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막걸리 문화 예술제

원평재 2007. 5. 4.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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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여기 전주 영화제 이야기를 서울에서 했더니 내려간 김에 만원짜리

전주 암반수 막걸리와 상다리가 부러지는 안주 맛도 보고 왔냐고 누가

묻더군---.

그때 못 마셔본게 지금껏 유감으로 남아있네."

"아이구, 그래도 다른 더 좋은데로 모시고 싶습니다."

"아닐쎄, 다른건 다 우리 학술 답사 스케줄에 있어서---, 잠시 잠깐 나만

그곳 막걸리 마을에 가보고 싶네."

 

전주에서 교수하는 제자가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간곡히 청하는 것을

막걸리 마을에 잠시 들리는 걸로 내가 우겨서 이겼다.

큰 주전자로 막걸리 한되와 안주는 부지기수,

그게 고작 만원짜리 한장이라는 그 마을에 가보고 싶었다.

지난 1년 동안에 벼른 일 중의 하나였다.

 

호텔 앞에서 행선지를 두고 싱갱이를 하는 사이에 안개비가 잠시 눈썹에

앉았다가 미끌어져 내렸다.

영화제 참가 일정대로 프랑스 영화 한편을 보고 나와서 저녁 먹을 시간

사이의 짧은 무방비 시간에 세작(細作)처럼, 오열(五列)같이 이 도시를

가로질러 보자는 심산에 안개비도 분위기 상 조연출이었다.

"오열이라니요?"

내 혼잣말에 제자가 물었다.

"아, 스파이 말일쎄."

"아-- 네, 군대에서 제4열까지가 정식 정열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제5열이

스파이라는---."

"그렇게 슬그머니 여기를 보고 가자는 마음일쎄."

 

나다니엘 호돈의 "로망스 론"도 생각이 났다.

"햇볕 아래 보이는 사물을 그리기 보다는 달빛 아래 보이는걸 표현하겠다.

전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오지 않는가.

직접 눈에 들어오는 것 보다는 거울에 한번 반사된걸로 소재를 삼겠다.

하다못해 물결에 한번 튕겨진 것일지라도---."

 

우리가 묵는 호텔과 막걸리 마을이 신도시, 구도시로 가를만큼 그렇게 좀

멀었다.

전주는 시시한 세작의 음모 따위는 아랑곳 하지않고 안개비 속에서 무방비

도시처럼 가슴을 열었다.

 

 

 

제자가 문을 민 곳은 이 "소문난 집"이 아니었다.

우리가 들어갔던 곳의 옥호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마을의 모든 주점이

사실은 모두 소문난 집일 바에야---.

막걸리 동네는 삼천동 막걸리 지역을 필두로 하여, 서신동 지역, 경원동 지역,

효자동 지역, 평화동 지역 등으로 할거하고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삼천동이었다.

 

 

 

"전주 시청에서 이곳 전통 마을과 거리를 다듬어 유지하면서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하여 금년에는 없는 시비에서 그나마 몇억을 지원하였답니다.

그 바람에 거리의 면모가 일신되었지요."

"참 잘한 일이구만---."

"사실은 그런데---."

그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시청에서 애를 쓰고 주점 측에서도 노력을 하여 노래 패들과 춤꾼들도

손님들이 부르면 득달같이 오게끔 시스템을 구축하고 벼라별 궁리를 다

했지만 뾰족수가 없나 봅니다.

사람이 줄어드니까요---."

 

전주 인구가 얼마전 까지도 50만을 가즉 넘었는데 최근에는 혁신 도시다

뭐다 해봐야 계속 서울로 빠지는 인구와 저출산 등으로 상주인구가 드디어

50만 밑으로 내려 앉았다는 것이다.

 

"여기 막걸리 마을도 타격이 크겠네."

"네, 외지에서 놀러오는 사람들도 한정이 있고, 그래서 여기 속이 타는

사람들로만 조금 북적거리더니 이제는 그런 사람들도 자꾸 빠져나가고

하여간 소경 제 닭 잡아먹기 식이랍니다."

"여북하면---, 속이 터지겠지."

"서울 사람들은 우아하게 청담동이나 북창동에서 양주나 마시겠지요."

"우아한 사람들이 밤중에 술마시다 말고 청계산에는 왜 또 갔는지---."

"선생님은 주로 뭘로 드세요?"

"나야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지. 칠레와 FTA 이후로 와인도 아주 싸졌고,

그래 그래 맞어, 여기 이거 홍어도 지천으로 들어오잖아."

 

내가 농담을 하다가 아차 싶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은 전주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엉뚱한 인간의 썰렁한

유머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많이 준비하는지 상차림이 늦어져서 조급한 마음으로 옆자리에

양해를 구하고 먹다남은 음식에 카메라를 갖다 대었다.

벽에 붙은 사진과 낙서가 이 집의 명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건가요?"

"아, 초고추장 비비는 것이제."

"사진 한장 찍소."

"아, 이거 손에 고무장갑을 꼈는디---."

"맨 손으로도 하요?"

팔뚝이 건장한 주모가 대답은 않고 나긋나긋 웃으며 고추장을 부비기만

한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윽고 안주가 한 상 가득, 상다리가 불어지게 들어왔다.

막걸리를 다 마시고 또 한 되를 더 시키면 다른 안주가 더 푸짐하게 들어온다

한다.

"다음에는 뭘로 들어오나요?"

"술만 시키세요. 안주는 미리 안가르쳐주제. 미리 알면 음식맛 버리요."

궁금한 마음 굴뚝 같았으나 더 시키고 마시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바빠서 일어납니다."

내가 말했다.

"여기 술 값 만원 있어요."

제자가 술값을 냈다.

"만 이천원이라요."

"이천원 올랐네요?"

"4월 10일부터 여그 다 조금 올랐지라---."

"그거 올라봐야 참말로 남는게 없겠소."

내가 식탁 전체를 가득메운 안주들을 보며 참으로 답답하여 말로나마

주모를 거들어 주었다.

쓰잘데 없는 공짜 팁이었다.

밖에는 세우(細雨)가 어느새 굵은 비로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