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청동 시대 (5)

원평재 2007. 6. 5. 06:18

 

 

"안녕하세요, 선생님~."

나노 스커트 처녀의 통통 튀는 발성이었다.

"아, 우리 모델 처녀."

아가씨라는 접미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봐서 미희는 항상 모델들에게

처녀, 혹은 레이디라는 말을 붙여 뒤 끝을 다듬었다.

유화 실기반의 모델은 문화 센터에서 모델 협회로 단체 섭외를 많이

했지만 더러는 이 나노 아가씨처럼 프리랜서로 개인적 신청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이번 수료반 회원들께서 초청하셨나 보네."

"네, 김미희 선생님, 저는 이번에 얼레나로 돌아가요."

1년 기한으로 우리말 공부를 겸해서 모국에 머문다는 아틀란타에서 온

그녀는 미국에서 사는 곳을 항상 "얼레나"라고 하였다.

미국 처녀라기 보다 우리나라에도 흔히 있는 이 시대의 젊은 처녀였다.

모델로 포즈를 취하는 긴 시간 내내 잘생긴 한국 청년이 창밖에서 기다려

주었다.

잘못 보았던가, 그 사이에 미남 청년은 하나가 아니었고 두세명으로

얼굴을 달리하고 있었다.

 

나노 아가씨는 통통 튀는 목소리만큼 얼굴도 통통하여서 처음 목탄(木炭)

을 쥐고 크로키에 나서는 수강생들에게 곡선을 부드럽게 끌고가도록

하는데에는 더없이 좋은 모델이었다.

모델 실기를 할 때면 미희는 꼭 "헨리 제임스"라는 작가의 "진짜"라는 단편

소설을 많이 변형하여 짧게 소개하였다.

귀족 부인을 그려내야하는 화가가 막상 몰락한 귀족을 모델로 쓰고보니

제대로 분위기를 살릴 수 없어서 가난한 청소부를 쓰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결국 "심미적 진실"과 "현실계의 진실"은 다르다는 것,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자기가 만들고 허문다는 것, 모델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제2의

자기 자신, 문자를 쓰자면 "올터 에고(alter ego)"라는 것, 그런 내용

이었다.

그녀도 무슨 문학적이거나 철학적 내용을 담은 뜻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모델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수강생의 입을 막는 데에는 최고의

예방 접종이라는 노우 하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박하기 그지없는 남편에게서 들은, 아니 배운 내용이었다.

 

"고마워요. 사진 찍고 하는데에는 잘 나오시지들 않던데---."

"뭐가요---. 재미 있잖아요. 참 저 곧 결혼해요."

"축하해요. 그 미남 청년과?"

그녀는 자칫했으면 "그 미남 청년들과---?" 라고 할뻔하였다.

"네. 호호호." 

그녀가 신이나서 자신있게 답하고 웃음을 보탰다.

"어느 미남?"

끝내 주변에서 입방정이 나왔다.

사람들이 웃었다.

"저어기~. 오버 데어."

그녀가 조금 떨어져서 웃고 있는 어떤 청년을 가리켰다.

"어느 미남이라니요---? 유머러스워요, 아니 유머스러운가? 저스트

키딩!"

그녀의 말에 다시 웃음이 일었다.

"여기 회원님들이 웨딩 샤워 날짜를 잡아야겠네요. 다시 한번 결혼을

축하하며 우리는 다음 그림으로 자리를 옮기지요.

아 참, 아이도 많이 나으세요. 호호호."

 

김미희 화가 부부는 10년 동안에 젊은 연인 사이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진화, 발전하면서 끊임없이 성생활을 갖였는데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일찍부터 연애질을 하더니 임신 중절을 잘못하여서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쑥덕거렸으나 사실은 그런게 아니었다.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야 없던 연애 초기에는 피임이니 뭐니 섯부른

지식과 기교를 부려본 적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콘돔이니 배란 날짜

뭐고 다 집어치웠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들은 모두 한두번 이상 사고를 쳤다고 우거지 상을 하던 그 사고가

두사람 에게 만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걸 또 큰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면사포를 쓰고나서 돈도 좀 모으고 부터는 남들이 치는 사고가

그들에게는 갈망이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는 "날자 날자꾸나"하고 하이 파이브를 한다음에 서로 몸을

안기도 하였고 또 어떨 때는 "에라, 모르겠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라고 노래까지 하면서 피임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운 성생활을

가졌으나  아가는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린 후부터는 때로 경건한 상태에서 부부관계를 맺기도 하였고

자위행위가 임신에 영향을 주는건가하고 그걸 오래 삼가한 그녀의 말못할

지극 정성도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녀의 남편은 진실로 타고난 환쟁이었다.

대학 재학중에 이미 대한민국 미전에 입상과 우수상을 휩쓴 사연은

일간지에 특집으로 나온적도 있었고 "월간 미술"같은 메이저 미술 잡지

에도 심심하면 나오는 소재였다.

그는 돈을 일찍부터 벌어야할 팔자라서 미술학원을 차려놓고 입시생들을

끌어모으는데에도 그런 경력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또 타고난 선생, 베스트 티처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녀도 그림 재주가 나쁘지 않았고 상냥한데에다가 입담도 좋아서

몇번의 대한민국 미술전 입상 경력 끝에 백화점 문화 센터 유화 부문의

유명 강사 생활을 잘 이끌어나갔다.

 

돈을 좀 벌자 두사람은 불임 클리닉을 찾아서 정밀 검사를 하였는데

알고보니 남편이 "과정충" 상태에다가 그나마 그 정충들의 운동이 시원치

않다는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결혼 전 총각 때는 물론이려니와 결혼 후 10년 동안에도 그는 꾸준히

스포츠 센터에 나간 사람이었다.

요즈음은 피트니스 센터니 뭐니 이름도 고상하게 진화했지만 그는 사실

동네 운동장에서 철봉도 하고 역기도 들어올린 사람이었다.

아령과 곤봉은 혹시 붓을 놀리는데에 지장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피하였지만---.

 

그런 사람이었기에 처음 "과정충"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정충이

과다하다는 소리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의 사정액은 비교의 대상이 없어서 모르긴 하여도 그녀에게는 항상

과하였다.

"난 몰라, 설거지는 당신이 다 해줘. 난 하나도 재미없는데 혼자만 다

하고---."

관계를 끝낸 연인, 그리고 부부 사이에 이 보다 더한 표현이 나온들 누가

비속하다고 비아냥거릴 것인가.

아무튼 그는 여자가 설거지를 걱정할 정도의 사나이였다.

 

그런데 모르긴 하여도 화가로서는 드물게 역사(力士) 급인 그에게 과정충

이라는 진단이 나왔으니 처음에는 "정말 세상에, 정충이 많아도 큰일이구나"

하는 반응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정액이 묽다고할까, 정충이 없거나 부족하다니---.

과정충이란 정충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하나님, 맙소사."

예수님이나 절대자를 들먹인 심정이 된 것은 겪지 못한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전례음악(典禮音樂)이 다만 자신들의 오만한 희열을

위한 것인줄 보통 때에는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공자님이 음악을 일컬어 말씀한 "예악(禮樂)의 근본"이라는 것도 사실은

통치의 한 수단을 제시한 폴리틱스, 정치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불민한

화사(畵士)들이 알길 없었다.

 

그래서 김미희 부부도 섹스하고 사정하고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라고 섹스의 전례음악을 "입시울 가배얍게" 노래하였다.

그런데 그 풍부한 사정액 속에서 도대체 정충이라는 이름의 물건인지

생물인지가 몇마리 되지도 않고 그나마 제대로 꼬무락 거리는 놈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다니 청천의 벽력이었고 세상의 불가사의였으며 "truly,

truly",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 맙소사였다.

"세상에! 이 흥건하고 걸죽한 진국 속에 건질만한 건더기가 그렇게

없다니---."

진단을 받고 와서 그는 안하던 술까지 하더니 땅을치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 후부터 섹스는 휴면 상태였다.

섹스가 남녀 상열지사(相悅之事)이며 쾌락을 위한 행사인줄로만 알았던

그들에게 그게 그렇지 않은 거룩한 일이라는 통회(痛悔)와 자각의 순간이

이렇게 닥치다니---.

 

그녀도 함께 울면서 그를 달래려고 하였다.

 "여보, 당신 참 시시하네. 요즈음 인공수정 시술이 얼마나 발달했어요.

그리고 예술가가 뭐 그래요. 자식이 없으면 어때요. 백남준 선생이나

존 레논과 오노 요꼬 사이에 아이있다는이야기 못 들었네.

입양도 있고---. 우선 인공 수정부터 해봅시다."

"내가 아이 때문에 그러는줄 알어? 그게 아니라 이렇게 건강하고

이렇게 자신있게 부부생활을 한 나에게 그런 무기질 사나이, 빈 껍데기,

쭉정이, 무정란 사내라는 판정이 나와서 그게 억울하다는 것이지!"

그는 사실 아내의 만족도와는 상관없이 부부관계에서도 무언가 자부심

같은것, 수퍼맨이라는 자긍심 같은 것을 갖고 살아와서 그녀는 항상

그것이 문제이자 귀엽다라고 해 왔었다.

그런 자부심이 환상이었다는 데에 그의 아픔과 실망과 좌절이 있었다.

 

"이유가 뭡니까? 내가 왜 무정란 사나이란 말입니까?"

그가 불임 클리닉의 대가라는 의사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듯이 달려

들었다.

"이유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해야겠지요. 우선 가계에 그런 짐작가는

일이 없나요?"

"뭐요? 우리는 고모네까지 보통 10남매를 키웠어요. 이 사람 쪽도 모두

다산 가족이구요!"

"아, 부인 쪽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선생님께서---."

"오로지 나만 무정란이란 말이지요?"

"선생님은 무정란이 아니고 XY 염색체가 완전한 정상 남자분입니다. 

불임치료를 합시다.

방법은 많아요.

현대 의학이 복제까지 하는 마당입니다."

 

"싫어요. 나는 그런것 말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이세를 만들어

내고야 말겠어요."

그의 눈에 마침내 눈물이 돌고 목소리가 떨렸다.

남들이 입선도 하지 못하던 나이에 국무총리 상을 따낸 청년 화가의

강고한 고집과 찬란한 집념의 또다른 모습을 그녀는 다시한번 차라리

황홀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녀도 그를 잡고 울었다.

 

"낙담하지 마세요. 절대로. 선생님 같은 케이스가 너무 많아요, 요즈음.

이게 다 환경 호르몬 탓인가 합니다. 그러니까 방법이 많이 나와 있어요.

자신있어요."

의사가 두사람을 다독거렸다.

"저도 집히는게 있어서 또 이렇게 슬픕니다. 집이 어려운 환쟁이라서

일찍부터 화공약품, 안료 이런데에 투신하여 몸으로 떼우며 돈을 번

이력이 깊어요. 그래서 화가나고 슬프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닦았다.

"개연성이 충분히 있군요---. 환경이 만든 재앙일 수 있지요. 그건 또

인간이 만든 재앙이구요.

자, 이제 불임 클리닉에 오셨으니 클리닉을 하셔야지요."

의사가 어떤 결론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싫어요. 싫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 할 것입니다. 아니 안되면 말구요."

그가 고집을 썼다.

"부인도 그러신가요?"

의사가 막말을 하는 그와는 말을 나누지 않겠다는듯, 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태도가 너무나 교활하여서 그녀는 아무 대꾸없이 그를 이끌고 병원을

나왔다.

 

하여간, 불임 클리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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