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한 시간 안에 두번 주례서기

원평재 2004. 9. 9. 08:38
어지간한 주례는 이제 고사(固謝)하는 단계이지만, 친구들의 자제 혼사에까지 거절의 손사래를 칠 수는 없나보다.다만 이제 주례사는 즉석 연설을 삼가하고 꼭 챙겨가서 살을 좀 붙인다. 순발력과 기억력이 모두 떨어진 탓이다. 흘릴까봐서 예비로 뒷주머니에도 하나더 넣고 다닌다.얼마전에도 주례부탁을 받았는데 토요일이라서 무언가 겹치는듯 하였으나 설마 오뉴월에 주례가 겹치랴 싶어서 잠시 망서리는 모양을 보이면서도 수락하였다.결과적으로 이 망서리는 모양은 참 잘한 일이었다.나중에 확인해보니 같은날 한시간 앞 쪽으로 주례 하나를 이미 약속한 처지였다.주례 약속을 해놓고 당일 아침에 확인까지하고도 펑크를 냈다는 어떤 교수의 사례나, 일주일 전 토요일을 주례 당일로 알고 달려갔다가 헛걸음메 땀만 흘렸다는 어느 변호사하는 친구의 에피소드 보다는 그래도 상태가 양호한 편인가---.그런데 같은날 두번째로 주례 부탁을 한 친구가 막무가내다.선릉에서 12시 주례면 한 15분만에 사진까지 찍고 대기해둔 모범 택시로 자기네 호텔 예식장까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착각때문이든 뭐든 일단 약속되었던 주례이기도 했었고, 또 대접 받는 기분도 들어서 나도 얼떨결에 재수락이랄까 확정을 해버렸다.하지만 다시 생각할 수록 땀이 나는 노릇이었다.주말 정오에서 한시 사이의 강남 교통 사정이라---, 맨하탄이나 이보다 더 복잡할까---.비상사태에 돌입한 기분으로 우선 그간 생각만 하고 실천못한 구조조정을 실시하였다.한때 30분짜리엿던 주례사가 15분대로, 다시 10분대에서 요즈음은 7분대에 이르렀으나마의 7분벽을 깨지 못하고 있었는데 과감하게 5분 이내로 줄였다.또한 혼주와 사회자에게 부탁하여 식을 12시 5분전으로 조금 당기게끔 양해가 되었다.사진 순서야 대형 카메라로 가짜 한번, 진짜 한번,주례와 맨먼저 찍는데 줄일 부분이 없었고,모범 택시에는 누가 한사람 타고 앉아 있다가 "출발!"하면 그냥 나르는 택배가 될 판이었다.주례석에서 보니 혼주는 약속대로 5분전에 입장을 하였다.그런데 안혼주들의 점촉 행사가 개시되어야하는데 늦게온 하객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올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아울러 시골에서 올라온듯한 할아버지들이 혼주석까지 찾아와서 "이 사람아, 혼주가 이렇게 먼저 들어오는 결례가 어디있느냐"고 한참을 따지고 있었다.이러다가 날샐 판이었다.도우미들을 동원하여 점촉을 채근하니, 느릿느릿 촛불을 붙이고 각자의 의자로 그냥 들어갔다가, 아차 하면서 다시 나타나 안혼주 끼리의 인사를 오래토록 머리숙여 우아하게 하고나서 천천히 들어갔다.짜고서 늦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사회자도 준비해온 길고긴 시나리오를 읽다가 틀려서 다시한번, 이러기를 서너차례하였다. 다만 주례사는 멋있고도 짧았다(!).축가 시간이 되었다.그런데 사회자가 축가대원을 부르고 또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다.마침내 사회자는 신랑에게 축가를 대신 불러야한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였다.해병대 중위인 신랑은 몇차례 사양하더니 마침내 못이기는척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피아노 반주에 맞추어서 모니터도 없이 길고긴 노래를 2절까지 불러서 하객들을 웃기는 것으로 봐서 이것도 짜고치는 고 스톱인가---."신랑과 신부가 새인생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때에 하객 여러분께서는---"하는 순서는 첫발자국부터 웃음판이 벌어졌다.해병대 의장대가 네겹으로 진을 치고 칼로 길을 막으며 첫번째 관문에서는 "나는 봉잡았다"를 무려 열번(!)이나 외치라는 것이었다.물론 열번을 하고나니 "복창 불량!"에 걸려서 다시 열번.맙소사.두번째는 대한민국 만세 열번이던가---.세번째는 또 무엇이더라---.네번째에 대한민국 해병장교는 신부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이 무슨 몰상식한 처사인가!) 번쩍 안아서 번쩍이는 칼들의 위를 건너갔다.이제 다시 들어와 정렬한 신랑 신부와 주례는 또 한차례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진사의 지시에 순응하기를 몇차례, 힘든 사진 한장을 완성해 내었다.시간은 이미 12시 40분, 헬리콥터를 동원하면 모를까 1시 주례는 물거품이었다.빙고! 내가 이겼다. 사정을 아는 주위의 내 친구들은 말이 난김에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나는 두 곳 주례의 불가능 쪽에, 그리고 1시 혼사의 혼주는 가능쪽에 배팅을 했었다.친구들은 대체로 반반의 배팅이었다.물론 불가능에 대비하여 대타 주례는 좀 한가한 사람으로미리 섭외가 되어있었다.후일담이 더욱 재미있다.대타 주례도 교통난으로 5분 지각을 했다고한다.당황한 주레는 또 메모같은 것을 잊어버렸는지 3분도 안되는 주례사를 간신히 마치더라고 했다.전말을 듣고 나자 1시 혼사의 혼주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내 마음은 대단히 안도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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