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원유회 갔다온 이야기입니다.
함께 근무하는 ROTC 출신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는 정년하신 OB들까지 오셔서 나이 차이가 30년 정도로 벌어져
있습니다.
생각하는 폭도 그만큼 광역대이지만,
"우리는 젊은 사관, 피끓는 장교다"로 시작하는 군가를 한번 부르고나면
눈의 초점이 한데 모입니다.
일년에 두번 그런 모임을 갖습니다.
DMZ도 자주 드나들었으나 금년에는 도라산 역이 준공되는 마당이어서
다시 비무장 지대를 찾았습니다.
전에는 땅굴 견학을 위해서 드나들었지만 이번에는 남북이 이어지는
도라산 철도 역사를 보러들어가니 감회가 컸습니다.
물론 지킬 가치는 소중하게 가슴에 새기면서---.
이날 시계(視界)가 좋지 않아서 멀리 보이는 개성 공단이 선명치 않습니다.
다음에는 망원 렌즈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니 직접 개성공단을 견학도 하고 비무장 지대가 원유회 터가 되는
꿈도 갖여봅니다.
학군단 출신 장교의 앳띤 얼굴이 가슴에 서늘하게 와서
박힙니다.
도라산 역사, 내부 마무리 공사가 한창입니다.
"도라"라는 이름은 신라의 마지막 적통인 마의태자가 개성으로 들어가면서
뒤를 돌아 돌아 보았다는 데에서 나왔다는 전설도 있고,
또 개성 관아에 나가있던 관리들이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두고운 미기들을
그리며 마지막으로 돌아돌아 본 데에서 그 유래가 있다고도 하는군요.
한자는 물론 나중에 갖다 붙였다는데---.
화석정은 임진강변, 이런 절경을 내려다 보는 곳에 있습니다---.
화석정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데 원로께서 "찍사"를 자청하시고 본인은
얼굴 내밀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적도 없는 이 곳에 갑자기 미녀가 나타나서 원로의 등을 밀어
단체가 서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일행중의 한사람으로 부터 디카를 뺐다시피 하여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것입니다.
"화석정"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야한다고 살신성인의 자세까지 취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봉사를 마치고 그녀는 화석정 뒤로 홀연 사라졌습니다.
정자 현판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이 남아 있군요---.
이이 율곡의 화석정에 관한 한시가 남아있어서 이 정자 옆에 서 있는데,
제가 잘 아는 임동석 교수의 우리말 번역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디카에 담으려는데 이 때부터 똑딱이 카메라가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이제 바삐 자운서원으로 옮겨서 이이 율곡 선생을 뵈러갑니다.
율곡 선생의 묘소 앞입니다.
새로 세운 비석이 있지만 내려오는 비석만 넣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봉분이 율곡 선생이 누워계신 곳이고 뒷쪽은 부인의 묘소입니다.
합장이 아닌 사실도 기이하고 뒷쪽(그러니까 더 윗쪽)에 묘소를 써서
일종의 역장이 된 데에도 사연이 있었으련만, 내려오는 설명은 없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에게 몸종과 함께 붙들려서 자결을 하신 분입니다.
파주 문화원에서 나온 조 선생의 설명이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공식 직함은 "해설사"라고 합니다.
율곡 선생의 자운 서원이 중창된 데에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한몫 한
셈이랍니다.
그쪽도 율곡 선생에 대해서 평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남북 대화가 처음
시작될 때에 여러가지가 배려되었다는 것입니다.
율곡 선생의 묘소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합니다.
좌우로 산세가 포개어져 있고 좌우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다가 보이지 않게
돌아나간다고 합니다.
멀리 임진강이 보이는 것도 또한 명당의 요소라고---.
그 아래쪽은 율곡의 선대와 후대가 안식을 하고 있는데 이 위치 보다는
못하다고 합니다.
지방 도시의 모습은 보는이의 입장에서는 항상 즐겁습니다.
서울에서는 다 사라진 "다방"이라는 글자가 정겹습니다.
앞에 삐딱하게 세워놓은 오토바이는 "커피 배달" 용인지---.
점심으로는 참게장 백반과 메기 매운탕을 먹었습니다.
논게, 참게가 농약 때문에 다 죽어서 멸종이 되다시피 하다가 얼마전부터
치어를 방류하여 개체수가 많이 늘고 입맛에 오르게 되었다고 음식점 주인이
설명을 합니다.
누가 또 아는체 뒷전에서 말을 덧댑니다.
"치어 방류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인공 사육이랍니다---."
포천으로 향하는 곳곳에 미군 부대가 철수한 병영들이 을씨년 스럽게
보입니다.
사실 동두천, 운천, 법원리---,
캠프 레드클라우드(?), 님블,하비---, 수도 없이 많던 캠프 ---.
포천 인근에 온천이 난립하여 어리둥절한 적이 있는데, 이게 온천이 아닌
거짓이라고 판명이 나고 오래동안 영업정지를 당하고 난리가 또 났었지요.
요즘은 온천이라는 표시는 다 지우고 "목간통" 비슷하게 운영이 되는데
그래도 손님이 많기로는 여전합니다.
우리도 달걀 썪는 냄새 비슷한 것을 맡으며 노천탕까지 즐겼습니다.
즐거우면 되는 것이니까---.
일행중에 유명한 "물 박사"가 계셔서 동양 최대의 물공장도 구경하고
하우스 맥주인 "이동 브로이" 생산 시설도 둘러보았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이 곳 매니저인데 설명도 좋았고 나중에는 통기타
노래도 선사해 주었고---.
스리랑카에서 온 근로자들입니다.
이름을 물으니 "로이고이"와 "실와"라고---.
퍼스트 네임을 물으니 "아이구, 너무 너무 길어요---."라고 합니다.
그쪽 문화가 그렇답니다.
하우스 와인이 거나하고 배도 불렀으나 예까지 와서 이동 갈비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일행은 이동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동갈비는 알려진대로 원래 군부대에 면회 온 가족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나와서 인근 식당의 불고기를 맛뵈이던 시절이 그 효시입니다.
그러다 보니 식당 이름에 모두 "원조"가 붙었고---.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서 불고기는 없고 갈비만 있답니다.
곱상한 부인이 주인인 이 갈비집으로 발길을 잡은 것은 이분과 우리 일행 중,
어떤 멋쟁이, 잘 생긴 분과의 깊은 인연 때문입니다.
오른 쪽의 이 분이 20년 전, 이곳에서 소대장 근무를 할 때에 자주 찼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 아주머니의 따님이 시집을 가서 벌써 또 딸을 낳았다는군요---.
세월이 유수입니다.
봄날이 지나가고 원유회도 이제 끝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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