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교수는 무슨 영감을 얻은듯 힘차게 주례사를 시작하였다.
"여기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주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낍니다."
주례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보아하니 사회자가 무어라 강변하건 간에 이 자리에는 양가의 부모님들도
나오시지 않은듯 하고 두 사람이 몸을 담고 있는 직장의 동료 몇분과 주로
두 사람의 친구들, 대학의 동기들이 나와 앉아서 조촐한 자리를 만들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하객들이 적어서 참을 수 없이 가볍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흠찔 놀라는 신랑 신부와 하객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이야기하듯이
주례사를 이어나갔다.
주례사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세상이 빨리 변하여서 이 자리가 초혼의 신랑과 재혼의 신부가 마주 선
인연이라는 데에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정작 놀라는 것은 이들이 십여년 전에 이미 캠퍼스에서 가볍게나마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사이였다가 한 순간의 실수로 운명이 바뀌었다는,
존재의 가벼움과 또 이 바뀐 운명을 십여년 만에 되돌이키려는 방법의
가벼움 때문이다.
기왕에 여기까지 나온 하객들이라면 두 사람의 인연을 대략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싶어서 덕담이 아니라 쓴소리를 하겠으니 함께 깊이 성찰하고
그런 다음에 이들을 격려 해 주시라는 취지이다.
두사람은 지금 신랑은 목에, 신부는 드레스에 A자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있는데 그들 나름대로는 깊은 의미와 반성이 담긴 absence라는 영문의
머릿글자로 여기고 있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저 멋으로 붙인듯 싶다.
예전에도 신랑은 지각 때문에 인생의 좌표가 흔들렸다는 통한을 안고서
absence의 A자를 목에 걸었으나 지각의 버릇은 고치지 못하였다.
신부도 안 달준이라는 신랑의 성씨를 따서 A자를 달고 나왔는지 신랑의
애통한 마음에 동참하는 뜻으로 주홍 색갈의 A자를 달고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다니엘 호돈이 쓴 <주홍 글자>를 읽은 문학도로서는 삼가
했어야 할 악세사리(accessory)의 A자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주홍글자>라는 작품은 오늘날 청교도적 해석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낭만주의적 해석, 구원으로 나아가는 다행스러운 타락이라는 해석,
독선적인 죄의 적용이 개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을 그렸다는 상대주의적
해석, 현대 페미니즘적인 해석 등등으로 시대정신과 독자의 반응에 따른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지만 지금 신부의 옆구리에 매달린 주홍색 A자는
이 엄숙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하고도 가벼운 징표에 다름 아닌 것
같다.
내가 신랑 안군의 학창시절, 건설 현장의 함바집에서 야밤을 서느라 밤을
지새운 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게 지속적인 지각이나 결석의 변명은
될 수 없었듯이, 오늘 이 자리도 십여년 동안의 한을 푸는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무겁고 진지한 첫번째 자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의미와 무의미, 부정과 긍정, 우연과 운명,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하여 그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나도 지금 두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십여년을 기다린 순애보를 한 순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몰아 세우는지도 모르겠으나 앞으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고 흘러간 시간을 회수하는데에 더욱 노력하라는 고언으로
받아달라.
주례사의 마지막 구절에서 신랑과 신부의 얼굴이 펴졌다.
주례사를 듣는 하객을 이즈음 보지 못했으나 이 날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K교수는 기념 사진을 찍고 얼른 자리를 떴다.
주차장으로 가는데 두 여학생 제자가 좇아왔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점심도 드시고 저희들 인사도 받고 하시지
왜 그냥 가세요?"
"어, 선약이 있어서---."
그가 둘러대었다.
"어색한 자리였죠? 정말 잘 해 주셨어요."
제자 둘 중에 하나는 통짜 원피스를 걸치고서 아줌마가 다 되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투피스를 몸에 딱 맞게 입고 있었다.
"자네는 아직 미혼이구나."
그가 투피스에게 말했다.
"네, 신랑감 하나 구해주세요."
그녀가 얌전하게 대답하였다.
"선생님, 오늘 정말 큰 일 날 뻔하였어요."
원피스가 말하였다.
"왜?"
"명희 전 남편, 박정식이가 뒷자리에 들어와 있었잖아요."
"아이구, 맙소사. 내가 눈도 나쁘지만 얼굴 기억도 없지. 먼저 인사가
없으면---."
"그런데 교수님이 나타나시고 또 주례사에서 마구 야단을 치시니 슬그머니
물러갔답니다.
학과 동기생들은 안 달준이가 다 불러 모았구요.
사회자도 떡대라는 별명의 철만이를 불러냈구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지요, 호호호. 저희들도---."
"명희는 아이가 없었나?"
그가 물었다.
"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요. 맨날 비행기 타고 하늘을 날라만
다녔으니---."
"얘, 선생님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투피스 제자가 친구를 곱게 나무랐다.
"괜찮아, 선생님 저는 아이가 이미 둘인 아줌마니까 괜찮죠? 호호호.
그런데 얘는 아직 미스가 뭘 너무 많이 아는구나 싶네요.
선생님, 얘가 골드 미스예요. 지참금이 많다는 소문이예요. 중매 좀
서 주세요. 명희 보다는 지참금이 훨씬 적을지 모르겠지만."
"신부가 돈이 많다구? 스튜어디스가 좋긴 좋구나."
"아니, 모르셨어요? 위자료를 엄청 받았데요. 박 정식이가 고향 땅 토지
보상비를 몇 십억이나 받았구요.
그걸 또 엄청나게 떼어 받았다던가요---.
하여간 변호사를 잘 쓴 덕분이지요.
이혼 사유는 사실 달준이하고 명희가 그 동안 다 만들었는데요---."
"세상에---.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구나."
"명희가 웨딩 드레스에 단 A자는 아리랑 에어라인 항공사 로고였구요.
그래서 A자가 주홍과 파랑으로 겹쳐 스티커로 �어있었잖아요.
하와이 일주일 허니문 특전에 대한 댓가로 붙이고 그 사진은 항공사가
마음대로 쓸 수있는 초상권 값이기도 하대요"
"이런, 내가 노안이 되어서 그런 구별도 안되었구나. 하긴 워낙 내가 The
Scarlet Letter의 묘사에 익숙해 있었으니---."
"노안이라는건 엄살이시고 옷이 하도 터져서 위에서 눈 두실데가 없었
겠지요.
하여간 선생님, 걔들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예요, 드라마.
아까 주례사에서 흘러간 십여년의 시간을 회수하는데에 전념하라는 당부의
말씀은 사실 필요가 없는데 싶었어요. 걔들 십년은 우리 백년이었어요.
둘다 선수라서 A자는 아마도 ace의 약자였나봐요. 호호호."
원피스 제자의 말 빨을 뒤로 남기며 그는 차 문을 얼른 열고 닫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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