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문화의 파편들

전주 일지; 최명희 문학관/한옥 마을/경기전/약속---.

원평재 2007. 5. 6. 05:58

 

25068

 

 

 

전주 나들이의 둘째날,

영화관에 들어간 학생들과는 달리 거리 구경에 나섰다.

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실비가 오다말다 하였다.

전주를 그냥 "예향"이라고만 하면 입에 발린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게 전주는 도시 전체가 항상 그냥 "예향"으로 닥아오는 인연만 같다.

 

생각해보니 한 20여년 전, 팔팔 올림픽이 열리기 몇해 전에 전주에

처음 왔었다.

나라 경제가 아직 힘이 모자랄 때였으니 전주도 피폐하였다.

거리에는 먼지가 폴폴나는 도시여서 그랬는지 나를 초대하여 안내하던

사람은 얕으막한 동산같은  "다가 공원"의 맨 위로 올라가서 전주 시내를

휙 보여주고는 다시 내려와 불량 건물들 사이에 폭 빠져있는 큰 기와집,

알고보니 "객사"라는 이름의 한옥 하나를 또 보여주었다.

 

 

지금은 객사 건물도 주변이 정비되고 보니 번듯하게 큰 얼굴을 내밀었다.

그 옆으로는 고전과 현대미가 잘 조화된 "걷고 싶은 길"이 손짓을 하였다.

 

 

 

 

예전 그때, 허름한 동네 뒷산 같기만 하던 "다가 공원"의 꼭대기에는

위태로운 날맹이를 앞에하고 좁은 개활지가 있어서 거기 아침 산행꾼이

매달릴 운동시설, 그러니까 철봉과 평행봉이 주인없이 덩그렇게 서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때에 비하면 그래도 지금의 전주는 윤끼가 난다.

인구는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지만 그건 나라 전체의 고민이기도

하다.

 

"21세기에는 무얼로 밥을 먹고 살 것이냐"하는 문제는 국가적 아젠다이지만

전주의 옛 시가지(구 도심)는 그냥 이렇게 유난히 많은 화실, 공방, 서예 서실,

한지나 닥종이 공예하는 모습으로 유지되어 갔으면 싶다.

그런 염원이 외지에서 온 나그네의 한갓 이기적 욕심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으로 치면 교도(京都) 같은 분위기가 서린 이 천년 예향이 "IT"나

"나노" 산업의 시간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는 것은 서로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시가지를 어슬렁거리다가 대면하는 이 곳 "전주인"들의

태평스런 말씨, 느긋한 걸음걸이가 나를 사로잡는다.

한옥 마을 주변, 기와집의 안팎에서 내 기대는 절정에 달한다.

도무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듯한 그 일대의 정적 속에서 나는 떠나고 싶지가

않다.

 

보라,

이제 이곳을 떠나 귀경을 하면 "Seize the day!"(때를 놓치지 마라!),

증권사에서 매수 호가를 하는 소리처럼 다급한 외침이 우리의 주변을 소란

하게 만들 것이다.

서예 서실의 먹가는 소리, 전통 가죽 공방의 무두질 소리, 닥종이 공예하는

예인들의 풀칠하는 소리,

전주의 정적은 이런 소리들도 굉음으로 친다. 

 

 

  

 

전통 명품관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어있었으나 사정을 하니 허락하여

주었다.

명인들이 만든 작품이어서 어떤 것은 천만원대가 넘었다.

 

 

 

명장들은 명품만 만드는줄 알았더니 명주도 빚어내었다.

이 해 초에 명주 선물이 있었던 줄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한옥 마을에서 "경기전"으로 걸어오면서 찍은 사진이다.

뒤쪽에 성당이 보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은 "경기전"이 무언지 아무도 몰랐다.

홍살문이 보이니 임금하고 관계있는거라고 누가 말했다.

하긴 옛 건물치고 임금님과 관계 없는게 있으랴.

 

 

 

 

알고보니 "경기전"은 태조 임금님의 어진을 모신 곳이고 또 사고(史庫)도

경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사적지였다.

 

 

 

"경기전" 안내문이 나중에 눈에 들어왔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자리한 경기전(사적 제 339호)은 태종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되어 개성, 영흥, 전주, 경주, 평양 등 다섯곳에 태조의 어용전이 있었다.

하지만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전주를 제외한 네곳이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경기전만

유일하게 광해군6년(1641)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고종9년(1872)에 모셔오던 영정을 모사하여 지금까지 봉안해 오고 있다.

 

본전을 나와 왼편으로 돌아가면 전주사고(全州史庫)이다.

시원하면서도 울창한 대나무 숲과 넓은 정원이 잘 어울리는 이곳에는 마당 한 가운데에 '조선왕조

실록보전기념비'와 석등이 있다.

그리고 한 귀퉁이로 조금 치우쳐 있는 건물이 바로 전주사고이다.
전주사고는 춘추관과 충주사고 그리고 성주사고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세종21년(1449)에 설치되었다.
선조25년(1592)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와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은 안의,

손홍록 등 이 지역의 선비들이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경기전" 오는 길가에서 "최명희 문학관"을 만났다.

한뜸 한뜸 모국어로 수를 놓고 매듭을 지어서 혼불 열권을 내놓고 그녀는

일찍 이승을 떠났다.

그녀의 필적 한 획 한 획 마다에도 그 동양자수 혹은 매듭과 같은 수공이

서려있었다.

 

 

 

 

 

혼불의 원고 1만2천장의 분량이 허리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녀의 수공을 어찌 흉내라도 낼 수 있으랴.

무심한듯 한번 해 보라고 내놓은 틀이 있어서 못난 솜씨로 따라쓰고

낙관도 찍어보았다.

   

 

최명희 문학관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너무나 안쓰럽고 진지하고 또 격한

감상을 불러일으켜서 처음에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들어가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 길에서야 주변을 살필 겨를이 생겼다.

누가 조금 탓하는 목소리로 입구 옆, 저 헐어빠진 건물은 무얼까 하고 자문

하였다.

굴뚝이 있는걸로 보아서는 "공중 목간통" 같다고 내가 말했다.

"맞습니다. 탈의실이라는 희미하게 벗겨진 글자도 보이네요."

그가 맞장구를 쳤지만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건 오직 밥집 간판이었고 그제서야 배가 고팠다.

그래도 아무데나 퍼질러 앉을 수는 없고 "전주 백반"이 유명한 데를 찾아서

걸어갔다.

안내서에는 "전주 백반"이 아니라, 한정식이 유명한 집이라고 되어있어서

지역의 명소가 아니라 국가적 명소로 승격하였으나 예스런 호칭이

아쉬웠다.

"전주 비빔밥"이 "대한민국 비빔밥"이 되지 않아야하는 것 처럼---.

 

   

 

 

시내에 큰 성당이 둘이나 있었다.

윗쪽은 호텔에서 가까워 자주 본 건물이고 아래 쪽은 "경기전" 건너편에

있는데 전동 성당이라고 하였다.

명동 성당의 축소판 같다고 한다.

영화 "약속"을 찍은 곳은 아래쪽이라고 하였다.

   

 

차이나 타운 안에 유명한 한정식 식당이 있었다.

반찬 가짓수가 서른을 넘는 교자상을 한 상 떡벌어지게 받아서 반이나

남기고 전주를 떠났다는 글로 리포트를 마치자니 좀 민망스럽다.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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