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의 목적이 모름지기 보고 즐기고 또 느끼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면
아르헨티나는 무엇으로 이토록 여행자들을 모으는가?
아마도 이과수 폭포, 탱고의 본향, 그리고 에비타가 영면한 묘역으로 사람들을
순례자처럼 이끄는 것 같다.
위에 든 세가지 때문에 이 곳에 왔다면---, 이 거대한 팜파스의 평원을
그래서 찾아왔다면---, 그렇게도 명료한 목적을 품고 왔다면 그 여정은
정녕 "순례 역정"이라 하여도 좋으리라.
나도 그리하였다.
"이과수 폭포"를 마치고 이번에는 에바 페론, "에비타를 조상하는 차례"
라고나 할까.
에바 페론, 에비타의 묘역
에바 페론(1919-1952)---,
가난한 농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3류 배우로 전전하다가, 후안 페론
대통령과 누구도 범접못할 치열한 사랑을 한 끝에 영부인이되었고,
노동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지만,
33세를 인생의 절정으로 삼아 투병 끝에 암으로 세상을 등진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그녀는 1978년 6월 21일 런던의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 뮤지컬
<에비타>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브라질리아 공항을 들렀다가 다시 떠난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아르헨티나,
팜파스 대평원은 다시 한번 나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이제 오래 그리던 "아름다운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번에는 거대한 물결이 눈 앞에 전개되었다.
놀라움에도 한계가 있어서 이번에는 차라리 바다, 그래 대서양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소박한 기대도 절박한 심정을 무마하지는 못하였다.
"저 큰 물결은 설마 다른게 아니고 대서양이 틀림없겠지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다닌다는 교민 여학생 가이드에게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니요. 바다라고들 생각하시는데---. 저건 강, 라플라타 강입니다."
좌우간 강폭만 220 킬로 미터라고한다.
이과수 폭포와 이따이푸 발전소를 있게한 "파라나 강"을 원류로하여 여기
까지 흘러내려온 장강인데, 그 폭이 어지간한 강의 길이만 하였다.
(공항에서 내리면서 본 "라플라타 강"에는 큰 선박이 떠있고 강폭이 220 킬로
미터에 이르렀다.)
("강" 때문에 공항에서부터 놀란 가슴을 안고 일단 시내로 들어왔다.
에비타처럼 생전에 이미 유명하였거나,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 둔 부자들의
묘역은 부에노스 아리레스에서도 가장 땅값, 집값이 비싼 구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강남 역"이나 "압구정 동"이 있는 동네에 거대한 묘소가 빼꼭히
들어차 있었다.
묘역 유지비도 당연히 비싸서 후손들이 감당을 못하면 방을, 아니 묘를
빼야하는 모양이다.
기다리는 돈 많은 가문들이 줄을 서 있다고한다.)
이 거창한 묘소들과 부자들의 대저택이 함께 있는 곳이 바로 레꼴레따 구역
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 살아 숨쉬는 양택과 돈이 많았던 죽은자들이 묻혀있는
음택, 그러니까 유택이 혼재하는 셈이었다.
압구정 동, 아니 레꼴레따로 가는 길이 아무리 바빠도 도중에 있는 카페에
일단 들렀다.
커피 한잔으로 숨을 돌려야했다.
이 곳 커피 잔이 아주 작은 것은 익히 아는 바와 같았다.
아르헨티나는 카페 문화가 프랑스나 이딸리아에 못지 않다.
오월의 광장에 있는 카페, "또르띠니"가 가장 유명하여서 문호 보르헤스,
작곡가 피아졸라, 화가 베니토 킨케라 마르틴 등이 자주 들리던 곳인데
여기 레꼴레또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카페와 바아도 역사가 가장 오랜 명소
중의 하나에 속하였다.
이곳 노천 카페도 유명한 곳이라는데 아래에 보이는 오래된 등나무의
굵은 위용이 압도적이었다.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선 성당---.
평화 속에 영면을 바라는 기원문이 묘역 정문에 있다.
이 조각품들은 모두 묘역 가문의 소유이자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음택의 골목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었다.
오른쪽 동판에 에바 페론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에바는 두아르테라는 성을 갖인 친정 가족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남편인 페론은 여기 묻히지 못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갔다.
합장에 따른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 군사 정권에서 따로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앞,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조촐한 성당에서 평범한 우리들은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
문화회관이자 박물관도 가까이에 있었다.
유명한 "핑크 하우스", 대통령 궁은 아니다.
이곳은 부자 아파트 동네이다.
핑크 하우스 는 나중에 방문한 "오월의 광장"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에바가 살았을 때에는 발코니에 나와서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뿌려주었고 군중들은 열광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가로막을 치고 수리중이었다.
우리 경복궁, 광화문 앞과 사정이 비슷하였다.
수리중인 핑크 하우스---.
아래쪽 사진들은 다시 오월 광장 주변의 정부 청사, 대형 건물들이다.
오월 광장에 있는 카테드랄의 벽면에 붙은 구원 불멸을 상징하는 불꽃.
카테드랄이라고 하면 성당이라는 보통명사인데 고유명사로 들렸다.
(지하철, "오월의 광장 역".
나무로 만든 지하철이라고 하였지만 객차의 겉에 나무를 붙여놓았다---.)
"7월 9일의 거리"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성취와 좌절은 어디에서 왔을까?
20세기 초, 냉동선의 등장으로 이 나라는 유럽에 육류를 독점 공급하며
부를 쌓았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부의 편재가 심하여서 상위 2퍼센트 자본가들만 그
부를 독식하였고, 이어 시민 혁명이 일어나서 에비타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축적된 자본이 그 과정에서의 노력과 창의성은 도외시되고
정의로움을 근간으로 한, 공평한 나눔의 원칙과 소망에 따라 지리멸렬한
분배가 되면서 국가적으로는 선택과 집중을 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유럽 대륙의 잇단 전란과 이에 따른 금수 조치와 소비의 위축,
뒤이은 미국 육류 업계의 막강한 세계 시장 지배구조 등이 이 나라를
오늘날 우리보다 못한 경제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극단적 부의 편재도 이웃한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치유되지 못하였다.
"미국의 음모론"은 그 동안 국제 질서와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가장
간단하고 편리한 이론이 되어 왔으나 21세기는 이런 편리한 잣대를 냉혹
하게 빼앗아 가고 있는 실정이다.
에비타, 그 전설의 고향을 찾으며 나그네의 발길이 두서없이 흔들렸다.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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