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청동 시대 (8-끝)

원평재 2007. 6. 11. 14:23

 

26441

 

"두분의 불임 클리닉은 지금 어느 단계에 까지 왔나요?"

그가 화제를 일단 바꾸었다.

세찬 소나기와 격렬한 "소낙비"는 모두 끝이났지만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

라도 놓칠 수 없다는듯 계속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 말을 나누었다.

인간 관계라는 것이 모두 처음에는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낯을 익히게

되고 잘못이 없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으련만 두사람은 이제 인당수로

떠나기 전날, 심청 부녀가 망종보며 슬퍼하듯 그렇게 처연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들은 정말 그런 낯빛이었다.

동쪽에 떠오르는 햇님을 심청이 부상목(浮上木)에 붙들어 메어 놓고

싶었듯이, 여기 두 남녀도 소나기 다음에 얼글을 내민 빛나는 오정의 햇살을 

그냥 천개(天蓋)에 꼼짝도 못하게 붙잡아 놓고 싶었다.

그들은 오늘이 지나면 이제 다시 서로를 볼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신탁(神託)을 받은 것도 아닌데, 오늘 석양이 오기 전에 두 사람은 

작별을 할 처지였다.

조금 전 "컷 오프"라는 선언을 한 남자의 입술은 대역죄를 용서받고

싶다는듯 간혹 혼자 떨었다.

전날 밤샘의 영향이기도 하였으리라.

 

"불임 클리닉 단계가 어디까지 나갔느냐구요?"

"네."

"아, 지금 배란일에 맞추어 수태를 시도 하는 순서인데 그게 남편의

비협조랄까, 무관심 속에서 거의 실패로 끝날 것 같아---."

"이상하네요. 부군께서는 자기 힘으로 꼭 아이를 갖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열심히 협조를 해야할텐데---."

"그 사람의 감성이 또 만만치 않아요. 사실은 오늘도 배란일 최적기인데

지난달과 같은 짝이 나버릴 것 같애."

"지난달과 같은 짝이라면?"

"허탕친 에피소드랄까, 부끄러운 실패담이라오.

배란일을 의사 선생님과 다 계산하여서 그 날짜에 나는 목욕제개하고

무슨 선녀가 되었다고 야한 잠자리 날개 옷까지 그날의 작업복으로 입었지."

"선녀가 무슨 잠자리 날개 옷을 입어요? 나무꾼이 다 훔쳐갔는데---."

 

"나 농담할 기분 아니야. 그러면 놀리는걸로 알고 화낼거야.

하여간 명품으로 새로 구하여 입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남편이란 화백께서는 자정을 넘긴 시간에 들어온거야.

세상에 살다살다, 무슨 놈의 씨받이 날짜까지 받아서 잠자리 날개 옷 입고

날자, 날자꾸나 하느냐고---,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서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더군.

내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막가는 심사에서 나도 집에있는 와인을 병째로 들이키고는 나 지금

작업복 입고 완전히 쪽팔렸어---,날개 찢을거야하고 소릴 질렀지."

"아이구, 용서하세요. 나 조금만 웃을께요, 하하하."

그가 참지 못하고,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호흡 조절을 하며 웃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 말로는 하필이면 그날따라 미술 학원에 불시 소방

감사가 나와서 불량과 미비 지적을 많이 받은 끝에 시정조치 하느라고

종일 정신이 없었고 그런 일이 아니라도 옛날 시골에서 종자 돼지 접

붙이던걸 본 생각이 나서 발기할 자신이 서지 않더라는, 그런 식의

해명이었어."

"아이구, 정말 그만 좀 웃기세요."

"왜?"

"발기할 자신이 서지 않는다는게 뭡니까?"

"김미희가 불임 때문에 다 망가졌어---. 나 숙녀였는데 슬퍼."

 

"숙녀 자격증 끄떡 없으니까 걱정 마시구요, 그 전 달의 배란일에는

어찌 되었어요?"

"마찬가지로 발기부진이었어. 불쌍해, 그 왕성하던 사람이---."

"부진이 아니라 부전이지요. 온전치 않다는---."

"그러니 부진이지. 아냐 불능이야."

"심인성 발기부전이 겹치게 되면 약물치료도 힘들어지는데요.

인류 최고의 발명이라는 비아그라, 시알리스도 다 무색해져요. 

아이 갖는 일도 중요하지만 부부 관계가 어쩌면 더 중요하잖아요---."

"나는 아이 낳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 그게 목적이 되었어요.

목표가 아니라 인생 목적!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이해한다면 건방진 말인가요?

하여간 결국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단계로 넘어가야겠네요.

들으셨겠지만 먼저 난자를 난소에서 떼어내는 일이 좀 고통스럽지요.

하지만 견딜만은 해요.

인공 수정을 하여 배양을 한 다음에는 다시 자궁에 착상을 해야하는데

그때 실패율이 아주 높아진다고는 하지요.

뭐, 안되면 자꾸 또 하면 되는거지요.

비용도 아주 저렴하게 다운 되었어요. 한 25만원 정도---."

 

"전공이 다르다면서 잘만 알고 있네."

"우리가 생명 과학 쪽으로 많이 넘어가고 있어요. 그 쪽이 연구비가

많아요. 세계적으로---.

양수겸장을 노리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 불임 부부의 카운슬러하면 되겠네. 상담 의사로---."

그가 손사래를 치면서 자기 사정이 지금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을

하려는데 허리춤의 휴대폰이 또 힘차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자꾸 찾나보네. 들어가봐요. 어서."

"아니요. 밤을 세웠으니 찜질방에 가서 푹 자고 들어가야겠어요.

이래뵈도 제 목이 든든하거든요."

"그 말 들으니 나도 갑자기 몹씨 졸립네. 오늘 낮 시간은 다 비워

놓았으니까 여기 호텔 룸에 들어가서 우리 시체 놀이나 할까?"

"시체놀이?"

"정신없이 푹 자는거 말이야."

"솔직히 조금 겁나는데요?"

"설마, 우리가 근친상간을 하겠어? 호호호."

"그럼 체크인해 주세요. 제 카드는 가난해요---."

"정말 자고갈까---?"

그녀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듯, 혹은 반문하는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브런치 식대 청구서를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바로 그때, 이번에는 그녀의 휴대폰이 "이히 리베 디히"하며 수신

신호음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수? 그래 오늘은 일찍 들어와서 저녁하시겠다구요?"

그녀가 도루 앉았다.

화가 남편께서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들어오겠다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으며 그녀는 앞에 앉은 그에게 윙크하였다.

"들어와서 이번에는 마지막 시도를 해 보겠다는군.

잘 되었네. 우리 정말 여기 객실에 들어가서 먼저 근친상간 해버릴까?

날짜 맞추어서---.

어차피 그 양반하고는 오늘 시도를 해본다 한들, 의학적 승산은

없다던데.

발기 처방약도 받아 두었지만 임신 자체는 공연한 헛수고래요.

그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의 통과의례라고 하더구만.

이런 말 하는 나를 무섭다고 말아요. 나도 이제 너무 지쳤어---.

막가파가 된 심정이야."

 

"힘 내세요. 약간의 성공율은 그래도 있답니다. 그게 인체의 신비라고

하지요.

자연 치유, 자연 복원력, 그런게 다 신이 내리신 축복인가 봐요.

인간은 또 그 미미한 가능성에나마 최면을 걸어 도박을 하고, 마침내 

잃는 게임이 되더라도 후일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최후의 노력은

다 해 놓는 셈이지요."

 

"우리 담당 의사 선생님하고 똑 같은 말씀을 하시네.

하여간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불활성 정충이라도 한마리만 건지면

시험관에서 수정이 된다지만 예전에는 의대생들의 그걸 섞어서 자궁

에다가 직접 주입했다더구만---.

그게 탄로가 나고 병원 윤리 문제가 나오고, 난리가 났다면서?"

"제 생각에는 병원 윤리 이전에 개인 윤리의 문제였다고 봐요."

"무슨 말씀이야?"

"묽은 정액에 몰래 의대생 정액을 탔다는 것 말이지요.

정액을 제공한 의대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무언가 묵시적 동의를 하고

넘어간게 아니었겠어요.

난 그런 제공자는 되지 않았겠다는 것입니다.

학점을 못땄거나 학비를 보조 받지 못했을지라도---."

"여기 종교 재단에서 하는 이 명문 의대는 물론 아니었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여긴 물론 아니었지요."

 

"나와 그이는 A형과 B형이라서 아주 자유로워."

그녀가 뜬금없이 "자유"라는 표현을 문득 썼다.

그는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A형과 B형 부모는 모든 혈액형의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그런 차원의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남 총각님, 아까 청동 시대의 성기 부분이 많이 닳은 것을 보았지?"

"그래요. 거기만 반짝이던데요?"

"아기 못낳는 여자들이 만져서 그렇게 되었다더군. 거기를 세번

문지르고 손가락을 꼬으면 효험이 있대요---."

"그렇게 해 보지 그랬어요?"

"몰래 열번쯤 문질렀지! 호호호."

"그럼 쌍둥이도 낳겠어요.하하하." 

 

"그러고보니 우리 시대에도 신화는 계속 생성되고 있네. 인간의

염원이라는게 소멸하지 않으니까---."

"그럼요. 주술 문화가 당대 발복을 노리다시피 인간의 욕망은 즉시성,

현세성이고 조급하고 몰시대적이고---.

노력 없이 혹은 노력보다 훨씬 크게 결과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렇다해도 아이에 대한 내 염원을 그렇게 우습게 욕심으로만 보지는

말라구."

"그럼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지요. 로뎅의 '청동시대'를 문질러서

광택이 나게한 그 모든 염원에 대해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무슨

소리로 탓하거나 웃을 수 있겠어요.

제가 말하는건 그런 절박한 염원이 아니라 욕심에 속하는 당대발복을

지적해 본 것이지요.

아, 그래도 사람에게는 염치라는게 있어서 자신의 작은 공덕이 바로

자기에게 바로 돌아오지는 않더라도 좋으니 자식에게 만이라도 발복해

달라는 주문(呪文)이나 기호(記號)도 풍성하지요.

하버드 교정에 서있는 설립자 동상의 왼쪽 구두가 반질거리는 것이 그

예가 되겠네요.

그걸 문지르면 설혹 자기에게는 입학 허가서가 나오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자식이 태어날 때는 하버드 입학 허가서를 가슴에 품고 나오라고

말이지요. 하하하."

"호호호, 거봐, 자식이 중요하지."

그녀가 단호하게 속삭이며 일어났다.

카운터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급선회하여 코너 쪽의

화장실 있는데로 몸을 틀었는데 잘 찍은 연속 촬영의 카메라 프레임을

다시 돌려 보는듯 또박또박한 발걸음이 나긋나긋한 팔등신을 얹고서

숨이 막힐듯 수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 지금 우리 두사람 앞에는 대략 세가지 정도, 경우의 수가 있구나."

아름다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주문을 외듯 그 세가지를 손가락

으로 꼽아보았다.

우선 화장실로부터 나오자마자 그녀는 카운터에서 식대를 치르고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는 첫번째 경우의 수를 포함하여서,

상상 가능한 나머지 두가지 경우의 수까지도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싫은

정말 간절한 소망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두사람에게는 그 특별한 생리 현상도 함께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도 문득 우선 화장실부터 가야겠다는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날 소나기가 내리고 나서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녀도 항상 바빴지만 그는 더욱 바빴다.

그러는 중에 가을은 불쑥 찾아왔고 전람회는 풍성하였다.

한양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도 "밀레"가 다시 찾아왔다.

가을 어느날 해부학 교실에서 밤을 새운 그가 사우나를 마치고 밀레를

보러 미술관을 찾은 것은 우선 간 밤의 헛수고 때문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다시 밤새 헛수고를 하면서 피를 말리고 미술관을

찾았다.

 

멍한 머리를 하고서 그가 가장 큰 제1 전시관, 밀레의 전시장을

들어서니 아, 거기 그림들 앞에서 아름다운 김미희 화가가 도슨트로

해설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부신 아름다움에 가득하였으나 조금 피로한 기색

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색채와 의상의 마술사인가,

딱붙는 까만색 스키니 진 바지 위에 불타는 버밀리언 색조의 원피스를

무릅 근방까지 무심한듯 내리다지로 헐렁하게 입어서 몸 전체에 퍼진

피로감이 남들에게는 눈치 채이지 않도록 최대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임부복 모양의 그 원피스가 그 가을을 휩쓰는 패션 모드에 맞춘건지,

아니면 임부복 자체인지는 아직 그가 모를 일이었다.

 

 

"워싱턴 DC로 떠나요, 곧.

미국의 국립 보건원, NIH로 갑니다.

그동안 서류하느라 정신 없었어요.

황우석 파동 때문에 우리 코리아의 Bio-scientist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국제 학계에서 덕을 많이 봤네요.

여러군데에서 그 분 시체라도 가져 가겠다고---, 아니 제가 말이

거칠죠.

시체처럼 된 그 양반을 모셔가겠다고 하는 와중에 우리도 덕을 보고

쉽게 떠나게 되었어요.

 

인터넷에서 오늘 밀레 전람회의 dct로 선생님이 나오신다는걸 알고

잠깐들리는 것입니다.

전에 쓰던 메일로 같은 글 남깁니다.

이제 그 주소는 닫을 것입니다.

만나지 않고 떠날겁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며 일했지만 이런저런 생각 때문인지 모처럼

헛수고가 나왔네요.

이 가을에는 부부전도 열게 되었다면서요, 축하합니다---.

 

끝으로,

사랑---, 그래요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다음 그림으로 옮길 때 그는 쪽지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얼른 자리를 떠났다. 

 

봄.


이삭줍는 여인.


양치기 소녀와 양떼.


마가레트 꽃송이.


물통의 물을 옮기는 여인.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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