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호돈의 작품,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달린 주홍색 A자는 간음을 뜻하는 adultery,
혹은 adultress의 첫 글자였으나 마침내 angel, able, abel, 등의 긍정적
의미로 진화,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헤스터 프린이 겪은 고통은 예사롭지 않았으나 호돈은
여주인공의 궁극적 인간 승리로 작품을 끝맺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호돈이 글을 쓰던 시대는 아직 청교도적인 윤리가 시대정신으로 자리하고
있던 시절이라서 그의 글쓰기는 더욱 용기있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현대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 중 하나를 바로 여기에서 본다---.
강의가 훌륭하였는지 학생들이 우수하였는지, 문학 작품을 논하는
문제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텐데도 K 교수가 담당한 <미국 소설>
강좌의 기말 시험 문제에는 이와 유사한 모범 답안이 속출하였다.
고사를 채점하던 K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수강생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여학생들은 물론이려니와 나머지 20
퍼센트 남학생들까지도 어느새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모두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을 예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K교수가 미소 지은 것은 그런 때문이 아니었다.
사연이 있었다.
같은 과목에서 십여년 전에 나온 어떤 답안지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
이었다.
이름은 잊었고 성씨만 "안"군으로 기억되는 학생의 기말 고사 답안지에는
뜻밖에도 A자가 absence의 첫글자라는 자신의 사연이 설명되어 있었다.
안 군은 그 과목의 중간 고사를 놓친 학생이었다.
지방 출신으로 자취를 하는 그는 평소 첫 시간을 자주 지각하였는데,
마침내 중간 고사 마저 착각과 늦잠 속에서 빠뜨린 것이었다.
규정에 따라 70퍼센트만 인정되는 '무사유 재시험' 보다는 기말시험
한번만으로 중간고사까지 100퍼센트 인정해 주겠다는 K 교수의 결정은
파격이었고 특혜성이었다.
자취로 점철된 국내외 학창 시절의 자기 체험이 만든 교수의 호의였다.
물론 대학에 인문학적인 여유와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 그러니까
줄잡아서 십여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설같은 스토리이기도
하였다.
안 군은 교수의 호의를 잊지않고 또한 자신의 태만도 질책하는 의미에서
목에 영문 A자 이니셜의 펜단트를 그 중간고사 이후부터 걸고 다닌다고
기말 고사 답안지에서 술회하였다.
자기도 이제 angel까지는 몰라도 able한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 속에
산다는 이야기로 그 답안지는 끝나고 있었다.
창작 강좌가 아니었기에 그의 답안지에 높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였으나
하여간 그는 한번의 시험으로 학점을 땄고 그 해에 졸업을 하였다.
재미난 사실은 그가 목에 A자를 걸었다고 하였으나 이후에도 지각은
밥먹듯 하였고 매사에 굼뜬 편이었다.
다만 굼뜬만큼 여유가 있었고 마음이 착했고 신중하여서 "신중이",
혹은 "안 신중"이라는 별명으로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다가 별 일 없이
그는 학창 시절을 마쳤다.
K교수가 흘러간 과거를 잠시 상기하는데 연구실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조용히 들어서는 사람을 보니 바로 그 졸업생, "안 신중"이었다.
"아니,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내가 기말고사 채점을 하면서
문득 자네 생각을 했어. 이게 얼마만이야, 십년이 넘었지?"
"죄송합니다. 전화도 못드리고---."
그가 머뭇거리며 명함을 내 밀었다.
무슨 중소기업의 대리 직책 다음에 "안 달준"이라는 이름이 고딕체로
박혀있었다.
"주례 부탁하러 온건 아니겠지?"
졸업생이 "신중하게" 머뭇거려서 교수가 우스게로 설마하며 말을
꺼냈다.
졸업 10여년 후에 혹시 재혼이면 몰라도 초혼의 주례 부탁을 하러 왔을
리 없었고, 사실 K교수는 이즈음 웬만해서는 주례를 거절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바로 그 주례 부탁을 하러 왔습니다. 죄송해서 전화도 못드리고 직접
이렇게---."
"이 사람아. 직접 이렇게---가 아니라 불쑥 이렇게---가 맞는 표현이네.
그리고 전화를 못한건 다른 연구실을 먼저 돌다가 결국 예까지 흘러 들어
온건 아닌지 모르겠어.
어쨌거나 나는 요즈음 일절 주례를 맡지 않는다네."
"다른 데를 돌다 오다니요, 교수님. 제가 부탁드릴 데라고는 전에도
그랬듯이 항상 은인이신 선생님 뿐인데요---."
학생은 거의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넥타이를 갑자기 풀어서
와이셔츠 속으로 목에 걸고 있는 펜단트를 보여주었다.
반짝이는 영문 이니셜 A자가 가물가물한 추억의 한 시절과 함께
"나 참---. 설마 재혼은 아니겠지?"
"그럼요. 저는 초혼이고 신부만 재혼이죠."
"뭐라구?"
K 교수는 펄쩍 뛰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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