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아. 미안하지만 나 지금 학기말이라 무척 바쁘다네.
기말 처리가 끝나면 또 뉴욕 대학의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기전에
원고 쓸일도 잔뜩 밀려있고.
그러니까 다른 분에게 알아보라구---.
아, 오해는 말게.
내가 재혼이니 이혼이니 그런 것에 편견을 갖고 있다는게 아니라
내 사정이 지금 급해서 그래요---."
K 교수는 거짓이 아닌 실제 상황을 들어서 강한 거절의 뜻을 표하였고
이어서 용의주도하게도 '편견'이 없다는 마지막 말까지 달았다.
이혼율이 OECD 최고 수치를 달성한 공화국에서 어릴 때부터 몸에 익은
'해동 유학'의 덕목을 붙들고 인문학 교수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그는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서 리버럴 페널리스트로 언론매체의
자료 파일에 등재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공적인 입장 표명과 사적인 감정은 달랐다.
그는 해동 유학자 가문의 적통이었고 대소 향사에서 술잔을 올릴 때에는
거의가 초헌 차례였고, 아헌을 잡는 경우도 드문 입장이었다.
이런 구조상의 특전을 향유하면서 진정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외양과 본심은 솔직히 공사다망, 공사괴리, 표리상극이었다.
"선생님, 강명희가 울면서 부탁하고 아침에 비행기 탔습니다."
"강명희? 아, 강명희! 걔는 우리과의 누구더라, 하여간 캠퍼스 커플에
학과 커플로 오래 전에 결혼을 한 여학생이 아닌가.
그때도 내가 주례를 거절한 기억이 있는데---."
"네, 박 정식이 하고 결혼했었지요. 그때도 제가 지각을 해서 생긴 비극의
결과였답니다.
그때는 제가 졸업 여행의 날짜를 잘못 알고 온통 하루를 지각하였습니다.
지금같으면 휴대폰이라도 있었겠지만 당시 저는 건설 현장의 함바 집에서
야간 경비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라 낮에는 주로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졸고 앉았으니 시간이나 날짜 까먹기가 일쑤였지요.
하루 늦게 졸업 여행을 뒤쫓아갔더니 박 정식이 이놈이 강명희를 어떻게
꼬셨는지, 아이구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하여간 그 전날 밤에 그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더라구요."
"박 정식 그 녀석의 얼굴 모양이 또다시 실례의 말이지만 양놈 같잖아요.
그러니까 요즘 뜨는 말로 석호필이잖아요.
그 얼굴로 강명희를 후려내더니 결혼 하고나서도 내내 여자 관계가
많았어요.
또 저하고의 과거를 캔다면서 명희에게 손찌껌도 해왔답니다."
"남의 집 사정을 어찌 그리도 잘 아누---. 하여간 그런 사정이라면 요즘
세상에 십년도 길었구만.
하지만 그런 인간관계에 교수를 끌어넣을 생각은 말게.
나에게 그런 얼키고 설킨 사이의 복원과 당위성의 확보, authentification
이랄까 명리를 다시 세우는 과정의 주례 부탁을 하겠다면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불쾌해요.
아, 아니,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사실은 그런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정말 시간이 없다네."
표리가 다른 그의 이성과 감성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선생님, 며칠전 TV에서도 선생님은 잘못된 결혼이라는 자기 판단이 서면
당장에라도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야 된다고 심야 토론에서
주장하셨잖아요."
"그래, 그건 지금도 유효한 내 주장이야. 하지만 그 주장 때문에 내가
만사를 제하고 제자의 재혼 주례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법이 어디있나?
여보게, 내가 한번 다른 분을 찾아봐 줄께."
"선생님, 은인의 자리에 다시 한번 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제가 오늘날 이렇게 중소기업에서나마 사람다운 역할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다 선생님의 하해같은 은덕이었습니다.
그리고 명희도 선생님의 강의에서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답니다.
특히 선생님의 영문학사 강의, 영국 낭만주의의 시대적 승리에 관한
명강의, 워즈워드와 코울리지의 시를 라임에 맞추어 웅변처럼 외우시며
춤추듯이 쏟아놓으신 그 달변, The Triumph of Romanticism에
관하여서는 명희가 죽어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마운 말일쎄, 하지만 십여년 전의 명강의 때문에 내 인생 후반의
생활 철학, 주례 그만 서기의 원칙을 깨고 싶지는 않네.
정말 미안해."
K 교수는 바쁘다는 핑게에서 부터 이제는 주례 서지 않기라는 무슨 철학
까지 들먹이게 된 자신의 처지가 참 참담하였다.
처음부터 최근에 배운 비법을 한번 써먹어 볼 것을 그랬다고 속으로
후회를 하였다.
"어, 결혼을 축하하네. 그래 내가 주례를 서주지."
그렇게 호탕하게 말을 하고나서 수첩을 꺼내 날짜를 맞추어 보는 척,
"아차, 안타깝지만 그날 그 시간에 주례 선약이 있네---."
그런 치사한 비법을 누가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 그 비법을 써먹어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 같은 때에는 참 유효하리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제는
그걸 적용해보기에는 너무 늦기도 하였고 또 이런 순수한 제자에게 그런
방식이란 죄받을 짓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 주례를 서주지 않으시면 명희가 아마도 LA에 갔다와서
대성통곡을 할 것입니다."
"강 명희 양이 LA는 왜 가며 또 대성통곡은 무언가?"
"국제선 스튜어디스로 계속 근무하고 있잖아요."
안 신중, 아니 안달준 군은 그것도 아직 모르고 계셨느냐는 식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교수를 쳐다 보았다.
"그동안 영문과 나온 스튜어디스가 어디 한둘인가---.
아니 내 말 고깝게는 듣지 말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지.
그런데 미즈 강이 그렇게 대성통곡하리라는 부분은 또 무슨 뜻인가?"
그는 이럴때 '미즈'라는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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