하게 영어로 쓰여있었음은 물론이었다.결국 그녀는 아마도 사회학이나 지역학 같은 것을 전공하는 대학 교수인 듯 하였는데 미국 쪽인지 우리 쪽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신문 나부랭이나 뒤적이다가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내 몰골이 순간 말할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에라, 조는 시늉이나 하며 인천 공항까지의 열세시간 동안 시정 잡배 같은 동승객이 되는 수 밖에 없겠구나.  적지않은 내 비행기 탑승사에 최악의 기록이 되겠네.그래도 부킹을 할 때 데스크의 아가씨에게 눈웃음을 치며 내 좌석을 창쪽이 아니라 복도 쪽으로 확보한 것만도 천만 다행이었구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찮은 배설을 하기 위하여 이런 거룩한 여인에게 수시로 통과 양해를 구해야 했었을 것이고,그럴 바에야 나는 차라리 방광의 용적을 낑낑대며 두 배로 늘리고서라도,땀을 뻘뻘 흘리며 비행시간 내내 참고 있었을 것이다.시간이 좀 흘러서 내가 잠시 비몽사몽간에 호접몽을 꿈꾸며 음미하고 있는 사이 배설의 욕구를 먼저 느낀 쪽은 그녀, 그러니까 그 여자 교수였다.대저 아름다운 여성일 수록 요도가 짧거나 방광의 용적이 부실하거늘---. 나는 산해관의 수문장이 귀비를 통과 시키듯이 위엄과 연민을 다하여 통과의례를 다하였다.이럴 때 통과의례, "rite of passage"라는 용어가 꼭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좀 틀렸지만 귀비에게 이런 정도로내 지식과 지성의 오류를 알면서도 범하는 것은다만 약소한 공물(貢物)에 다름아닐 것이었다.어쨌거나 그 통과의례의 귀중한 순간에그녀가 펄럭이며 발산한 독특한 향수가 깊이 마신 내 폐부에 오래 존재하였음은 항간의 다반사여서 췌언을 불허하리라---.배설이 삼락(三樂)의 경지에 포함 되는지는 경황 중에 상고키 어려웠으되, 하여간 불편한 노숙(?)과 깊은 학문적 작업에 진이 빠지고 거기에다 삼락 직후의 느슨함마져 가미된 귀비의 돌아오는 모습은,흉노족에게 집단으로 시달린 자금성 황녀의 몰골이었달까, 아무튼 시정 잡배인 내 꼴 보다도 갑자기 훨씬 더 초췌해 있었다. 아,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변한 할머니의 형상이 아닌가.그렇다면 이제 말을 아끼거나 크게 조심할 터 수는 아닌 듯 하였다.   나이로 흥정을 하는 이 교활함!"지역학을 하시나요?""네? 하하, 부동산 하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그녀는 목소리도 걸걸하였다."네?"이번엔 내가 흠칫하였다."리올터 자격증도 있고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일했어요. 요즈음은 세미 리올터랄까---, 반쯤은 은퇴한 셈이죠."













"그럼 밤새 붙이고 쓴 건 무엇입니까?""아, 옛날 거래 자료들을 다시 정리한 것이지요. 비행 시간의 무료를 달래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작업이었어요. 요즈음 부동산 경기가 너무 좋아서 귀국했다가 다시 나가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열심히 뛸까 생각중이죠,""어디서 하세요? 맨하탄?""아니, 뉴저지에서 해요. 특히 포트 리---.""그럼 한인들을 상대로 많이 했겠군요?"내 큰 아들은 그 곳 포트 리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살고았다. 그 곳 지명을 대었더니 아주 좋은 곳에 산다고 추켜 주었다. 서울로 치면 강남의 전세값도 안되는 돈을 넣고 매달 갚아나가는 수준이지만, 아들이 사는 공동주택의 단지에는 출입구에 멋진 철제 게이트가 있고도어맨이 자동으로 문을 개폐해 주며허드슨 강의 물결이 찰랑거리면서도 잘 가꾼 가든까지 있어서그녀의 말이 단순한 립 서비스 수준은 아닌 듯 하였다."그래도 태너 플라이는 따라가지 못하잖아요?""그게 학군 탓이지요.""그럼 우리 한국 사람들이 집값을 그렇게 올렸나요?""영향이야 좀 있지만 여기 미국에서도 성공한 백인이나 히스패닉들 모두 학군 타령을 하지요. 사람 사는게 다 똑 같아요.""잉글우드 클립스는 어때요?""거기도 참 좋지요."잉글우드 클립스에는 사연이 좀 있었다.대학 때에 읽은 타임지에 뉴욕의 집세와 물가를 견디지 못하여 탈출하는 출판사가 많은데 그 사람들이 새로 잡은 곳이 허드슨 강 건너의 잉글우드 클립스라는 것이었다.문학 청년의 감수성에 그 동네 이름, 잉글우드 클립스가투영되어서 30년을 풍화되지 않고 버티었다. 하긴 지금도 많은 출판사들이 꼬리표에 잉글우드나잉글우드 클립스를 본적으로 붙여놓고 있다.뉴저지의 저지 시티 일대가 그 때만 해도 정말 저지대여서 땅값이 싸고 인건비도 싸고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물론 잉글우드 클립스는 꼭 저지대는 아니지만---.오랫 동안 내 뇌리에만 존재했던 그 곳을 나는 이번에 아들과 함께 드라이브하였다. 고급 주택들 사이에 아직도 출판사들이 편재해 있어서 지적인 분위기를 다분히 풍기고 있었다.아들과 며느리는 맨하탄에서 처음 만났지만 데이트는 허드슨 강을 건너서 주로 이 잉글우드 클립스에서 했다고 한다.드라이브 하면서 내 젊은 날의 지적 편력을 이야기했더니 아들이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경험 영역이 이런식으로 중첩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깊이 인문적 전율을 느꼈으나 아들은 이내 다른 주제로 옮겨갔었다. "클립사이드 쪽은 어때요?"잉글우드 클립스 동네가 너무 비싼걸 아는 내가 그 옆 동네인 클립사이드에 관하여 물어보았다."클립사이드는 좀 빠지죠. 하지만 나쁘진 않아요."그녀의 남편은 엔지니어 계통으로 전문직이어서 두 사람은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참 많이 벌었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킨 장본인들이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노후에 대비한다고 주식에투자했던 것이 완전히 망해서 원금의 10-20%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상가 건물과 임대 주택을 몇 채 씩 소유하고 임대하는데,그것도 세를 받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다.세입자가 "내 배 째!"하는 바람에 그 때마다 법정에도 여러 차례 섰다고 한다.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마침내 비행기가 착륙 고도에 들어섰음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 사이에도 몇차례 다시 내 무릅과 앞쪽의 의자가 만들어 놓은 좁은 산해관을 통하여몇차례 세면장을 들락거렸는데,이번에는 또 시시각각으로 얼굴이 예뻐지더니 드디어 인천 공항에 착륙할 때 쯤에는 맨 처음에 보았던 아름다운 귀비로 다시 환생하였다.우리는 축지법을 쓰듯 쉽게 인천 공항에 도착했음을 자축하였다.입국심사대로 향하면서 그녀와 나는 베테란 답게 짧은 줄을 얼른 골라서 들어서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깊이 고개 숙여 나에게 인사하였다.얼떨결에 나도 깊이 고개를 숙이며 내 이마 쯤에 있는 태그를 쳐다 보았더니 "외국인 전용"이었다. 그녀가 미국 시민이라는 사실을 내가 잠시 잊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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