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주홍 글자 (3)

원평재 2007. 6. 30. 02:09

 

27082

 

"명희와 제가 달콤한 감동의 순간과 비감한 후유증을 함께 갖게 된 것은

선생님의 낭만주의 명강의 탓이었지요.

우리가 받은 그 감동의 시간은 졸업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때 선생님의 강의가 명희와 저, 아니 우리 클래스 전부의 심금을 울렸

답니다.

그런데 정식이 녀석이 졸업여행의 첫날 밤에 그 낭만적 분위기를 마약이나

미약처럼 이용하고 확산시켜서 명희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감동을 먹였

니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은 저의 absence 탓이었지요.

제가 부재했던 그 시간과 공간을 그 녀석이 침노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십여년전 선생님의 명강의 탓을 하는 이런 낭만주의적

주례 요청도 어여삐 여겨주십시오.

책임을 묻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선생님이 그만큼 고매하시다는---."

 

"그만하게. 자네 논리는 엽기적인 책임 추궁이야.

하지만 자네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마음을 고쳤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이 엽기적인 커플에게 인생의 무거운 추라고 할까,

어떤 근본적 대못 같은 것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쐐기를 박고

못질을 좀 해 놓아야 할 것 같네.

내가 낭만주의 강의를 그만둔지는 오래 되었어.

대학에서 문학 강의가 뒷전으로 쳐지기 전부터였지.

세계화에 따른 무한 경쟁시대, 대학에도 찾아 온 구조조정이 자유전공제

라는 이름으로 캠퍼스를 누비는 이 엄혹한 현실 앞에서  내가 택도없이

낭만의 풋내나 풍기고 있으면 청춘 남녀들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런 조바심이 온지도 한참 되었지.

그래서 커리큘럼 바뀔 때에 미련없이 그 과목을 포기했지.

낭만은 사라지고 생활 영어같은게 거기 들어왔을거야. 나름으로는 용단

이라고 생각했는데 뒷맛은 좋지 않았고 내가 비겁한거나 아닌가 만감이

교차하였다네.

하지만 늦게나마 위안의 계기도 있었지.

  

   

 

얼마 전에 <남한산성>을 쓴 김훈 작가와 담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양반도 

대학때는 키츠와 쉘리를 외우고 다닌 로맨티시스트였다고 술회하더군.

피끓는 청춘 시절에는 누구나 시인이고, 또 감상적 낭만주의자가 되어보지

못하면 개인적 성장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도 마찬가지여서 <노톤 앤솔로지>의 낭만주의 부분에 손때께나 묻혔다는

것이지.

그런데 어느 순간 이순신 장군의 <난중 일기>를 읽고 나서부터 낭만주의

텍스트를 집어던졌다는군.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있던 사만명의 군병과 백성,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도륙을 당했다는 장계를 읽은 그 날짜에, 장군의 기록은 다만 

'나는 장계를 읽고 방으로 들어가 그 밤을 혼자 지냈다' 라고만 되어

있다네.

감상이 모두 배제된 이 장엄한 서술에 접하고나서부터 김훈은 낭만주의

요설을 자신의 문체에서 요정냈다는거야.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에서도 마찬가지야.

Chapter Two, 제2장의 끝마무리는 이렇지.

'그해 전선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였다. 그러나 결국 병은 억지 되었고  

다만 7000명이 죽었을 따름이었다.'

처절한 현장 묘사는 그걸로 끝이야.

눈물도 한숨도 나홀로 씹어삼킨거야. 작가가---.

이런 관점에서 낭만주의 하나도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 크지.

안 군, 내 한탄이 좀 길어졌지만 새겨듣게.

그리고 내가 주례의 자리에는 나갈테니까 걱정은 말고. "

 

K 교수는 더 이어질 것만 같은 끈적하고 기이한 대화에 쐐기를 박고

며칠후 결혼 식장으로 나아갔다.

하객은 예상대로 많지 않았으나 이건 또 예상 밖으로 안 달준의 동기

인듯한 졸업생들이 여럿 나와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반갑게 인사는 받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서 얼른 주례석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사회자도 안면이 아물아물한 졸업생이었는데 덩치가 아주 좋았다.

 

이윽고 '신랑 신부 함께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굵은 말이 나왔다.

신부가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대표격인 아버지의 인도로 식장에 들어와서

다시 신랑이라는 남성상에게 위탁되는 구식 통념을 깨고, 혁신적 입장

방식을 택했다는 사회자의 입담 좋은 넉살, 아니 설명이 장내를 압도하였다.

굵은 바리톤 음성에는 남성성이 철철 흘러 넘쳤다.

신랑은 싱글벙글 여유만만하였고 신부는 온 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여기

저기 터지고 헤픈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말하자면 복장 위반이었다.

 

 

졸업후 정말 오랜만에 보게된 제자 신부는 그런 옷에 걸맞게 요염하였다.

그런데 웨딩 드레스의 허리 부분에는 주홍색갈로 A자가 멋있게 수놓아져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보니 신랑도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펜단트가 달린 부분은 맵시있는

고급 예복 속으로 들어가 있었으나 그 모양은 틀림없이 A자일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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